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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인생의 진로 방해꾼 진멸 명령>의 줄거리 :
아멜렉 진멸 명령이 사울 왕에게 떨어집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통과할 때, 대열에서 떨어진 노약자를 공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가나안으로 향하는 진로를 방해했던 자들입니다. 이처럼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걸어야만 하는 진로를 방해하는 아말렉이 내 인생에도 있습니다. 내 마음의 진로, 내 몸의 진로, 내 소유의 진로를 방해함으로써 내 인생을 총체적인 난국으로 만드는 아말렉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자체가 아말렉을 날마다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내 인생의 진로 방해꾼 진멸 명령
(사무엘상 15:1~6)
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4.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세어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라
5. 사울이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시키니라
6.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본문 중심으로 <내 인생의 진로 방해꾼 진멸 명령>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아말렉으로 비유되는 내 인생의 진로를 방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뜻의 제목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노정에서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대적했습니다. 반면에 6절에 나오는 겐 사람은 이스라엘의 노정을 도왔습니다.
가나안 노정에서 이스라엘은 긴 대열을 이루고 있었기에 뒤로 처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노인, 환자, 어린이, 임산부들 같은 경우입니다. 아말렉은 이러한 무방비 상태의 약자들을 몰래 접근하여 공격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진로방해가 앞에서 막는 것을 의미한다면, 아말렉의 진로방해는 뒤를 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진영 뒤쪽이 공격받으면 앞에서도 나아갈 수 없기에 멈추고 아말렉과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왕정 체제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통해, 가나안 진로를 방해했던 아말렉의 죄를 청산하려 하십니다. 그리고 본문에 기록되었듯이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정면으로 충돌한 방해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들의 방식이 매우 야비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진멸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반면, 겐 사람은 이스라엘을 도왔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겐 족속이었습니다. 장인 이드로와 처남이 모세를 찾아왔을 때 장인 이드로는 이스라엘을 조직화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겐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호의적이었기에 민수기 10장 31절을 보면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겐 사람들 삶의 터전은 광야였습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가나안으로의 진로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도움을 요청했고, 장인 이드로와 처남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로 방해꾼이었던 아말렉과 대비되게 겐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걸어가는 진로를 도왔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겐 사람들을 살리도록 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향하는 진로가 있었던 것처럼 내 인생에도 하나님이 정하신 진로가 있습니다. 이것을 세분화하자면 마음의 진로와 몸의 진로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가나안으로 끌고 가려 하십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 반드시 진로 방해꾼들이 나타납니다. 먼저 내 마음의 진로와 몸의 진로가 어디인지를 알아야 누가 방해꾼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내가 날마다 걸어야 할 정해진 진로입니다. 내 마음은 평생, 날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진로를 가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이라는 가나안을 향하는 진로입니다. 이러한 진로에서 내 마음을 이탈하게 하고 진전을 중단시키는 방해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든지 누구든지 반드시 진멸해야 할 아말렉입니다. 마음에 흔적이 남지 않도록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했던 것처럼, 내 마음이 출세상하여 천국 보좌 앞에 이르는 진로를 방해합니다. 천국으로 가야 한다는 상황에서 보면, 내 마음은 마치 노인이나 환자나 소아나 임산부와 같이 너무 미약합니다. 내 마음 자체가 도저히 천국으로 갈 수 없는 속수무책입니다. 약간만 건드리면 진로에서 이탈하고 맙니다. 내 마음을 자꾸 건드려서 진로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향할 곳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질 수 없고, 맛볼 수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는 천국입니다. 그 천국은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을 향해 가야 하는 입장에서 내 마음은 가장 불리하고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살짝만 건드리면 그리스도 연쇄 과정으로부터 이탈합니다. 우리는 아말렉으로 비유된 방해꾼들을 반드시 진멸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로 방해꾼들은 마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진로에 대해서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정하신 뜻이 있고, 내 몸은 이 땅에서 그 뜻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하늘에서 정하신 뜻대로 내 몸이 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들이 있습니다. 마음의 진로 방해꾼과 몸의 진로 방해꾼들에게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반드시 나를 싫어하고, 비난하고, 가로막고, 내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자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진로 방해꾼들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고,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진로를 따라 날마다 하늘에 도착할 수 있다면, 이 땅에서 내 몸의 진로를 방해하는 모든 자들의 방해는 효과를 낼 수 없습니다. 방해꾼들이 내 몸의 진로를 아무리 막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그들의 행동이 아무런 효과도 없게 만드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전진할 수 있는 효과를 만드십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진로의 방해를 받지 않아야 몸의 진로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진로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 보좌 앞에 머물 수만 있다면, 내 몸에 대하여 방해꾼 노릇을 하는 모든 것들은 효과가 제로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방해를 역이용하셔서 오히려 진전이 있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를 향한 계획은 전지전능하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정하신 진로에서 내 마음과 몸이 이탈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마음과 몸의 진로를 방해하는 아말렉을 진멸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에서 진멸해야 할 아말렉이란 실제로 어떤 존재들일까요? 본문 3절을 보면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남기지 말고”라는 부분을 봅니다. ‘남기다’는 히브리어 하말(חָמַל)로써 ‘동정하다, 아까워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진멸할 때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까지 다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일말의 동정심도 갖지 말고 무자비하고 냉혹하게 내 마음에서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아말렉을 죽이는 일에 대해서는 아까워해서도 안 되고, 동정해서도 안 됩니다.
이 말씀에서 무엇이 내 마음의 아말렉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말렉은 내 마음이 정해진 진로를 따라 하늘로 가는 것을 막는 존재를 비유합니다. 이러한 아말렉은 내 마음에서 동정심을 유발하고, 아까움을 발생시킴으로써 애정을 갖게 하고, 그것이 없으면 서운하고 괴로워서 못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아깝게 여기는 것들이 다 아말렉이라는 내용의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내 마음의 진로 방해꾼이고, 아들이나 딸이 내 마음의 아말렉이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 안에서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진멸해야 할 아말렉은 아버지나 어머니일 수도 있고, 아들이나 딸일 수도 있으며, 재물이나 소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내 마음에 담겨있는 모든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다 진멸하지 않으면 내 마음은 아말렉들에 의해 방해를 받아 절대로 천국까지 이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봅니다. 아브라함의 싸움도 결국은 아말렉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내 사라, 독자 이삭이 아말렉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이방 왕들에게 들여보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은 냉혹하고 무자비합니다. 아내에 대한 동정심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내를 아까워하는 것이 마음 진로의 방해가 되기 때문에, 무자비하고 냉혹하게 아내를 보내버린 것입니다. 이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묶어서 제단에 올리고 칼을 들어 쳐 죽이려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무자비함과 냉혹함으로 마음이 하나님께 갈 수 없게 방해하는 이삭이 아말렉이었기에 진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진멸하되”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하람(חָרַם)에는 ‘금지하다, 진멸하다, 봉헌하다(바치다)’라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금지한다는 것은 있음이 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멸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멸하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세 가지 의미가 동시에 들어있는 예가 여리고성 전투에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호수아 6장 17절을 보면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라고 했고, 21절에서는 “그 성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두 말씀을 보면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진멸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는 것일까요? 히브리어 하람에 ‘금지하다, 진멸하다, 바치다’라는 뜻이 함께 있음을 염두에 두자면, 진멸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됩니다.
금지한다는 것은 내 마음에서 있음이 되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있는 것은 진멸함으로써 없음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없음이 되게 한 대상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됩니다. 성경에서 진멸한다는 뜻의 하람이 쓰일 때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살아있는 것은 다 죽입니다. 그리고 재산이 될만한 물품과 재물은 다 불태웁니다. 금, 은, 동은 불태울 수 없기에 거두어서 하나님의 성전에 보관합니다. 이러한 하람이 의미하는 초점은 내게서 완전히 없음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무찔렀을 때 많은 전리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든 짐승이든 물품이든 어떤 것도 내게서 완전히 없음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신앙의 중요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바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축 헌금을 한다면 집을 팔아서 전세로 바꾸고 나머지 차액을 드린다는 식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침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집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소중한 집을 팔아서 전세금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건축 헌금으로 바치겠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하람이 의미하는 대로 바침이란 내 마음에서 진멸하는 것입니다. 집이 있든지 없든지 마음에서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진멸하면 집 자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진멸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선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보시는 앞에서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진멸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하람의 의미대로 내 마음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진멸하면 일거양득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내 마음은 진로방해를 받지 않고 하늘로 올라갈 것이고, 이 세상에서 내 마음 안에 담고 있던 소유들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맡긴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맡기다’는 뜻의 히브리어 갈랄(גָּלַל)은 무거운 돌을 산 아래로 굴려버린다는 뜻입니다. 산 아래로 굴려버린 무거운 돌은 다시 들어서 산 위로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이는 곧 내 마음에서 완전히 버림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에서 진멸하는 것이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무거운 돌을 산 아래로 굴려버려서 다시는 그 돌을 산 위로 가져올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하나님께 맡긴다’라고 하면 의미가 다릅니다. 내 마음 안에 담고 있는 상태에서 여전히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담고 있는 소유들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내 소유의 증진과 개선을 위하여 고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도로 헌금이나 봉사나 충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고용하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내 마음 안에 있는 세상의 소유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개선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을 맡기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맡김이란 내 마음에서 진멸하여 있음의 흔적이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맡김이고 바침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사라를 이방 왕들에게 들여보냈습니다. 이 사건의 초점은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사라를 없음이 되게 진멸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방 왕을 계기로 사라를 진멸하자, 사라는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가지시고 이방 왕 둘을 완전히 두려움에 압도당하게 하셔서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하십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린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무자비하고 냉혹하게 진멸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삭이 지금 내 앞에 계시는 하나님께로 마음이 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이요 아말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려 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이삭을 죽인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멈추게 하시고 이삭을 잡아채십니다. 아브라함 마음에서 이삭의 있음을 흔적도 없이 진멸했을 때 하나님이 이삭을 가로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미래를 이끌어가십니다.
내 마음에 담긴 소유들이 소중하고 아까울수록 내 마음의 진로를 방해하기에 진멸해야 합니다. 마음 안에 담긴 아깝고 소중한 소유를 진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소유들이 하나님 손으로 넘어가고,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위해 준비하신 진로를 가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산, 집, 전토, 아내, 남편, 자녀, 부모, 형제, 자매, 내 몸까지도 소중하고 아까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내 마음에서 아말렉 노릇을 합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말렉입니다. 마음 안에 이것저것 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마음에 아내를 담고 있고, 돈을 담고 있고, 미래를 담고 있다면 이것들은 아말렉이다.’라고 여기고 무자비하고 냉혹하게 진멸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상태로는 더 이상 한순간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마음의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고 하신 것은 ‘너희를 위해 준비된 진로를 방해받지 않고 가려면’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은 날마다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내 마음 안에 아들딸이라는 아말렉, 건강이라는 아말렉이 들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진로 방해꾼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이대로 살면 안 된다고 여기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마다 아깝고 소중하게 여겨서 마음 안에 담고 있는 것은 다 다릅니다. 똑같이 자식을 두고 있는 부모라도 어떤 때는 마음에 사업이 강하게 부각될 수 있고, 어떤 때는 사업보다 자녀가 부각될 수 있습니다. 나는 마음에 자녀가 담겨있고, 당신의 마음에는 사업이 담겨있고, 또 다른 사람의 마음에는 건강이 담겨있습니다. 그때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방해꾼들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아말렉 진멸의 명령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이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은 끊임없이 세상 것을 아까워하고 소중히 여기는 아말렉을 품은 상태로 전환되려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닌다는 표현처럼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식에서 떨어져 나가고 잊히면 곧바로 내 마음의 진로가 틀어집니다. 내 마음의 진로가 틀어진다는 것은 내 마음에 담고 있는 소유가 아말렉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마음의 진로가 틀어지면 몸의 진로도 틀어집니다. 이에 더해 내 마음에 담고 있는 소유의 진로도 틀어지게 됩니다. 내 인생의 진로가 총체적 난국에 빠지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겐 사람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말씀드렸듯이 겐 사람은 가나안으로 향하는 지형을 잘 알아서 이스라엘을 도왔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진로를 가지 않는 배우자나 자녀는 마음의 아말렉입니다. 그러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내가 가려는 천국을 같은 목표 지점으로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천국으로 가려는 자들은 나에게 겐 사람과 같습니다. 내가 잠깐 한눈을 팔았더라도, 잠깐 진로를 이탈했더라도, 다시 돌아오게 하는 도우미들입니다.
우리가 말을 하고 말을 듣는 사귐과 교제는 겐 사람과 이루어져야 합니다. 천국이라는 예수님이 도달하신 보좌 우편을 목표 지점으로 가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끼리 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 한 방울 안 섞여도 이들이 교제의 대상입니다. 그러면 가족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날마다 걸어가는 것이 자기 인생길인 줄 모른다면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일지라도 마음에서 진멸해야 할 아말렉입니다. 내 마음에서 진멸하여 제로를 만들어버리면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한 지붕 아래에서 그들을 대면하여 말하고 행동하더라도 여기에는 사귐과 교제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 안으로 받아들임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내 마음의 진로인 아버지께로 가서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눈으로 보는 배우자나 자녀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화살처럼 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복음을 믿어라. 복음을 받아들여라.’라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진로 문제 때문에 걱정하는 자녀와 사귐을 가진다면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 세상의 진로 때문에 걱정하고 마음이 묶여 있는 자녀를 향해서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말하라 하시는지 듣고 전하면 됩니다. 내 마음의 진로를 방해하는 소유가 진멸된 상태에서의 내 몸은 하나님의 뜻을 쏘는 화살이 됩니다. 사귐이란 하늘나라를 향해 같은 목표를 갖고 걸어가는 자들과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나의 진로를 돕는 자들입니다. 내가 흔들릴 때 그들이 진로를 바로잡고 가면 따라가면 되고, 내가 바로 갈 때 상대방이 흔들리면 나를 따라오면 됩니다. 진짜 사귐은 오직 겐 사람끼리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날마다 걸어가는 것이 인생의 첫 번째 과업임을 아는 자들끼리 사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너희 인생의 진로를 방해하는 아말렉을 진멸하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음이란 나를 부인하고 날마다 나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소유하고 있는 상태가 용납되지 않아서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이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아무쪼록 여러분을 위해 정해진 마음의 진로를 방해받지 않고 걸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몸의 진로와 소유의 진로도 온전한 길로 끊임없이, 중단없이, 방해받음 없이 진전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의 십자가가 진정한 보물입니다. 나의 아버지께로 가는 진로를 막는 모든 아말렉을 십자가에서 다 진멸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내 마음의 진로도, 내 몸의 진로도, 내 소유의 진로도 온전히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만 진행되는 삶이 여생 동안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할렐루야!
할렐루야!]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아버지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합니
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안에 살고있음을
다시금 확인받는 복된 진로에 있음을
알게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영원한 하나님사랑 찬양합니다
천국에서 만나 안겨보고싶어요
나의 구주 예수님
나를 향해 열어주신 사랑충만 그 가슴에
주의 기쁨으로 덮어주신 귀한은혜 감사하며
예수이름으로 감사기도합니다
하나님! 사랑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