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창 오세창(1864-1953)과
안중식에게 배웠다.
오세창은 역관인 오경석의 아들로 태어나서 일찍부터 외국 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이로서 개화사상에 물들었다. 김옥균의 배후 인물이라는 유대교와 친하게 지냈다. 1894년에 일본 세력을 업고 개화정책을 추진한 김홍집 내각에서 벼슬을 하였다. 이후에 신문사, 손병희와 관계 맺고 천도교에서 활동하다 3.1 운동에 33인 대표로 참여하였다. 출옥 후에 서화활동을 하였다.
1902년에 고희동이 22세 년상이 오세창을 찾아가서 만났다고 하였다.
그는 서예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특히 전서와 예서를 잘 하였다. 전각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근대 전각사를 이야기할 때 오세창부터 말하는 것을 흔히 보았다.
대한제국 말년에 장지연은 자강론을 주창하면서 공예의 진흥을 주장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예를 하는 사람을 천인 취급을 함으로 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하였다.
오세창은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공예진흥운동을 펼쳤다. 이때의 공예는 장식 미술을 말하는 것으로서 회화도 공예의 한 부분으로 보았다. 안중식도 제자 이도영과 함께 자강화에 참여하였으므로 오세창의 영향을 받았다.
1918년에는 서화협회를 결성할 때 13인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33인 대표 중의 한 명이다.
오세창은 서예가로서 전서, 예서 초서를 잘 썼다. 둥그스럼한 독특한 형태의 글씨체로 위창체, 오세창체라고 부른다.
1928년에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모아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다. 우리나라 미술사상 가장 훌륭한 업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오세창은 미술가보다는 미술사학자로 이름을 날리게 한 명작이다.
광복 이후에는 미술운동의 중심에서는 비껴 나 있었다.
해방 이후에는 서화 활동보다는 정치 활동을 더 열심히 하였다. 육, 이오 동란 때는 대구로 피난하여 1953년 12월에 대구시 대봉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