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수와 정성이 깃든 이발소가 있었다
오후 늦은 시간에 가벼운 차림으로 대문을 나섰다. 싸늘한 날씨지만 추리닝에 샌들을 끈 가벼운 복장이다. 가까운 산복도로에 있는 이발소에 가기 위해서다. 두 사람이 겨우 어깨를 비켜 갈 수 있는 구부러진 골목 끝에 굴다리가 있고, 그곳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산복도로다. 길모퉁이마다 높이 걸린 외등 때문에 밤이 되어도 환해서 걷기 좋은 골목이다. 이 밝은 외등이 출산율을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추측해 보며 밤이 되면 외출을 삼갔던 옛 시절을 떠올려 보는 낭만이 숨어 있는 골목이기도 하다.
이발소는 처음 철물점 옆 작은 골목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큰돈을 모아 큰길로 나갔는지 갑자기 그 집이 없어졌다. 그래서 다시 찾은 이발소가 산복도로 지금의 이발소다. 처음 이발소에 들어섰을 때 포마드 냄새가 역겹게 코를 자극했고 텔레비전이 천장에 매달려 혼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신문은 의자 위로 흩어져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 집에서 이발을 한 지 20년이 넘었다. 이발소는 주인 부부가 한 팀을 이뤄 직접 운영했다. 바깥 주인은 삭발을 하고 안주인은 머리를 감겨 주었다. 너무 많은 정성을 쏟아 성심껏 이발을 해주기에 어떤 때는 그 친절이 미안하고 거북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싫지는 않았다.
청년 시절 함께 예비군 훈련을 받았고
이제는 손자 태운 유모차 끌며 만나는 이웃,
어두울수록 서로 살펴주는 불빛이 되리라 우리 동네 이발소는 순수하다. 그때 이발소도 '19금(禁)' 이발소가 있었다. 시내 중심가 이용원은 퇴폐 이발소가 유행할 때였다. 의자와 의자 사이에 두터운 커튼이 쳐지거나 아니면 칸막이가 된 밀실이 있는 그런 곳이었다. 면도사 아가씨를 고용하여 면도와 안마 외에 그 이상의 서비스를 해 주는 변칙운영이 사회적 물의를 자주 일으키는 때였지만 우리 동네 이발소는 그런 곳과 거리가 멀었다. 청소년들이 많이 이용하기에 19금이 아닌 건전한 이발소다. 풍경화 액자가 거울 위에 붙어 있고, 단지 야한 달력이 걸려 있을 뿐.
동네 이발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젊은이들보다는 노인네들이 더 많았다. 젊은이라 해봤자 주로 초등학교 아이들이나 중고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미장원에 다 빼앗기고 그 마저도 없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손님이 많아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길었다. 그래도 다른 이발소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사람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손님이 많아도 이발 과정을 대충 하는 일이 없이 꼼꼼하게 처리하는 약간 마른 체격의 주인은 말수가 적은 분이었다. "앉으세요"나 "어떻게 깎아 드릴까요?" 같은 물음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이발사는 손짓이나 눈짓으로 대신했고, 예전에 깎았던 흔적을 지금 긴 머리 형태에서 찾아내고는 한 달간 자란 만큼의 머리카락을 잘라내어 모양새를 완성했다. 그러니 무슨 말이 거기에서 더 필요할까. 손님도 말이 없고 주인도 말이 없다. 단지 기다리는 손님들끼리 주고받는 안부나 집안 일에 대한 잡스런 대화만 있을 뿐이다. 가끔 팔푼이 노인들이 앉아 서울로 간 자식 자랑에 열을 올리는 일이 따뜻한 풍경이 되곤 한다. 그런 이야기는 몇 번씩 들어도 싫지가 않은 우리 동네 자랑거리다.
가게와 붙어 있는 이발소 살림집을 곁눈으로 흘끔거리곤 했다. 휴일에는 오전 늦도록 치우지 못한 아침 밥상이 놓여있고 두 아이가 늦잠을 자고 일어나 스스로 밥을 챙겨 먹는 모습들이 살갑게 엿보였다.
그런데 그 이발소도 어느 날 문을 닫았다. IMF 나던 해였을 것이다. 가벼운 차림으로 이발소 앞에 가니 돌고 있어야 할 이발소의 상징이 멈춰 서 있는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어디 가서 무엇 해먹으며 살고 있을까. 그 당시 초등학생과 중학생이었던 아이들은 무사히 학교를 마쳤을까. 그런 걱정을 하며 몇 년이 지난 뒤에 그 이발소가 다시 문을 열었다. 주인이 바뀌었다.
· 일상과 일상이 만나는 따스한 산복도로 풍경
우리 동네 풍경은 그렇다. 제일 높은 굴뚝을 간직한 목욕탕이 있고, 그 앞에 철물점이 있고, 옆에 약국이 있고 약간 오르막 지는 곳에 이발소가 있고, 그 맞은편에 연탄가게가 있고 그 아래쪽에 미장원이 있다. 삼거리에는 뒤늦게 빵집이 생겨 호황을 누렸다. 슈퍼마켓이라 부르는 조그만 구멍가게도 있다. 이 가게들은 물건을 서로 팔아 주며 상생한다. 거대 기업형 마트가 자리 잡을 만한 공간이 없기에 이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산복도로 주변 유일의 재래시장이 장사가 안 되는 관계로 10년 전에 문을 닫았다. 재래시장이래야 채소가게와 잡화점, 그리고 어물전, 육고기집이 있을 뿐이었는데 고만고만한 슈퍼마켓들이 여기저기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다가 그마저도 장사가 잘 안되어 문을 닫았다. 산복도로 사람들은 아랫 동네 초량시장까지 내려가 장을 봐야 했다.
이발소 옆에는 옷 수선집이 하나 있다. 나는 그 집 여주인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 주인은 내가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 집 앞을 지나쳐야 출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동태를 살펴놓았다가 집사람에게 가끔 일러 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몇 번을 돌아 내게 들려오는 소식이 그것을 감추지 못한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발소 앞 길 건너에는 연탄가게가 있다. 내 대학 시절부터 부부가 함께 배달을 하였다. 주인은 한쪽 발을 약간 절었고 부인은 살이 많이 찐 편이었다. 내외가 노인이 된 뒤에도 연탄배달을 함께하고 있어 아름답게 보였는데 지금은 가게가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아구찜 전문 식당이 문을 열고 성업 중이다.
아내와 함께 멀리 외출한 어느 휴일 오후, 갑자기 차창에 빗방울이 튕기기 시작했다. 아내는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선희 엄마, 우리 집 옥상에 가서 빨래 좀 걷어 주라! 여긴 빗방울이 드는데… 거긴 아직 비 안 와?"
선희 엄마는 옆집 아주머니다. 평소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이웃이다. 이렇게 갑자기 비가 오는 날에는 서로의 급박한 편리를 봐 주기도 한다. 널어놓은 빨래가 비 맞을 걱정 없이 휴일 오후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외출하지 않고 있었던 선희 엄마 덕이었다.
그들은 세탁기에서 시작된 불이 집 안을 삼킬 때에도 제일 먼저 달려 와 불을 끈 고마운 이웃들이고, 소방차가 물을 뿌리기 전에 불을 다 끄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이다. 그들이 있어 안심이 되고 행복해 질 수 있는 삶이 우리 동네에 있다.
일요일 저녁, 외식을 하자는 아들의 말에 이렇게 말했다. "어디 멀리 갈 것 있나 우리 동네에 아구찜 잘하는 집이 있는데 거기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자." 그렇게 하여 다시 추리닝 바지에 점퍼 하나를 걸치고 샌달을 질 질 질 끌고서 옛 연탄집에 들어선 아구찜 집에 들렀다.
주인은 새마을 청년회 멤버로서 동네 궂은일에 솔선수범을 보였던 아저씨였다. 어느 날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천우신조로 생명을 건진 운 좋은 사나이였다. 그의 딸이 또한 학교에서 내게 배우기도 한 학부형이기도 했다.
나는 동네 가게를 자주 이용한다. 가급적이면 우리 동네 가게에서 팔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오래 전부터 들었다. 조금 비싸고 또한 물건이 시원찮아도 이웃이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월급쟁이인 내게 그들이 무엇을 도와 줄 수 있을까만 내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이 또한 이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는 상부상조하는 의미가 아닐까. 외출 중에 급한 택배가 왔을 때도 그곳들에 맡겼다가 뒤에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은 꺼지지 않아
오래 전 이야기지만 아파트 청약이 유행처럼 번질 때 우리 동네 동장은 내가 인감증명서만 떼면 놀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강 선생님, 어디 이사 가시려고요…?"
그 분은 내가 이 동네를 떠나 이사 가는 것을 극구 말렸던 분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나보다 먼저 이 동네를 떠나버렸다. 내가 이사 가는 것을 왜 말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동네를 위해 한 번도 봉사활동을 하지 않은 나를 잡아 두는 것은 이상해 보였다. 그의 만류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40여 년을 한 곳에 못 박혀 살고 있다. 누가 물으면 "나는 말뚝"이라고 말해 주곤 한다. 수줍움을 많이 타는 나는 동네 사람들 면면을 잘 알지 못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나를 잘 알았다. 그 분들 중에는 나보다 더 오래 머문 분들도 계시지만 나보다 뒤에 이사 온 분들도 많았다.
동네에서 우리 집은 랜드 마크 역할을 한다. 연탄 배달이나, 가스 배달, 자장면이나 통닭 등 배달 일에 위치 잡는 기준을 삼기 때문이다. 또한 우편물이 많은 우리 집은 우편집배원에게도 문제의 집으로 점 찍혀 있다. 주소가 틀려도 거의 잘 찾아오는 우편물은 집배원을 얼마나 많이 괴롭혔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결과였다.
이발소에서 함께 만났던 또래 아저씨들이 이제 다들 노인이 되었고, 가끔 손자들을 데리고 산복도로를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볼 때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청년시절에는 함께 예비군 훈련을 받았고, 이제는 저물녘에 손자를 태운 유모차를 끌며 만나는 이웃들이다. 그들과 산복도로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자주 마주치며 눈인사라도 나누었으면 좋겠다. 그런 모습은 유안진 시인이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 말한 우리 동네 풍경이 될 것이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젊었을 적에는 머리카락이 눈을 덮어도 갑갑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귀찮고 싫증을 쉽게 느끼는 요즘에는 이마를 조금만 가려도 거추장스럽고 갑갑해진다. 거울 속에 숨은 덥수룩한 모습이 어쩐지 서글퍼 보이기도 하고 초라해서 더 늙어 보이는 때문일까. 산뜻하게 머리를 자르고 나면 한결 젊어진 기분에 마음도 상쾌해지고, 멀리 내다 보이는 오륙도에 떠오르는 태양이 비추는 북항도 더없이 밝아 보인다.
▲ 이발소는 서로의 안부와 크고 작은 집안 소식이 오고 가는 만남의 장이다. 초량동 산복도로엔 그런 곳이 많다. 목욕탕, 약국, 연탄가게, 옷수선집…. 외출한 뒤 갑자기 비를 맞는 날, 자기 집에 널린 빨래를 걷어달라고 이웃에 부탁할 수도 있다. 옆집에 불이 나면 소방차가 채 오기도 전에 불을 다 끄고 아무렇지도 않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이 우리 이웃이다. 산복도로에선 환한 햇살이 가장 먼저 보인다. 사진=강영환
강영환 시인
◇약력=1951년 경남 산청 출생.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칼' '푸른 짝사랑에 들다' 등. 이주홍문학상, 부산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