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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태양은 잘 있어
-벌거벗은 태양(속편)-
김 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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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앞 넓은 광장에는 승용차가 몇 대 주차되어 있고 접견실 쪽에만 사람들이 듬성듬성 보일 뿐 음산하리만치 조용했다. 교도소란 어휘가 풍기는 뉘앙스 못지않게 우중충한 건물과 칙칙한 풍경들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계선이 교도소에 갇힌 반 년 동안 내 마음도 그녀와 함께 갇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끌어안을 수 없다는 건 고통이었다. 긴 그리움과의 싸움.
나는 틈만 나면 교도소에 와서 계선을 면회했다. 오늘은 접견실이 아니고 교도소 정문에서 가까운 주차장 부근이었다. 거기엔 사람들의 통행이 뜸했다. 계선이 교도소에서 나오면 눈에 잘 띄라고 일부러 한적한 곳에 서 있었다. 변호사로부터 계선이 오전에 출감할 거란 말을 듣고 아침부터 서성거렸지만 정오가 가까워지도록 계선은 나오지 않았다.
혹시 뭐가 잘못 됐나 하고 변호사사무실로 전화하니 몇 가지 절차를 거치다 보면 다소 출소 시간이 지연될 수도 있다는 변호사의 말이었다. 계선이 유태호를 살해하고 살인죄로 재판을 받는 동안 변호사는 계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변호사는 전승희 회장의 친구였다. 법조계에 이름이 알려진 베테랑 여자 변호사였다.
계선은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검찰의 항소로 고등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 했다. 고등법원에서는 지방법원의 판결보다 더 가볍게, 불법무기소지죄만 적용하여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검찰은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나는 계선의 증인이었다. 법은 우리들의 편을 들어 주었다. 이 사건은 유태호가 계선을 그의 첩으로 만들기 위해 나를 죽인 그 사건과 연결되었다. 계선은 유태호의 여자가 된 후에 호신용으로 불법 무기상을 통해 권총을 구입했다. 그때 그녀에게는 충분히 그럴 돈이 있었다. 계선의 목표는 복수였다.
“피고는 왜 불법으로 권총을 소지했습니까?”
“유태호 씨가 제 애인을 죽였단 걸 나중에야 알고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살아서 복수하고 싶었어요. 아무 힘도 없는 제가 권총을 산 게 잘못인가요? 누가 저를 도와 줍니까? 저는 살기 위해서 악마와 동침하고 그의 노리개가 되었던 거예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게 죄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법관의 질문에 계선은 용감하게 답변했다. 방청석에 있던 유태호의 가족과 부하들도 계선의 웅변에 기가 죽었다. 유태호의 범법행위가 하나 둘 드러나서 시간이 갈수록 그들에게 불리해졌다. 나중에는 부하들이 법정에 보이지 않고 유태호의 가족들만 남아 있었다. 나는 가냘프면서도 당당한 계선의 모습을 보고 계선이 나의 태양임을 재확인했다. 그녀의 무기는 사랑이었다. 태양 같은 사랑.
재판이 열릴 때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전승희 회장이 꼭 나를 데리고 참석했다. 유태호는 그녀의 남편을 죽인 원수였다. 계선이 통쾌하게 복수를 해 줘서 계선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전승희가 할 수 없는 일을 가냘프디 가냘픈 여자 계선이 대신 해 준 것이다.
전승희 회장은 계선이 살인죄로 재판 받는 걸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계선이 무죄로 풀려 나오도록 실력 있는 변호사를 사고 관계자들에게 로비도 벌이며 여러 모로 애를 썼다. 그 일은 곧 나의 일이었다. 전승희와 계선, 나, 세 사람의 운명과 관계되는 일이었다. 세 사람은 우연치 않게 운명적으로 만난 사람들이었다. 원수는 죽었지만 그 뒤처리는 전승희의 몫이었다. 그 일은 전승희만이 해 낼 수 있고 그녀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나는 그녀의 심복부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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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과 나는 그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했다. 회장은 나를 위해 적극 증언에 나섰다. 내가 증언 도중 유태호의 편인 검사의 공격을 받을 때, 내가 유태호에게 당한 신체적 고통을 회장이 직접 증언하기 위해서였다. 회장은 세운상가에서 죽어가는 나를 살려 준 은인이고 목격자였다. 나는 지금도 온전한 몸이 아니었다. 그 고통을 회장이 안다. 회장의 증언 덕분에 계선을 위한 나의 증언은 더 힘을 받고 객관적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순표는 애인 하나 똑 떨어지게 잘 뒀더라. 정말 야무진 가시내야. 내가 계선이 입장이래도 그런 연기는 못할 것 같아. 언변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더라고. 그 애의 진솔한 태도에 법관들이 감동한 것 같아.”
회장은 계선의 용기에 탄복하면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란 당부를 거듭했다. 그러면서 약간 질투 섞인 농담도 했다.
“계선이의 어디가 그리 좋아? 같은 여자로서 내 눈엔 그렇게 빼어난 인물도 아니고 체격도 풀잎처럼 가냘프던데, 사내를 녹이는 특별한 재주가 있나 보지? 계선이 육체를 스쳐간 남자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런 생각 안해 봤어?”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왜 상관없어? 육체가 있고 정신이 있는 거야. 계선이는 밤거리의 꽃이야. 쓰레기더미에 핀 독버섯 같은 꽃이지. 그렇다고 그 애를 무시하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마.”
“계선이는 비쌀 것도 없는 술집 여자지만 개 퍼주듯 정조를 퍼주는 여자는 아닙니다.”
“누가 알아? 밑구멍으로 호박씨 까는지? 순표가 그 여자 뒷구멍을 조사해 봤어?”
“조사할 것도 없습니다. 개 퍼주듯 퍼주건 말건 마음만 변치 않으면 됩니다. 저는 그 여자를 믿습니다.”
“알 수 없는 남자군. 알 수 없는 남자야. 여름밤 개똥불 같은 불빛을 태양이라고 우기니……”
“끝까지 사랑으로 지켜 주라고 하시더니 왜 이제 와서 다른 말씀을 하십니까?”
“하도 자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니 질투가 나서 그러지 뭐.”
2심 판결이 있던 날 회장과 나는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허물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상사와 부하로서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지만 단둘이 있을 땐 회장이 속깊은 농담도 곧잘 했다. 열 달 동안 계선을 위해 함께 법정 투쟁을 하면서 회장과 나는 부쩍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투쟁이었다. 회장은 나를 위해, 나는 계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돈도 꽤 들었다. 회장은 변호사비, 교섭비로 아낌없이 돈을 썼다.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나는 회장의 온정에 감사드리고 그녀를 위해셔라면 무엇이든지 다 하려고 한다. 회장에 대한 충성은 곧 나라에 대한 충성이기도 하다. 회장은 그것이 남편의 복수를 하는 일이라서 그런다고 하지만 나에 대한 특별한 배려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순표에 대한 배려. 그것은 사랑의 마음이 아닐까? 그런 시간은 그리 많지 않지만 어쩌다 단둘이 될 때 섹시한 농담을 즐겨 하는 걸 보면 나를 좀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도 회장을 좋아한다. 전승희 회장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전혀 나이 차이를 느낄 수 없다. 군살 없이 다부지게 생긴 매력적인 용모가 나를 사로잡는다. 계선이와 닮은 그 따뜻한 목소리, 몸짓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하늘같은 회장님께 이런 표현은 적절치 않지만.
그 자그만 몸으로 사내들 서너 명을 단숨에 묵사발을 만든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었다. 부드러울 때는 속까지 다 빼 줄 듯 좋지만 독이 나면 또 다른 면모를 보이는 가면 쓴 여자. 그 여자의 속을 속속들이 탐험해 보고픈 욕망이 불끈 솟구칠 때가 있다. 회장이 남자에 굶주린 듯 외로워 보일 때. 공연히 함초롬히 젖은 눈망울로 나를 쳐다볼 때.
(불량한 자식.)
나는 여자 회장에게 끌리는 내 마음을 호되게 꾸짖으며 계선에게로 마음을 돌린다. 회장이 한창 물오른 과일이라면 계선은 아직 꽃송이다. 과일은 만질 수 없는 그림이고 꽃은 나의 꽃. 그러나 꽃이 그림보다 더 멀게 느껴질 때는 그림보다 더 못한 존재이기도 했다. 계선과 나의 사이를 가로막던 교도소의 높은 담벽. 이제는 무슨 담벽이 또 너와 나를 가로막을 것인가? 운명의 신이 더 이상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 말았으면.
가끔은 전승희를 계선으로 착각하면서 그녀의 뜻하지 않은 방문에 놀라곤 한다. 이것저것 먹을 것도 사다 주고 옷도 사다 주고 다른 선물도 준다. 퇴근할 때 잠깐 들렀다고 하면서 내게 보여준 그 마음이 계선에 대한 죄책감으로 돌아올 때는 나 자신의 변심을 쥐어뜯고 싶었다. 회장은 나에게만 특별히 선심 쓰지는 않았다. 모든 부하들을 사랑한다. 그런데 내게는 그녀의 조그만 행동이 특별한 감정으로 비쳐질 때가 있다. 나는 그 사고방식이 두렵다. 내게는 계선이가 있는데.
회장은 바쁜 몸이었지만 내 일에는 조그만 것까지 신경을 써 주었다. 회장이 요즘 와서 내 일에 시시콜콜 참견하고 잔소리하는 걸 나는 그녀의 따뜻한 성격 탓으로 여겼다. 회장은 부하들을 사랑하고 부하들의 사생활에도 신경을 써 주는, 보스 같지 않은 보스였다.
부하들이 돈이 필요하면 몇억원쯤 선뜻 빌려주고, 가족 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만사 제쳐놓고 찾아가서 위로했다. 그래서 공적인 일보다 사적인 일에 더 바빠 보인다. 사업이 나날이 번창하고 적대관계에 있던 기업들이 전승희에게 고개를 숙이게 되었을 때 이런 사건이 터졌다. 계선이 집행유예로 풀려 나오게 되어 회장은 한시름 놓게 되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회장은 내 애인인 계선의 재판 때문에 많은 신경을 쓴 게 사실이었다.
전승희 회장 덕분에 계선과 나는 다시 자유의 하늘 아래서 사랑을 불태울 수 있게 되었다. 그 생각을 하면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나는 계선의 품으로 달려가는 꿈을 꾼다. 그녀의 향기로운 꽃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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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을 좋아하고 인형처럼 착하게 살고 싶은 그녀였다. 돈 벌어서 인형공장 사장 되는 게 꿈이었다. 세상의 아름다운 인형을 다 수집해서 연구하고 더 아름다운 인형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나는 계선의 이상을 존중한다.
그녀의 꿈은 나의 꿈. 이별의 시간이 너무 길어서 꿈과 현실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지만 내가 계선을 사랑한다는 그 진리만은 변함없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아껴 줘야겠다.
“교도소에서 나오면 우리 살림 차리자. 우리 어른이 멋진 아파트를 내게 선사했거든. 물론 내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살림하기엔 더없이 좋은 공간이야. 한강이 보이고 세운상가에서도 가까워. 필요한 가전제품은 세운상가에 가서 사면 되지. 우리의 첫정이 맺어졌던 세운상가에서.”
“그럼 내가 사는 아파트는 어쩌지? 그것도 내가 알기론 꽤 비싼 아파트인데.”
“더러운 유태호 돈으로 사 준 아파트, 수십억짜리면 뭘 하니? 그건 우리 것이 될 수 없다. 유태호 졸개놈들이 너 가지라고 놔두지도 않을 거야.”
“그 아파트에서 순표 씨와 살림하는 게 소원이었어요. 모든 게 고급스러워서 궁전 같아요. 유태호의 유령이 나올까 봐 걱정되지만 그 아파트는 내꺼니까 아무도 손 못 대요.”
“야, 인형은 재물을 탐내지 않는 거야. 부질없는 욕망 끄고 밥이나 잘 먹어라. 정력을 충전해 두란 말이야. 너 나오면 파티 벌이려고 별것을 다 사 놨다. 야회복을 제일 비싼 걸로 사 놨어. 단둘이 밤새 무도회를 하려고 말이야. 오디오는 일제, 술은 러시아산 보드카. 우리 회장이 사 주셨어. 음식은 우리 손으로 만들자. 요리엔 일가견이 있는 나야.”
“그런 준비를 다 해 뒀어? 자기 그렇게 세심한 남자였나? 난 여자 고쟁이 속만 더듬는 숙맥인 줄 알았어.”
“너무 기대하진 마라. 너와 나 단둘이 하는 파티니까, 말이 파티지.”
“교도관 아저씨가 웃고 있어요. 어서 내일이 기다려진다. 열 달이 한 백년같이 길었어.”
우리는 철창을 사이에 두고 키스했다. 철창이 키스를 방해했다.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육체를 만질 수도 없었다. 교도관이 지켜보고 있어서 뜨거운 정을 주고받지 못한 채 각자의 방향으로 가야 했다. 헤어지는 순간이 제일 슬펐다. 이제 그 슬픔도 끝이다. 달콤한 파티가 기다리고 있다.
교도소의 작은 철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뒤따라 또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뒤에 나온 분홍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계선이었다. “계선아!”하고 아이처럼 부르며 달려갈 순간 나는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세 명의 사내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계선을 에워싸고 그녀를 승용차로 끌고 갔다. 계선이 나를 보고 소리쳤다.
“순표 씨!”
한 사내가 계선의 입을 막았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을 때 네 사람을 태운 승용차는 바람같이 교도소 광장에서 떠났다. 나는 영추 형의 승용차를 타고 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아니 회장 차를 타고 가라는 회장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내게는 차가 없었다. 월급 타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 보내주므로 차를 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돈이 있다 한들 나 같은 놈이 자가용차를 굴릴 자격이나 있겠는가? 주제넘은 짓이다. 내게 차가 있었더라면 그자들을 놓치지 않았을 게다.
햇빛이 내려쬐는 넓은 광장을 터벅터벅 걸어오면서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그 사내들은 내가 아는 놈들이었다. 유태호의 부하들이 보복하려고 계선을 끌고간 모양인데 그녀를 죽이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나의 옛동료들이었다. 한때 동고동락했던 치들이다. 그들과 나는 법정에서 만나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때 한 친구가 내게 귀뜸한 말이 있었다. 부두목 소익희가 왕초로 승격해서 사장노릇을 한다는 것이었다.
“사장님이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알다시피 그분은 거래를 분명히 하는 사람이지. 계선이가 석방되더라도 그 여자와 계산할 것이 있으니 그리 알아라.”
“나는 그때 이미 죽었다. 죽은 듯 살 테니까 계선이를 괴롭히지 말아 다오.”
“살고 죽는 게 네 뜻대로 될까? 친구 의리로 알려주는 거야.”
“계선이에게 무슨 계산이 있다는 거냐?”
“그건 나중에 알 거야.”
“사장에게 말해라. 계선이에게 털끝 하나 건들면 죽여 버린다고. 난 한 번 죽지 두 번 죽진 않아. 악밖에 안 남은 놈이야. 날 화나게 하지 마.”
“나한테 성질낼 것 없다. 친구니까 귀뜸해 준 걸 고맙게 생각해야지.”
그때는 그 말을 예사롭게 흘려들었다. 계선의 빚 문제인 줄 알았다. 두목과 부두목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이익금 분배 관계로 의가 상한 뒤 서로 네 떡 너 먹는 식이었다. 유태호가 여자를 밝히는 색마라면 소익희는 돈에 환장한 수전노였다. 그점만 다르고 잔인하긴 장군멍군이었다.
익희가 왕초가 됐으니 예전 두목이 일궈 놓은 사이비 기업체들을 자기 소유로 하려고 혈안이 될 게 틀림없다. 법정에서 그의 졸개들을 만났을 때 벌써 그런 기미가 느껴졌다. 소익희가 부하들을 법정에 보낸 이유는 의리상 유태호의 유족들을 위로해 주는 척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핸드폰으로 계선에게 전화했다. 계선이 전화를 받지 않고 사내가 받았다. 익희의 부하였고 나의 옛동료였다.
“계선이를 괴롭히지 마라. 교도소에서 몸 고생, 마음 고생하고 이제 막 출소한 애다. 가엾지도 않니? 계선이에게 무슨 죄가 있어?”
“죄가 있지. 그 계집 때문에 유능한 왕초를 잃었고 우리는 지금 사분오열 직전에 있다. 구심점이 사라졌어. 서로 왕초가 되려고 기득권 싸움이 벌어져서 난리다. 차기 대권주자가 한둘이어야지. 새끼 왕초들 말이다. 이럴 때 네 힘이 아쉽다. 네 주먹 실력은 우리들이 인정한다. 네가 우리 패에 가담하겠다면 익희 형한테 잘 말해 주지.”
“배신을 밥 먹듯 하는 그 소굴로 다시 돌아가라고?”
“소익희는 달라 임마.”
“딴데 가서 알아봐, 이 새끼야! 난 한 번 죽지 두 번 안 죽는다고 했잖아? 법은 눈 뜬 장님이라더냐? 계선이를 괴롭히면 한 놈 한 놈 다 씹어먹겠다!”
나는 핸드폰에 대고 악을 썼다. 상대방은 전화를 탁 끊었다. 그들은 내 주먹실력을 알고 두려움을 느낄 게다. 모아 놓으면 조폭이지만 한 놈 한 놈 떼어 놓으면 오합지졸에 불과한 놈들이다. 나는 복수하는 방법을 안다. 한 놈씩 처치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들에게도 가정이 있고 처자식이 있으니까, 복수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그들 집의 싱크대가 무슨 색깔인지도 아는 놈이다. 계선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할 테다.
16
집에 돌아와서 몸을 씻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익희의 부하였다.
“사장에게 네가 한 말 그대로 전했다. 사장이 좋아하더라.”
“계선이는 어디 있냐?”
“씹할 놈, 계선이가 보물덩어리라도 되냐? 다 닳아빠진 계집, 왕비라도 되는 것처럼 떠받들면 밥이 나오냐? 지금 우리 사장님과 한창 재미보고 있다. 계집이 더 좋아서 미치는군.”
오냐, 약올릴 테면 올려라. 나는 계선을 믿는다. 놈은 지금 과장하고 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하고 평온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진정이 되겠는가?
“전화한 용건이 뭐냐?”
“사장이 널 한번 만나자고 하신다. 계선이 문제와는 별도야. 계선이와 계산이 끝나면 자네한테 보내준다고 하셨어.”
“계선이를 먼저 보내라.”
“네가 먼저 와, 이 새끼야. 아쉬운 놈은 너야. 와서 왕비를 만나야잖아?”
“나는 절대로 안 간다. 경찰에 납치당했다고 신고할 테다. 너희들의 조직을 박살낼 테다. 그렇잖아도 검찰이 소탕 준비를 하고 있어. 내가 입만 열면 줄줄이 교도소로 끌려갈 걸. 난 이판사판이야. 두 번 죽지 않으니까. 내 경고하는데 한 번만 그 더러운 주둥이로 계선이 인격을 모독하면 너의 가족들을 몰살하겠어. 이 더러운 새끼야!”
“죽었다 살아나더니 입만 살았구먼. 멍청한 들개놈!”
“사장한테 계선이 놔 주라고 전해. 정말로 신고할 테니까!”
하찮은 졸개와 입씨름하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스웠다. 나는 그가 어디에서 전화하는지 안다. 계선의 아파트겠지. 왕초가 날 회유하라고 시켰겠지. 계선이를 인질로 삼아 날 그들 조직으로 끌어들이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계선과 내가 살 길은 그들과 결별하는 것이다. 그들도 그걸 알고 있다. 내가 전승희 회장의 비서란 걸 모를 리 없다.
나는 계선이 돌아오리라고 믿는다. 익희가 계선을 납치한 이유가 있을 게다. 계선은 그 이유를 알고 슬기롭게 대처하겠지. 가슴이 타면서도 그녀를 믿는 이유는 그녀의 사랑을 믿기 때문이다. 그 큰 무기가 있는 한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기기 위해 맛없는 밥을 억지로 먹었다. 주방과 냉장고에 고기와 과일과 과자 등 먹을거리가 풍부하지만 나는 손도 대지 않았다. 박스와 봉지에 담긴 그대로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 술병과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화려한 야회복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새살림을 차릴 살림도구들이 계선을 기다린다. 모두 전승희 회장이 사서 보낸 것들이었다. 계선은 오늘밤 오지 않을 것 같다. 정말 익희의 품속에서 애교를 떨고 있을까? 계산이란 육체의 유희를 말하는가. 유태호가 갖고 놀았으니 소익희도 갖고 놀아야 직성이 풀리고 그게 새왕초의 의식이라면 실컷 갖고 놀아라. 내 꼭 복수할 테다. 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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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 안이 울리게 전축을 크게 켜 놓고 음악을 들으며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반찬은 신 깍두기 하나였다. 성능 좋은 일제 오디오에선 슬픈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 무식해서 곡목을 알 수 없었다. 아니 곡목이 생각난다. 나의 어머니. 나를 다시 유년시절로 돌아가라고 저리도 목메이게 외쳐대는군. 나는 울면서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씹었다. 이때 회장의 전화가 왔다.
“파티는 잘 돼 가? 내가 가서 좀 도와 주고 싶지만 불청객이 끼면 분위기 깰까 봐 전화만 했네. 야회복은 몸에 잘 맞아? 고기는 내가 아는 도축장에 가서 싱싱한 걸 직접 사 온 거야. 오랫동안 교도소에서 잘 먹지도 못했을 테니 실컷 먹으라고 해. 재료도 여러 가지 사 놨지. 자네가 요리를 좀 배웠다니까 아주 파티다운 파티가 되겠군. 자네도 고기 좀 먹어. 자네 몸이 말이 아니야. 그 음악 참 좋다. 신부의 가슴에 안겨 블루스를 추어 봐, 신나게. 탱고도 추고, 폴카도 추고, 춤이란 춤을 다 추는 거야. 춤출 줄 모르면 모른 대로 추면 돼. 순표, 우는 거야? 너무 좋아서 우는군.”
회장은 퇴근길에서 전화한다고 했다. 사방에 적들이 드글거리는데 겁도 없이, 비서 없이 자기가 직접 운전한다고 하며 숨가쁜 여류 기업가의 외로움을 토로했다. 집에 돌아가면 기다리는 건 고독이었다. 자식들이 있긴 하지만 나이 어려서 엄마의 고독을 모른다고. 농담처럼 허허 웃는 그 말 속에 슬픔이 일렁이고 있었다. 회장이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은 순표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그녀의 마음에 드는 그 이유 하나로. 그것은 내 추측이다.
나는 계선이 납치됐단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온 밤을 뜬눈으로 샜다. 계선이 어떻게 있는지 궁금했다. 익희의 품에 자고 있다면 차라리 마음이 놓이겠다. 육체는 계선에게 삶의 수단일 뿐이다.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해도 좋다. 그 삶의 목표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남녀가 살을 섞는 행위는 동물의 교미처럼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특별한 의미는 그녀와 나의 영혼 속에서 찾자. 그렇게 위안하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 같은 건 없었다. 계선을 믿기 때문일까. 그녀가 금방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내 아파트를 쉽게 찾을 게다.
이곳은 그녀와 나의 보금자리다. 그녀를 기쁘게 해 주려고 예쁘게 꾸미고 준비했는데 운명은 행복한 재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운명에 모든 걸 맡길 수밖에 없었다. 선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아침이었다.
밥도 먹지 않고 출근 준비를 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야 하니까 한 시간 전에 집을 나서야 한다. 아파트에서 나서는데 회장 차가 와서 길가에 대기하고 있었다. 회장이 혼자 운전하고 있었다. 정말 겁없는 회장이었다. 회장을 보면 꼭 계선을 보는 듯해서 혼돈될 때가 있었다. 계선이 납치됐단 말을 숨길 수가 없어서 말씀드렸더니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혼자 잤었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둘이 밤새 깨가 쏟아지는 줄 알았지. 아유, 이 멍청한 대가리야!”
회장은 주먹으로 머리를 툭툭 쳤다.
“걱정 마. 별일 없을 거야. 자네가 그들의 회사를 아니까 살인은 못할 거야. 목숨만 살면 돼. 여자는 목숨이 중요하지 몸뚱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강물에 배 지나간단 말 들었지? 여자는 그런 거야. 내가 그렇게 살아 왔거든. 강물도 배도 없고, 계선이와 사는 방법은 좀 틀리지만 내 인생도 상처투성이……그러나 어디 상처가 보여? 그런 나에 비교하라고.”
회장의 위로에 마음이 놓였다. 죽지만 않으면 개 같은 놈들에게 육체를 헌납해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맘대로 갖고 놀라고 해. 그 복수는 꼭 하자. 계선이가 내 복수를 해 줬으니까 이번엔 내가 갚을 차례군. 회장은 유유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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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계선의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일 주일이 지나도 계선에게선 아무 소식도 없었다. 나는 초조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영추 형과 함께 비서실에서 빈둥거리기도 지겨웠다. 회장이 출타할 때 경호하고 그녀가 있는 곳에서 그림자처럼 보필하는 일이 비서의 임무였다. 회장실에 낯선 외부인이 출입 못하게 막는 것도 내 임무였다.
회장이 회장실에서 업무를 볼 때는 비서들은 신문을 보거나 잡담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잡지책으로 무료를 달랬다. 패션잡지에 계선을 닮은 여자가 보이면 눈물이 났다. 계선에 대한 그리움이 뼈속 깊이 사무쳤다. 계선의 향기나는 육체가 눈앞에 어른거려 미칠 것 같았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나의 여신. 나의 태양이다. 날 미친놈이라고 비웃어도 좋다.
근무 시간에 텔레비전은 금물이었다. 텔레비전은 비서실 옆에 있는 간이휴게실에 있었다. 거기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영추 형은 골초니까 담배나 죽이고 나는 커피를 죽였다. 간이휴게실은 답답해서 비서들이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도 신문이나 잡지책을 보기엔 그곳이 적격이었다. 그곳은 계선과 내가 마음으로 대화하는 장소였다.
회장이 바람 쐬러 나왔다가 간이휴게실로 들어왔다. 회장은 내 얼굴이 수척해졌다며 건강을 걱정했다. 세심한 회장님. 회장은 부하들을 시켜 내가 걱정하는 계선의 근황을 알아봤다고 했다. 계선이 건강히 잘 있다는 말에 나는 마음이 놓였다. 계선이 소익희 사장과 함께 백화점에셔 즐겁게 쇼핑하더란 말을 듣고 나는 비위가 뒤틀렸다. 거짓말을 할 회장이 아니었다. 처음엔 대단치 않게 흘려들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분노가 끓어올랐다. 계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계선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녀 마음만 변치 않는다면 때묻은 육체, 소익희의 소유가 되든 그 졸개들의 공동 장난감이 되든 상관하지 않으련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 한복판을 칼로 에어내듯 쓰린가? 우리 같은 뒷골목 인생에게 정조 따위가 필요한가? 그런 걸 논할 자격이 내게 있는가? 내가 얼마나 계선이를 행복하게 해 줬다고?
계선이를 지켜 주지 못하는 나 자신이 가증스럽다. 육체의 쾌락을 순정으로 포장하며 계선의 애인이라고 큰소리치는 나. 나는 뭔가? 나는 과연 계선의 남자인가? 계선의 태양인가 말이다. 울고 싶다. 계선아, 난 어쩌면 좋으냐? 이렇게 무능한 내가 어떻게 떳떳이 네 앞에 설 수 있단 말이냐. 나 자신에 대한 증오감은 괜히 죄없는 계선에 대한 미움으로 변했다. 나의 책임을 가엾은 계선에게 전가시켰다.
“여자는 어쩔 수 없는 거야. 남자가 지켜 주지 못하면 여자는 갈대처럼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게 돼 있어. 난 안 흔들린 줄 아나? 겉으로만 안 흔들린 것처럼 보일 뿐이야. 갈대만이 갈대의 속을 잘 알아. 계선이를 너무 욕하지 말게. 가엾은 아이니까.”
회장의 위로가 어쩐지 계선을 단념하란 조롱으로 들렸다. 회장이 나에게 마음 써 줘서 고마웠다. 계선이는 잘 있구나. 일이 그녀 뜻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전화를 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지 않을 리도 없지.
계선의 핸드폰은 꺼져 있다. 그것은 일이 그녀 마음같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소익희가 계선을 왕비처럼 모실 리가 없다. 제놈 멋대로 게선을 농락하겠지. 힘없는 계선이 무슨 수로 정조를 지킬 것인가? 정조란 값싼 것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정조를 따지는 내가 우습다. 계선은 그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계선에게 나는 스쳐가는 한 남자일 뿐이다. 소익희보다 소중할 것도 잘날 것도 없는 존재. 그 생각을 하면 전신의 힘이 빠진다. 계선을 만나서 묻고 싶다. 나는 도대체 뭐냐고? 못난 놈. 지지리 못난 놈. 바보 같은 놈.
퇴근 시간에 계선한테서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나는 반가우면서도 그 목소리가 낯선 여자의 목소리처럼 멀게 느껴졌다. 계선은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 여자였다. 지금도 그녀는 흔들림 없는 그 목소리였다.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첫마디가 보고 싶다는 인사였다. 그 말도 이젠 아름답게 들리지 않았다. 영화의 대사를 흉내낸 것 같다.
“거기 어디냐?”
“세운상가.”
“거긴 뭣하러……거긴 혼자 가지 말랬지.”
“아직 대낮이야. 불량배는 없어. 혼자 쇼핑 나왔다가 순표 씨 생각이 났어. 그래서 이 길을 걸어 봤지. 사실은 하루 한시도 순표 씨를 잊은 적이 없지만 내 말을 믿지 않을 거야. 나 솔직히 소익희와 함께 있었어. 뻔뻔하지?”
“지금 그리 가겠다.”
“와서 때려 줘 응? 피가 나게 때려 주란 말이야. 자기한테 맞아 죽을 테야.”
계선은 훌쩍훌쩍 울었다. 전에는 그렇게 울지 않았었다. 독하고 대범했었다. 상스런 농담도 잘하고. 나는 그런 계선이가 좋았던 것이다.
“내가 너를 때릴 자격이나 있냐? 내가 맞아야지. 내가 병신이다. 그날 그 새끼들을 쫓아갔어야 했어.”
“이런 말 염치없지만, 정말 부끄럽지만 순표 씨 한 사람만 사랑했어.”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니? 만나서 얘기하자.”
“만나는 게 두려워서 그래. 내 꼴을 상상해 봐. 계단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서 전화하고 있어. 다 늙어빠진 할망구처럼, 내 꼴이 우스워. 늙은 매춘부처럼. 나 같은 여자도 없을 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잠은 딴 남자와 자고……”
“만나서 얘기하자!”
나는 전화를 끊고 택시를 타고 세운상가로 달렸다. 정말 계선은 사람 통행이 적은 상가 계단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먼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도 하늘만 보고 있었다. 내가 그 옆에 앉아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자 멋쩍게 웃었다. 그녀의 몸 어디에도 더렵혀진 흔적은 없었다. 티없는 살결이었다. 그리고 언제 봐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나만의 왕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