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촌대감집
‘육사기념조형물’과 비석을 보고 나와 몇 발걸음 옮기니 고가 서너 채가 보인다. ‘목재고택’, ‘사은구장’, ‘원대종택’, ‘칠곡댁’ 등의 당호를 갖고 있다. 원대와 발신한 후손들의 집이다.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무너져 내리고 있다. 벌써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수를 해야 할 집들이나 그게 그렇게 안 되는 모양이다. 집터를 수자원공사가 소유하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라 한다. 댐 건설 당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둔 집들인데 나라에서도 무너질 때까지 방치해버릴 모양이다. 안동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있었다면 그 흔한 성역화라도 할 집들이 아닌지 모르겠다.
들 집에서 몇 발자국 옮겨 모퉁이를 돌면, 길 아래는 스레트를 덮은 아주 초라한 집이 있다. 집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누가 알랴, 이 집이 유명한 원촌대감의 집이었음을! 대감은 육사가 태어나기 전 원촌의 존재를 떨친 분이다.
대감 휘는 효순(洛北 李孝淳1789-1878)이다.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판서’는 호칭이 ‘대감大監’이다. ‘참판’은 ‘영감令監’이다. 판서, 참판은 당상관 정2품, 종2품의 차이지만 호칭과 대우는 엄청나게 다르다. 지금 장관과 차관의 차이가 그러한지 모르겠다. 당하관 호칭은 ‘나리’이다. 당상관, 당하관은 정3품의 상위품계인 통정대부通政大夫, 하위품계인 통훈대부通訓大夫에서 갈려진다. ‘당상堂上’, ‘당하堂下’의 글자 뜻처럼, 임금의 국정 마루로 오르고 못 오르고의 차이와 같다. 하위직급에는 종6품, 정7품에서 참상관參上官, 참하관參下官로 구분되는데, 이것 역시 하나의 큰 관문이었다. 대우에서 차별이 많았음은 물론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감’이 뭐 그리 대단한 존재이랴! 조선조에 수백 명의 잊혀진 대감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당시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조선 후기 노론 집권 수백 년
동안 영남남인에 대감이 된 사람은 그야말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필자가 과문해서 확실한지 모르나, 알려진 ‘대감’으로는 원촌대감을 비롯하여 하회의 류상조(柳相祚1763-1838, 병조판서), 의성의 이희발(李羲發1768-1849, 형조판서), 성주의 이원조(李源祚1792-1871, 공조판서),
상주의 유후조(柳厚祚1798-1876, 공조판서, 좌의정)등. 노론들의 배려였고,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다. 노론 수백 명이 대감이 되었을 때 남인은 이들 너 댓 사람이 전부였다. 그것도 실세라 할 수
있는 이조판서는 아예 없다. 대감은 이들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대감’은 남인이 올라갈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대감댁은 가난의 애달픈 역사로 더욱 유명(?)하다. 대감이 급제하기 전, 과거시험을 위해
시집간 누이에게 여비를 빌리려고 갔다. 누이는 엄청난 굴욕을 감수하고 시어머니에게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 “동생이 급제해서 고을을 살게 되면 갚겠다”고 했다. 이에 시어머니는 ‘밭골을 빌려줄까 논골을 빌려줄까’ 했다. 거절과 핀잔이 함축된 답변이었다. 이런 수모를 넘어서 동생은 과거에 합격했고, 드디어 영해부사가 되어 고기를 소달구지로 싣고 왔다. 고기를 본 시어머니가 탐을
내자, 누이는 “이건 논 골 몫이고요 이건 밭 골 몫입니다”라고 하여, 지난날의 야속함을 풍자여
되갚았다고 한다.
가난은 대감댁뿐만이 아니었다. 원촌 전체가 그러했다. 아니 도산 일원 마을들의 공통되는 현상이었다. 가난은 사람을 낳았다. 가난은 생존을 위협했고 대안은 공부였다. 공부로 발신하는 일이었다. 안동의 공부열풍과 놀라운 학자배출은 이러한 환경조건도 그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나는 그
가난을 ‘아주 적절한 가난’으로 보고 있다. 지금 뜨고 있는 ‘안동간고등어’는 ‘아주 적절한 가난-안동’의 표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감집의 가난은 변하지 않았다. 대감이 돌아가시어 기일이
다가왔지만 제상에 올릴 제수가 없었다. 아들은 하는 수 없어 사돈댁으로 하인을 보냈으나 하인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를 보자 아들은 비관하여 강으로 가서 자결했다.
‘강으로 가서 자결했다’는 말은 전에 고로古老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얼마 전 원촌에 살고 계시는 대감의 후손 한 분을 예방했더니, 이 분 말씀이 ‘붉은 바위’에 가서 몸을 던졌다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대감의 손자 용산 이만인(龍山 李晩寅)은 당대의 학자로 대감댁의 영광을 이어갔다.
대감은 ‘신도비’를 세울 수 있다. 또 모두들 했다. 그러나 원천대감은 아직까지 신도비가 없다. 근년에 ‘유허비遺墟碑’를 겨우 세웠다. 집 뒤, 길가에 있는 비석에 올라가 비문을 읽어 보니, “세상 사람들이 ‘원촌대감’이라 일컬었다”라는- ‘세칭원촌대감世稱遠村大監’-이가원李家源 박사가 지은 문구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물굽이가 아름다운 천사곡
대감의 유허비를 보고 천천히 강가로 내려왔다. 옆으로 나오니 바로 강변이다. 육사가 - “마음이 허전하면 저절로 찾아갔고”, - “흘러 흘러서 그 물소리를 따라 어디론가 가고 싶다고(산문: ‘계절의 오행’)”한 그 강가에 오니 ‘붉은 바위’는 진흙 뻘 속에 몸의 대부분을 묻고 있다. 조금 위로 올라가니 상류 강기슭에 ‘범 바위’가 보인다. 전에 이 사이 바위들에는 공룡발자국이 있었다.
‘범 바위’의 ‘범 발자국’도 사실은 공룡발자국이라고 친구 동열이는 말했다. 사람들은 아득한 시절부터 그 크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그렇지만 지금 이 흔적들은 단천으로 가는 길이 확장될 때 묻혀버렸고, ‘범 바위’ 역시 옛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다. 접근하기도 쉽지 않다.
육사가 “낙동강이 무슨 죄이랴(산문: ‘계절의 오행’)”했고, “차마 이곳은 범하지 못하였으리라(시: ‘광야’)”했지만 그 소망은 무너졌다. 금년 태풍 ‘매미’는 그나마 남아있는 농토와 농작물들을
그야말로 쓸어버렸다. 문명은 수마水魔와 같은 것인가! 과거를 묻어서 자잘한 편린으로 흩어지게 하고 추억은 한갓 부질없는 기억으로만 존재하게 한다. 아아! 한숨이 나오는 강변에 서서 산천을 둘러보니 어느덧 강 건너 마을이 눈앞에 성큼 다가온다.
강 건너는 ‘천사’이다. ‘내살미’라 부른다. 원촌과는 강을 두고 갈려 있지만 천사는 항상 천사로 존재했다. 그 빛깔도 원촌과는 조금 다르다. 원촌은 퇴계 후손들의 집성마을이나 천사는 그렇지 않다. 원촌은 산촌에 가까운, 그래서 강과 관련 없는 ‘원촌’, ‘원대’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천사는 앞
물굽이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도산9곡’ 가운데 제6곡인 ‘천사곡’으로 명명되었다. ‘선성14곡’에도
물론 포함되어 있다.
천사는 퇴계가 ‘이씨어른 사시는 곳’이라 했는데, ‘그 어른’은 농암의 동생으로 습독習讀을 역임한 이현우李賢佑였다. 계문고제溪門高弟인 간재 이덕홍(艮齋 李德弘)의 조부이다. 퇴계가 ‘도산서당’을 지을 때 ‘천사어른의 집 형태를 참고로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흥미롭다.
천사에는 두 가지 유적이 있다. ‘왕모산성王母山城’과 ‘월란사月瀾寺’이다. 왕모산성에 대해 육사는 “내 동리 동편에 있는 왕모성은 고려 공민왕이 그 어머니를 모시고 몽진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터가 남아있다”라고 했다. 월란사는 ‘농월관란弄月觀瀾’에서 지어진 조그만 암자로 지난 시절, 농암, 퇴계에 의해 ‘월란사 철쭉꽃 필 무렵의 모임’이란 뜻의 ‘월란척촉지회月瀾??之會’란 향기로운 문학동호회가 있었던 곳으로, ‘문향안동文鄕安東’의 남상이 된 곳이다.
왕모산성에는 ‘갈선대葛仙臺’, 월란사에는 ‘능운대凌雲臺’라는 대가 있다. 갈선대는 왕모산성
아래 능선이고 능운대는 월란사 앞 전망대이다. 퇴계가 사랑한 낭만과 고독의 산보 공간이다.
퇴계는 이 곳을 혼자 걷기 좋아했고 여러 글을 남겼다. 이 두 대는 필자에게 퇴계를 가장 많이 생각하게 하는 추억의 공간이다. 이들 유적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시 기술하기로 약속한다.
지금 천사의 물 구비는 망가졌다. 안동댐은 천사 앞들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리 실망할
필요는 없다. 천사는 남아있고 옛 풍광을 음미하는데도 부족함이 없다. 지금 도산에서 도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두 곳 정도이다. 한 곳은 도산서원 진입로 입구 우측 산 위이고(나무 때문에 낙엽이 지는 겨울이 더 좋다.), 다른 한 곳은 이 곳 월란사이다. 이 두 곳을 오르지 않고 도산을 말하지 마라. 도산을 보지 않고 안동을 말하지 마라. 그러니 한번 올라보기 바란다. 도산을
그린 몇몇 ‘도산도陶山圖’에 월란사가 빠지지 않고 나타남은 그런 연유가 있었다. 원천으로의 이번
걸음은 월란사에 올라 ‘도산’을 조망해보는 것으로 종료하려 한다.
***원촌의 가계실록, 오가세록***
집안이나 가문의 역사를 정리하여 책을 만들기도 한다. 문중차원에서 간행하는 경우도 있고, 개인차원에서 펴낸 것도 있다. 그런 책은 ‘세적世跡’ ‘세고世稿’, ‘세헌世獻’, ‘가승家乘’ 등의 제목으로
출판된다. 하계 ‘계남댁’도 몇 해 전 『계남연하각가승溪南煙霞閣家乘』이라는 우아하고 예쁜 책을 내었고, 내압 마을에서도 『방적세헌邦適世獻』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우리 집에도 10여 년 전 『긍구당세헌肯構堂世獻』이라는 책을 출판한 바 있다.
원촌에도 있다. 이원회李源會씨가 1980년 출판한 『오가세록吾家世錄』이 그런 책이다. 제목처럼 ‘우리 집 세대별 기록’이다. 조상의 이력을 대대로 정리했다. 분량의 차이는 있지마는 기록방식은 비슷하다. 가장家狀, 행장行狀, 유사遺事, 고유문告由文, 묘갈명墓碣銘 등의 글을 실었다. 모두 생애를 기록한 것이지만 용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지어진다. 글은 퇴계의 전범典範 관계로
엄격하다. ‘퇴계의 전범’이란 절대로 과장, 미화하지 않는 사실 그대로의 인물기록을 말한다.
세대별로 서술되니 한 인물의 일대기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이런 글과 책이 간행되는 한 후손들은 저마다의 조행과 시대적 책무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왕조실록』은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남겼기에 훌륭한 것이 아니고, 그 책으로 말미암아 문명국으로의 위상과 전통, 국왕의 책임정치와 역사의식을 갖도록 했다. 그 의의는
진정 위대하다. ‘뿌리 깊은 나무’의 비밀은 여기에 있었다. 조선이 무기력하게 일제에 의해 식민지화한 사실에 모든 것을 부정적인 우울함으로 조망하는 일은 매우 좁은 소견이다. 500년을 이어온 왕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흔하지 않으며, 그 내용 또한 매우 건강하다.
『오가세록』은 가계실록이다. 왕조실록은 그 기술이 멈추었지만 가계실록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는 안동문화의 뿌리이며 힘의 원천이다. 글은 지난날의 영광을 회고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결의가 있어 더욱 그러하다. 이원회씨 역시 가문에 대한 긍지를 후손들에
당부하고 있다. 아들들의 결의문도 있다. 이는 『계남연하각가승』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자세는 후손 모두의 바르고 정당한 삶에 대한 결의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이원회씨 아들들의 글 일부를 소개한다.
“앞으로 우리는 이 책 속에 어린 얼과 교훈을 귀감으로 삼고, 가일층 절차탁마하여 일거수일투족에 있어서도 명실상부한 명가후예로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겠다. 그리고 언제나 화목 단란한
가정을 도모하면서 오가의 명예는 물론, 나아가 국가 민족의 발전에 기여할 것을 다짐해 본다.
이것이 바로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