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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방(上海幇) 중국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는 파벌을 방(幇)이라고 한다. 상해방은 강택민을 중심으로 상해에서 공직생활을 하고 중앙 요직에 진출한 중국의 최고 지도부 인맥을 말한다. 상해방의 등장은 92년 등소평이 자신의 사후를 대비하여 강택민 총서기를 중심으로 한 후계 체제 강화를 결의한 이후부터 중앙정계에 강택민의 상해 인맥들이 대거 진출헀다. 클라이막스는 90년대 강택민의 최측근인 증경홍(曾慶紅)과 가경림(賈慶林)등이 중심이 되어 당시 국가주석 양상곤(楊尙昆)과 북경시 서기 진희동(陳希同)등 최대 파벌이던 북경방(北京幇)을 물러나게 함으로 중국의 최대 핵심파벌로 부각되었다. 현재 상해방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9명 중 5명으로 오방국(전인대 위원장),가경림(정협 주석),증경홍(국가 부주석),황국(국무원 부총리),이장춘과 국무원 부총리 4명 중 3명으로 황국, 증배염, 회이량 등 모두 당.정.군의 각 요직에 거의 과반수 이상 대거 포진해 있어 향후 중국의 정계는 상해방의 영향권하에서 움직여 질 것이다. |
◎ 호금도(胡錦導) 서열 1위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중앙군사위 주석
등소평이 92년 4세대 주자로 낙점 한 이후 중국 공산당이 오랜 기간 길러낸 준비된 지도자로 16전대(2002.11)때 모택동, 등소평, 강택민에 이어 오늘날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942년 상해에서 가난한 차(茶)상인의 아들로 출생했다. 부친 호증옥(胡增玉)은 상해에서 차(茶)장사 실패 후 강소(江蘇)성 태주(泰州)에서 토산품가게 점원으로 일했고, 모친은 어릴 때 사망하여 계모(李文瑞)밑에서 자랐지만 계모 역시 일곱 살 때 사망하여 홀아버지 밑에서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수재로 소문이 나 남들보다 두 살 어린 17세에 중국 최고 명문인 청화대학(淸華大學) 수리공중과(水利工程科)에 입학했고(52년) 졸업할 때까지 체육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 만점을 받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대학 재학시 1964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졸업 후 문화혁명의 돌풍에 휩싸여 서부 오지인 감숙성(甘肅省) 수력발전소로 하방(下放)되어 1968년부터 1980년까지 수리분야에서 근무했다.
이때까지 평범했던 그는 청화대 동문선배인 당시 감숙성(甘肅省) 당서기 송평(宋平)을 만나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송평은 주은래(周恩來)총리 비서를 역임한 당 원로로 등소평(鄧小平)과 무척 가까운 감숙성의 최고 실력자였다. 송평은 조리 정연하고 수치에 밝은 호증옥을 무척 아꼈다. 이러한 송평의 지원 하에 호금도는 82년 40살에 감숙성 공청단(共靑團:공산주의청년단)성(省)서기가 되면서 승진가도에 들어서고 이후 귀주(貴州)성 당서기. 티베트자치구(西)당서기를 맡아 능력을 발휘하면서 최고지도자 등소평에게 주목받는 인물이 된다. 특히 89년 티베트 라싸(拉薩)의 유혈폭동이 신속하게 진압되자 등소평은 “아주 명민하고 유능한 친구”라며 朝를 강택민(江澤民)의 뒤를 이을 제4세대 핵심으로 지명했다. 이때부터 그는 14전대 때 파격적으로 50세의 최연소 정치국 상무위원(92년)으로 98년 15전대 때 최연소 국가부주석과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최연소 행진을 거듭하며 후계자수업을 받아왔다. 이어 2002년 16전대에서 당 총서기. 2003년 제10기 전인대에서 국가주석에 선출되어 마침내 당(党)과 정(政)의 실권을 쥔 중국의 최고 권좌에 올랐다.
호금도 총서기가 현 지도부를 리더하는 데에는 애로사항 또한 적지 않다. 권력핵심인 중앙군사위 주석에 강택민(江澤民)이 여전히 버티고 있고 그의 추종 세력인 상해방(上海幇)과 증경홍(曾慶紅)을 중심으로 뭉쳐있는 공산당 원로 자제 그룹 태자당(太子党)이 주위에 대거 포진해 있다. 향후 이들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이끌어 가는 것이 주요 관건이 될 것이다.
그는 훤칠한 키와 외모, 노래와 춤에 능하고 문학과 예술에 일가견이 있다고 한다. 기억력이 비상하여 한번 만난 사람의 이름은 잊는 법이 없다고 한다. 세련된 용모와 매너, 업무능력 등 4세대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티베트 당서기 시절 89년 티베트 독립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소수민족의 인권과 종교를 탄압하고 권력을 추종하는 인물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1998년 4월 국가 부주석시절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 오방국(吳邦國) 서열 2위 전인대 상무위원장(우리의 국회의장)
오방국은 호금도와 청화대학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지만 강택민의 분신으로 상해방(上海幇)의 핵심 멤버이다.
그는 안휘(安徽)성 비동(肥東)현에서 태어나 북경에서 인민해방군 고급교관인 부친 밑에서 비교적 넉넉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청화대학 무선전자학과 졸업 후상해(上海)로 하방되어 노동자에서 출발하여 과장, 공장장, 부사장 등을 거치며 27년간 상해에서 근무했다. 1985년 상해시 당부서기로 발탁되면서 입신했고 이때 상해시장이었던 강택민과 인연을 맺으면서 상해방의 일원이 되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한다. 49세 때 91년 주용기(朱鏞基) 후임으로 상해시장이 되고, 이어 92년 14대 중앙위원회 위원 겸 정치국 위원, 94년 중앙서기처 서기, 95년 국무원 부총리에 올라 지도자의 반열에 오르고 마침내 2003년 3월 제10기 전인대에서 이붕(李鵬)의 후임으로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어 중국의 제2인자 자리에 오른다. 오방국은 중국의 경제통으로 WTO가입에 큰공을 세웠다. 그가 중앙진출 후 맡았던 분야는 국유기업 개혁과 교통으로 항상 수수한 잠바차림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는 오방국은 현 지도자들 중 가장 서민적인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상해 주요 간부 재직 시 3평의 집에 살며 여름밤 더위를 피해 5가족들이 교대로 노상 벤치에서 잠을 잔 일화와 상해시장 때 미인대회, 경마장, 도박장을 허가하지 않은 것은 중국 정계에서 유명하다.
◎ 온가보(溫家寶)서열 3위 국무원 총리
중국의 행정 사령탑을 맡은 제6대 국무원 총리이다. 1942년 천진(天津)태생으로 조부와 부모 모두 교육자인 집안에서 성장했다. 지리교사인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지질학에 재능과 관심이 있어 북경 지질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8년 문화혁명 때 하방되어 감숙성 지질국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변방에서 근무했지만 성실함과 업무 능력이 뛰어나 상사의 눈에 띄여 지도자가 된다. 81년 국무원 지질부 손대광(孫大光)부장이 감숙성을 시찰할 때 온가보의 햅가한 지식과 논리정연한 현황보고에 감탄하여 ‘감숙성에 살아있는 지도자’로 격찬하고 그를 중앙에 추천했다. 1985년 당기밀을 관장하는 당중앙판공실 부주임으로 발탁되었고 44세 때 중앙판공실 주임이 되어 1988년부터 1993년까지 6년간 호요방(胡曜邦)․조자양(趙紫陽)․강택민(江澤民)등 3명의 총서기를 보좌했다. 우리나라의 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그 자리는 최고 지도자와 호흡이 잘 맞아야 하므로 통상 지도자가 교체되면 다른 사람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그러나 3인의 총서기가 그를 계속 기용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특히 1989년 천안문 사태 때 조자양 실각 후 같이 물러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건재했고 강택민 신임총서기를 보좌 할 때 원로 정치인들과의 중재 역할을 하며 북경 정치권력의 복잡한 함수관계에 대해 “과외교사”역할을 하는 등 강택민의 철저한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98년 주용기 총리 밑에서 차세대 총리로 낙점 받아 부총리로 금융과 농업을 관장하며 차세대 총리로서의 학습을 받아왔다.
중국 언론은 온가보는 부드럽고 온유한 외유내강의 스타일로 사리판단이 분명하며 성실하고 인간관계가 좋다고 호평을 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내부에 적이 없다. 호금도와 증경홍 모두 절친한 관계로 중국의 지도부는 향후 이들의 3두 집단 지도체제로 유지될 전망이다. 교수인 부인 장배리(張培莉)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 가경림(賈慶林)서열 4위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40년 하북(河北) 백두(洦頭) 출신으로 강택민과 30년을 함께 일해온 상해방의 핵심 멤버이다. 화북 공업학원에서 전기공학을 학습한 뒤 강택민이 졸업한 상해교통대학에서 조선공학을 전공하며 교수생활을 했다. 이후 국무원 공업부에서 근무할 때 강택민과 인연을 맺었다. 중앙으로 진출한 계기는 복건성(福建省) 당서기로 근무할 때 지역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공로가 인정되어 96년 북경시장으로 영입되었다. 그는 북경 개조사업을 통해 새로운 순환도로 건설, 왕부정(王府井) 정리사업과 2008년 북경올림픽 유치 등을 통해 공로를 인정받았다. 특히 증경홍과 함께 강택민의 정적이었던 진희동(陳希同)북경시 당서기를 제거하는데 앞장서 강택민의 절대적인 신임을 확보했다. 2000년 중국최대 부패사건인 원화(遠華)그룹 밀수 사건에 말레지아 화교출신인 부인 임유방(林幼芳)이 연루되어 정치적 위기를 맞았으나 강택민이 끝가지 보호하여 위기를 모면했고 강의 지원하에 2003년 이서환(李瑞環)의 후임으로 정협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 증경홍(曾慶紅) 서열5위 당서기처 서기, 국가 부주석 ,군사위 부주석
서열은 5위이지만 강택민의 오른팔로써 또 태자당(太子党)의 리더로써 현 지도부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실력자로 호금도 총서기와 맞수로 꼽히고 있다. 그는 1939년 강서(江西)성 길안(吉安)에서 중국 건국 초기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원로 공산당 증산(曾山)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 등유금(鄧六金)은 대장정(大長征)에 참가한 27명의 홍군(紅軍)여성 중 한 명으로 공산당 고급 간부 자녀들을 가르킨 교사였고, 그의 가족중 형, 형수,남동생 모두 국민당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는 1984년 북경 공업대학 자동제어학과를 졸업 후 이러한 공산당 명문가문의 배경과 당시 상해시장 강택민의 강력한 후원으로 사해시 당조직부 부장을 거쳐 시당위원회 비서장, 시당 부서기로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이때부터 증경홍은 강택민의 오른팔 역할을 했는데 1989년 6월 강택민이 당총서기로 임명된 뒤 북경으로 오면서 유일하게 증경홍만 데리고 올 정도로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증경홍은 뛰어난 지략과 명문집안의 배경으로 1989년 강택민의 집권초기 시절 당과 군부 실권자들 견제와 방해를 무난히 극복하고 강택민의 지위를 굳힌 최대 공신이다.
부친의 군부내 인맥을 활용 90년 강택민의 제 1위협이었던 양상곤(楊尙昆) 당시 국가주석 제거와 98년 진희동(陳希同) 북경시 당서기를 비롯한 ‘북경방(北京幇)을 숙청하고, 또 강택민의 최대 라이벌이엿던 교석(喬石)전인대 상무위원장을 고령이란 구실로 물러나게 한 것도 모두 그의 정치적 수완이 발휘된 것으로 전해진다.
증경홍은 1999년 인사대권을 쥔 당조직 부장을 맡으면서 새로운 실력자로 급부상하여 참모에서 차세대 후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 국가부주석, 중앙 군사위 부주석, 공산당 핵심간부 양성소인 중앙당교(中央党校)교장까지 맡아 강택민의 대변자로 현 제4세대 상해방 지도부와 태자당을 리더하며 당․정․군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호금도 총서기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할 것이다.
제5세대 선두주자
오늘날 중국을 이끌고 있는 호금도(胡錦濤)총서기를 비롯해 정치국 상무위원 9명과 25명의 정치국 위원 제4세대 지도부는 제 16차 전당대회(16全大 2002.11.)에서 선출되었다.
오늘날 중국의 지도부는 10년을 주기로 세대 교체된다. 3세대 강택민이 10년 뒤인 현재 4세대 호금도 총서기에게 또 그 다음에는 6세대에게 지속적으로 권력을 이양하게 된다. 이것은 92년 등소평 지시에 의한 것으로 권력 이양을 제도화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또 당 지도부의 “연소화(年樔化), 전문화(專門化), 지식화(知識化)”를 지닌 유능한 엘리트군단을 양성하기 위함이다. 등소평의 이러한 구상에 의해 현재 중국을 이끌고 있는 4세대 지도부는 이미 10년 전에 발탁되어 오늘을 준비해 온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중국 현대화 건설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 할 수 있는 전문 기술관료 출신들로 현 정치국 상무위원 9명 모두가 대학, 대학원에서 이공계를 전공한 사람들로 이론과 현장경험이 풍부한 전문 테크노크라트들이다.
현5세대 선두 주자들은 이미 성(省)의 책임자. 중앙정치국 위원들로 정계에 진출하여 다음 10년을 대비하고 있다. 주요 인물로 요녕성(遼寧省), 성장(省長), 박희래(薄希來)와 절강성(浙江省), 대리 습진평(習進平)을 들 수 있다. 박희래는 보수파의 대부 이붕(李鵬)이 직접 키운 태자당(太子党)의 선두로 가장 촉망받는 5세대 지도자이다. 그는 49년 중국 공산당 8대원로 중 한 명인 박일파(薄一波)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청화대 기계과와 북경대 역사과를 거쳐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신문학 석사를 받은 엘리트이다. 그는 89년 대련 신금(新金)현 부현장에서 출발하여 93년 대현 시장(大蓮市長)까지 오른 독립심이 강한 인물로 대련 시장 때 년 16%의 높은 경제성장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공업도시로 변모시켜 중앙으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습진평은 습중훈(習仲勛) 전 부총리(사망)의 아들로 섬서(陝西)성 부평(富平)출신이다. 청화(淸華)대 화학공정과를 졸업하였고, 2000년 초반 ‘대만 전문가’로서의 능력을 인정 받아 대만과 마주보고 있는 복건성(福建省)성장 대리로 전격 발탁되면서 박희래(薄熙來)와 함께 ‘5세대 대표 주자’로서 주목받고 있다.
※ 중국 지도부의 세대별 구분
제 1 세대 |
19세기말 출생. 대장정에 참가한 혁명 세대들. 건국후 문화대혁명 시기까지 활약. 모택동(毛澤東),주은래(周恩來),주덕(朱德).유소기(劉少奇), 등 |
제 2세대 |
1900-20년 출생. 항일투쟁과 국공내전에 참가 문화대혁명(66-76) 이후 정계에 진출 등소평(鄧小平), 진운(陳云) 등 |
제 3세대 |
1930년 전후 출생, 해외유학(소련, 동구)출생의 고학력자 80년대 중국 정계에 진출 2003. 3월 퇴진 강택민(江澤民), 이붕(李鵬), 주용기(朱鎔基), 이서환(李瑞環) 등 |
제 4세대 |
1940년 전후 출생. 국내 정규대학 (이공계)출신 문화 대혁명시 하방 출신자들, 90년대 중국정계 진출 2002년 11월 제16차 전당대회와 2003년 3월 제10기 전인대에서 권력을 이양받음 호금도(胡錦濤), 온가보(溫家寶), 오방국(吳邦國), 증경홍(曾慶紅) 등 현 지도부 |
제 5세대 |
1950년 전후 출생. 문화 대혁명 이후 대학을 졸업한 40대 후반의 세대 17차 전당대회에서 중앙 진출 전망(2012년 11월) 현 각성의 성장 박희래(薄希來), 습진평(習進平)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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