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설악의 봉정암 건물은 있었을까요? 아니면?
적어도 1958년 경에는 요사채는 있어서 산장역할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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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암 홈페이지에 가보면,
6.25 전쟁 중 설악산 전투로 인해 봉정암의 모든 당우가 전소되고 5층 사리탑만 외롭게 남게 되는 비운을 겪는다. 1960년 법련스님이 천일기도 끝에 간신히 법당과 요사를 마련하였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천일기도라 함은 3년을 말합니다.
따라서 법련스님이 1957년 경부터 시작해서 낙성식을 1960년에 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봉정암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암자로 불교계에서도 의미가 깊다고 하겠고, 나아가
백담사에서 시작해-(오세암을 경유할 수도)- 봉정암으로 오르는 등산 코스는 일제 때부터 잘 놓여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전쟁 후 곧바로 봉정암을 반듯하게 새로 세우는 등산관계하여 필요성도 대두되었을 겁니다.
아래는 6.25 전쟁 후 봉정암을 사진으로 살펴본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원사진설명' 이라고 말하고 있는 건 김근원 선생의 사진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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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진설명) 1960년대 설악산 봉정암
196년대라고 하네요. 너와집이고 나무 판떼기들이 세월에 많이 바랜 걸 알 수 있습니다.
오른쪽 바위에 수많은 글씨들이 긁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목할만한 이름도 있을 것 같네요.

서울고산악부가 들렀을 때는 나무 판떼기를 막 해놓은지 뽀얀게 느껴집니다.
다시 위의 사진으로 돌아가서...사진 한 가운데에 돌탑이 있습니다. 이 돌탑은....

원 사진 설명) 아침 식사를 마치고 떠날 채비를 하며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세 사람.
심마니들이 사용했을 것 같은 거적을 깔개로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58년 10월 봉정암에서)
설명에서처럼 1958년에도 이미 있습니다.
반듯한 바위를 모아서 세워 놓은 게 하루아침의 일이 아닙니다.
법련스님이 했다는 천일기도 내용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건물은 어떨까요?
짓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허물어지고 있는 걸까요?
그 답은 아래에 있습니다.

원사진설명) 1960년대 설악산 봉정암
앞에 있는 반듯한 건물이 서울고 산악부가 하루 기거한 건물입니다.
법당 뒤에 있는 집처럼 생긴 건 당우일까요. 그렇다면 무너지기 일보 직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윗 사진을 유심히 보면....
원래 양쪽 기둥 사이에 하얀색 작은 기둥이 두개 서 있습니다.
느낌에 무너져내리려 하는 대들보를 떠받치려고 새롭게 넣은 느낌이 듭니다.
생각컨대, 스님은 처음에 이 건물을 고치려 했다가 포기하고,
다른 곳에 새로운 요사채를 세운게 아닌가 합니다.

위치는 바로 여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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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전후해서 봉정암과 관련된 텍스트들입니다.
여기서는 봉정암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요?
한국산악사진의 대가인 김근원 선생은 1958년 가을 설악을 찾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산을 오르면서 점점 가슴 저미는 장면들도 등장했다.
언제부터 들어섰는지 알 수도 없는 유서깊은 절들이 하나같이 폐허로 변해 있었다.
원명암이 그랬고 오세암도 그랬다.
봉정암은 더 형편없었다.
백담사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버티고 있었다.
처음 백담사를 볼 때는 깊은 산 속의 절이니 그러려니 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중에 신흥사를 내려가 보니 그곳은 그곳대로 무너져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6.25의 참상이 온산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폐허로 변해 있었다. 형편없었다. 겨우 명맥을...무너저 내리기 일보 직전"이라는 표현의
실제는 어떠했을까요?

원 사진설명) 신흥사 적묵당. .(58년 10월 마등령에서)
당시 신흥사는 법당만 남겨놓고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멀리 권금성을 배경으로 달맞이 꽃의 정취가 아름다웠지만 그 피폐함으로 인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 설명에 의하면 신흥사는 무너져 내리기 일보직전이라는 표현이 맞습니다.
그러나

원사진설명) 전담과 함께 설악산 천불동 스키등반을 했을 때, .(58년 1월, 설악산 신흥사에서)
등반을 마치고 신흥사에서 마지막 기념촬영을 했다.
함께 촬영에 임했던 박찬웅, 고재경, 최영식 등 모두가 산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위보다 9개월 앞선 시기의 사진입니다.
신흥사 본법당의 여러 당우들은 전쟁의 참화를 비켜나서 반듯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원사진설명) 너와지붕은 겨우 가운데만 남겨놓았고 서까래만 진한 그림자로 그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58년 10월 원명암 터에서)
원명암은 정말 볼품 없게 되었네요.
그렇다면 김근원이 백담사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버티고 있었다. 라고 표현한 백담사는 어떠했을까요?

김근원의 원 설명)설악산 백담사 1959
사진에 의하면 백담사는 반듯합니다. 어제가 그제인양 전쟁의 상흔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 자료에 의하면, 백담사는 전쟁때 소실되었고, 1957년 대웅전과 법화실, 화엄실을 중건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여력으로는 그 짧은 시간안에 무에서 이렇게 멋있게 중건한다는게 불가능했을 겁니다.
따라서,
1959년 당시 백담사는 근근히 명맥을 유지했다라는 표현이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5,60년대 설악산 백담사의 변천사를 보시려면 --> 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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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시 돌아와 1950년대 후반 내설악을 통해 대청봉을 오르려는 이들에게.
봉정암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봉정암에 도달했다. 곳곳에 심마니들의 흔적만 있지 절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록 피폐했다.
지붕은 다 떨어져 나갔고 그저 남은 서까래 몇 개만 절터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찾아든 산사람에게 제공해 준 봉정암의 막영은 별유천지 낭만이었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굵은 나뭇가지에 반합을 걸어 밥을 지었다.
늦은 저녁이었지만 커피도 곁들였다.
침낭을 펴고 누운 산속에서 바람소리말고는 소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었는지
하늘의 별들마저 그 반짝거리는 소리를 죽이고 그저 초롱초롱 깜빡이기만 했다.
용아장성의 맑은 공기는 연신 나의 가슴을 파고들며 봉정암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지붕은 다 떨어져 나갔고, 그저 남은 서까래 몇개만 절터임을 증명하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서까래 몇개라.......
이 구절은 사실 김근원 선생의 육성이 아니라 자제분이 재현을 해 낸 것이기 때문에 문학적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50년대를 기억하는 글과 사진은 극히 희박합니다.
따라서 정확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지금으로서는 여러 자료로 추정만 할 수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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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설악을 처음으로 알린 이구영 선생의 사진집 "설악산"은 주목할만한 명저입니다.
책에는 아래와 같은 설악지도가 있습니다.
그분의 산을 대하는 자세에 비추어보면 정확도가 상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설악은 서울-속초간 정기여객버스가 있었고, 서울-강릉간 비행기-속초까지 버스가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봉정암 부분을 확대해서 보자면....

1958년 현재, 봉정암에 사찰 표시(卍)가 있고(그렇다고 꼭 반듯한 건물이 있었다는 증거는 아니고요)
봉정암 바로 앞에 산장표시(집 모양)이 있습니다.
이 산장이 과연 어떤 무엇일까요?
봉정암 홈페이지의 윗 구절에 의하면, 1960년 법련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마련하였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짐작컨대, 법련스님이 주석하면서 법당을 짓던 요사채가 아니었을까.
등산객이 오면 방한칸을 빌려주거나 함께 자기도 하는 등 산장역할까지 겸하는.
설악을 외부에 소개하려는 이구영 선생은 이게 요사채가 아니라 산장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을 것이고요.
즉, 서울고 산악부가 오십년대 말에 봉정암을 찾았을 때는 노숙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는 되었을 겁니다.
참고로 지도에 의하면 당시 설악산 산장은 아니나 다를까,
오세암에 하나 그리고 봉정암에 하나 해서 두개입니다.
조선때부터 내내 설악은 내설악 코스 중심이었습니다.
천불동 코스가 개척되면서 이 경향은 일시에 반전을 불러 일으킵니다.

1960년 3월 제작된 '설악산 탐승인도지'의 한 부분입니다.
여기에도 오세암과 봉정암이 사찰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물론 그렇다고 번듯한 법당이 있다는 증거는 아니고요)
결국 답은...정확한 사진 한장이나 당시 산행기록입니다.
봉정암이 1950년대에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또다른 기록을 통해서 확인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전소'라는 말이 완전히 타버려 사라졌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겁니다.

원 사진설명) 봉정암 설악산 1972 사진. 김근원
용아장성 바위 아래 보이는 양철지붕의 봉정암, 옛날의 봉정암은 너와 집에서 양철지붕에서 기와로 변했다.
1972년에 벌써 건물이 반듯해집니다.
10년 사이에 벌써 저 높은 곳에 저런 변화가 밀어 닥쳤습니다.
지금은?
지금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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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원 선생은 1960년 '설악등반보고전'이라는 이름의 사진 전시회를 엽니다.
그 때 사진들이 궁금합니다......
피에스) 1955년 서울대 교수인 유홍렬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는
봉정암은 모두 소실되고 다만 신라시대의 석탑만이 제대로 남아 있다.
오세암 역시초석과 와편만이 남아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피에스2) 1958년 08 19 경형신문에는 오세암은 지금은 초라하나마 생목(生木)으로 방을 한칸 들이고,
제주 출신의 중이 한분 홀로 자끼고 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20일자 기사

1965년 봉정암 사진입니다.
뭔가 완비된 느낌이 듭니다...~~ 사진출처및 설악산 개척사
사진출처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