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 년 만에 피는 가시연꽃
꽃봉오리
내 엄지손가락만 하지
더러 조금 더 크거나 작은
지구상에서
홀로 가지고 있는 이름 가시연꽃은
보라 자주 색깔의 신비한 모습
멀지 않은 옛날 사람들은
백 년에 한 번 피는 꽃이라고
귀하게 아주 귀하게 여겼다지
햇볕 따스하고 물 맑고 수심 좋으니
사라진 듯 오십여 년 만에 경포습지
깊고 어두운 진흙 속에서의 부활
행운을 찾아서 먼 길 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지치도록 힘든 인간들의 개입도
찾아오는 이의 지극정성이 없으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가시연꽃의 숨바꼭질
2, 남대천 플라타너스
남대천
강변공원
플라타너스
지나온 세월에
속살을 다 드러내놓고
해체 직전인 듯하지만
그 자리에서
겨울을 버틴 열매가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플라타너스 봄볕 아래
영감님들 서넛이 모여 앉아
캔 커피를 마시고 있다
3, 경로당색칠 공부
경로당 한쪽
큰상 하나 펼쳐놓고서
여럿이 둘러앉아
백지 위에
12가지 색깔의 색연필로
12가지의 속 빛깔을 색칠하고
서서히 12가지의 속내가
하나의 빛깔로 어우러지면
비로소 미소가 번져 나온다.
노년의
12가지 빛깔의 어우러짐은
비우고 내려놓음의 인고이다
뜨거운 믹스커피 한잔과
어쩌다가 크고 따뜻한 찐빵 한 개에서도
행복한 감사를 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4, 마음의 계절
대지 위의 계절은 봄
내 마음속의 계절은 겨울
아!
봄으로 가지 못하는 이 마음
갈 수 없다네
임 없이는 봄으로 갈 수 없다네
나의 임은
바람을 몰고 다니는 구름이라네
임은 살을 트는 싸늘한 찬바람 보내서
나의 홑옷을 벗기고
겹겹이 붉은 옷을 입혀 동백꽃이라 하네
5, 매화나무
이마트 옆
작고 초라한 집 앞에서
햇볕을 받으며 은은한 향기 보내고 있는
작은 매화나무 한 그루 꽃을 피우고 있다
쓸쓸히
남대천 뚝 길을 걷고 있던
내 시야를 통해 재빠르게
순간의 생각
마음 안까지 들어 왔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것
햇볕과
매화나무는 진리다
6, 사과커피
봄비 내리는 창가의 추억 아스라한데
사과커피의 온화한 맛 향은 그리움이네
혼자서 내보는 퀴즈 하나
가장 맛있게 즐기기 위한 재료 준비는
혼자서 맞추는 정답
사과
커피
바다 내음 소금 두 알
다정한 두 사람
7, 싸리 비질하는 사람
풀잎에 이슬이 많은 날
초당 허균 난설헌 기념공원
어제라는 과거를 지우고
오늘을 준비하는 싸리 비질하는 사람
곡선을 그리며 싹싹 비질 소리 위로
노란 저고리 입은 튤립나무 단풍
실바람 타고 가장 멋진 모습으로
어린아이 손등 위로 내려앉았다
곡선의
싸리 비질한
튤립나무숲에 떨어진
단풍잎은 더 예쁘고 애처롭다
나도
애벌레가 살다간 이파리 하나 주웠다
곱게 풀칠한 닥나무종이 사이에 넣어두고
남은 인생 세월에 저항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염원하리라
8, 천년 사랑
어제 종일 비 내리고
오늘은 바람이 종일토록
몇 잎 남은 벚꽃 떨구느라 기를 쓰다가
저녁때가 되니 지쳐서 그만
나무 아래 누웠다
남은 꽃 따 먹느라 직박구리 바쁘고
맑고 푸른 하늘 흰 구름 사이로
오늘 저녁노을 파티에 어울리는 드레스
준비하고 있는 태양을 향하여
벚나무길 따라 서쪽으로
드레스의 끝자락을 따라가면
거기, 거기에 천년의 꿈이 있다네
정성을 다하여 올린 샘물 한 그릇과
물올라 무성해지는 단풍나무 줄기에
하늘과 땅이 어우러진다네
얼쑤!
시루떡에 막걸리 한 잔
관노가면극의 춤사위와
소지에 담은 축원의 불빛이여!
큰사람의 사랑은 관대하구나
대관령 깊은 골 안의 혼백이여!
만년인들 변함없으라
9, 큰언니
나는 앞에 뛰어간 아이들을 따라가기에 바빴다
그런데
앞에 뛰어가던 머스마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내 얘기 좀 들어봐 ”
“해봐” 나는 쌀쌀하게 말했다.
“나 딴따라 할까?”
“딴따라가 뭔데”
“응 기타도치고 노래도 하고 그러는 거”
“왜 그런 딴따라를 하려고 하는데”
”응 그건 해뜨는집 연주하려고”
”해뜨는집?“
”응“내가 그거 해도 될까?
”하고 싶어?“
”응, 하고 싶어“
”잘 할 수 있어?“
”응 잘 할 수 있어 “
”그럼 해야지 하고 싶은 걸 해야지
너는 잘 할 수 있어“
”알았어! 고마워“
그리고는 그 아이는 앞서간 아이들을 따라가려고 다시 뛰어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 뛰었다
우리는 이리 몰려가고 저리 몰려가고 머스마들이 ”여기 있다! 소리 지르면 우리는 우르르 다른 곳으로 뛰어가고 온 저녁내 동네 골목길을 뛰어 다니면서 놀다가 집에 가니 기다리고 있던 큰언니는 우선 자고 내일 얘기 하자고 했다
큰언니는 동네가 너무 시끄럽다고 하면서 저녁때 놀러 나가지 말라고 했다. 더군다나 우리는 부모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부모 없이 자라는 애라서 배우지 못해서 그런다고 남들한테 손 가락질 당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마치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언니가 손에 들려준 토마토 위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이후로 저녁 외출은 금지되었다.
금순이도 희숙이도 다시는 문 뒤에 숨어서 나를 부르지 못했다
집안과 밖에서 서로 바라만 보다가 우리는 등을 돌렸다.
“집안에 울려 퍼지는 에니멀스의 해 뜨는 집
반세기가 지나간 열다섯 살 적
아련한 듯 떠 오르는 추억에 잠기다.
10, 바보
나는 히죽히죽 웃고 다닌다 바보니까
바보라서 계절의 변화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
나의 한 벌뿐인 겨울 코트 가지고 같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바보라서 추운 것도 모른다고 손 가락질 하지만
춥다,
그래도 히죽히죽 웃는다 바보니까
바보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빨리
잊어버릴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바보가 뭐라고 말을 할 수는 없지
나는 문밖을 나갈 수가 없어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붉은색 표지의 법화경
먼지를 털고 연필을 찾는다
작은 글씨 잘 보이라고
바보 아들이 준 볼록렌즈
글씨들 위에 올려놓고 공책에 적는다
따뜻해지는 한마음
첫댓글 감사합니다.
코로나로 일상이 정서불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멋지게 시를 올리셨네요.
애쓰셨어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