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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The Retreat” - 헨리 본(Henry Vaughan, 1622-1699)
여국현 (시인, 영문학박사)
생의 어느 때가 되면 우리는 가끔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그리워하게 됩니다. 어린시절에 뛰놀던 고향의 동산을 생각하며, 그 시절의 친구들을 떠올리면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마저도 고통의 기억보다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그러나 우리 어깨에 드리울 삶의 무게와 질곡들을 까맣게 모른 채 순수한 생명과 자연의 햇살 속에서 마냥 빛나던 그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길은 언제나 앞으로만 나 있어 우리는 그 어린시절로부터 하냥 멀어져 알 수 없는 미지의 그곳을 향해 걸어가지요.
17세기 형이상학파(The Metaphysical School) 시인인 헨리 본(Henry Vaughan, 1622-1699)의 시 「후퇴」“The Retreat”는 제목에서 나타나듯 앞으로만 가야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어린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그 욕망의 근본적인 원인까지도 자세하게 전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에는 유럽 세계에 기독교적 세계관이 완전히 자리잡기 전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의 유일신론이 만나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면서, 유럽이 그리스-로마의 다신론적 세계관에서 기독교 유일신론의 세계관으로 옮겨가는 전환기의 핵심적 역할을 한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사상을 또렷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신플라톤주의 사상은 낭만주의 영국시, 특히 윌리엄 워즈워스를 거쳐 현대시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어, 영미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헨리 본의 「후퇴」를 읽어가며 시에 대한 감상과 함께 시 속에 반영된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말씀 드려볼까 합니다.
이 시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행부터 20행이 전반부, 21행부터 32행이 후반부입니다. 전반부에서는 어린시절의 순수하고 행복했던 순간을 묘사하고, 후반부에서는 성인이 된 현재 자신의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 속에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는 강렬한 욕망을 표현합니다.
Happy those early days, when I
Shin'd in my angel-infancy!
Before I understood this place
Appointed for my second race,
Or taught my soul to fancy aught
But a white, celestial thought;
행복했어라, 저 어린 시절은! 내가
천사와도 같은 동심으로 빛나던 시절!
두 번째 인생행로로 정해진
이곳을 내가 이해하기도 전,
혹은 내 영혼에게 하얀 천상의 생각 이외엔
다른 어떤 것을 상상하기도 가르치기 전;
화자는 “천사와도 같은 동심”으로 “빛나”는 “어린시절” 자신은 “행복”했다 합니다. “두 번째 인생 행로”로 정해진 이 세상을 아직 모른 채, 그저 “천상의 하얀 생각”말고는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던 때였으니까요. 현실 삶의 비루함도 고통도 모르는 어린시절,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요. 화자는 그런 어린 시절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두 번째 인생 행로라면 첫 번째 행로가 있겠지요? 바로 다음에서 첫 번째 행로가 무엇인지에 대한 단초가 보입니다.
When yet I had not walk'd above
A mile or two from my first love,
And looking back (at that short space)
Could see a glimpse of his bright face;
내 첫사랑으로부터
일이 마일도 채 걸어나가지 않았던 그때;
그리하여 돌아보면 (그 짧은 거리에서)
그의 빛나는 얼굴을 힐끗 볼 수 있었던 그때;
어린시절 그때는 “첫사랑으로부터” 얼마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던 때라 합니다. 가까운 거리일 테니 돌아보면 “(첫사랑의) 그 빛나는 얼굴을 힐끗 볼 수”도 있답니다. 이 “첫사랑”은 누구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신God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말이겠지요. 어린시절 이전에 나는 신의 곁에 있다가 떠나왔다는 것 말입니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과도 같이 지금 현재의 삶 이전에 전생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인 ‘God’과 함께 있던 그 시간 말입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기독교의 사고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생각은 신플라톤주의 사상의 흔적이 기독교와 결합한 결과입니다.
이제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상, 뭐 이런 말이 나오면 머리가 아파지지만 이 시뿐 아니라 영미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니 알아두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신플라톤주의 사상은 기원후 3세기 경 등장하여 플로티누스Plotinus에 의해 발전된 철학 체계로 기본적으로는 플라톤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영혼, 정신 등이 존재하는 ‘비가시적 세계’와 눈에 보이는 ‘물질, 현실 세계’를 구분한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마찬가지의 이원론적 입장을 보이지요.
‘비가시적’ 세계의 가장 위에는 모든 존재의 제일 원칙인 ‘유일자the One’가 존재합니다. ‘유일자’는 가장 완벽한 최상의 존재이자 실재성을 초월하는 궁극적 존재로서 ‘존재 너머의 존재’이며, 어떤 한계, 속성, 부분조차도 갖고 있지 않는 완전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쉽게 그냥 우주 전체의 첫존재라고 봐도 크게 다르지 않지요. 바로 이 ‘유일자’로부터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순차적으로 빛처럼 방출되어 나오지요. 먼저 ‘정신’, 혹은 ‘지성’이 나오고요, ‘지성’으로부터 ‘세계의 영혼’이 방출되어 나오고, ‘세계의 영혼’으로부터 마지막 단계인 ‘물질적 세계 존재들’이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 신플라톤주의의 입장입니다.
플라톤 사상에서 현실의 물질은 이데아의 그림자라고 그러잖아요. 그 이데아와 그림자인 물질의 관계가 ‘유일자’로부터 ‘물질적 세계 존재’ 사이에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유일자’로부터 물질적 세계의 존재까지 하나의 위계질서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에서는 이 위계질서의 구성요소들이 맨아래 ‘물질적 세계 존재’로부터 역으로 ‘세계 영혼’, ‘지성’의 단계를 거쳐 ‘유일자’와 합일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입니다. 육체를 소유한 인간은 불완전한 ‘물질적 존재’에 속해 있지만 거꾸로 완전한 존재인 ‘유일자’와 합일 될 수도 있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영혼’의 존재때문입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영혼의 불멸성’을 믿습니다. 애초에 ‘유일자’로부터 그 아래 단계로 방출되는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의 존재인 인간에게는 육신과 함께 ‘영혼’이 있지요. 인간의 ‘영혼’이 바로 ‘유일자’의 흔적인데,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육체와 영혼이 모두 선한 삶을 산다면, 죽음을 통해 육체는 소멸해도 이 ‘영혼’이 소멸하지 않고 남아 ‘유일자’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현재 우리 인간의 삶을 선하고 올바르게 산다면 육체의 소멸 이후에도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완전한 존재인 ‘유일자’의 세계에서 영원히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내세론적 사고를 그대로 담고있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다음 그림을 한 번 보실까요.
비가시적 세계 가시적 세계
유일자 <–> 지성 <-> 세계 영혼<----- > 인간 (+물질적 존재들)
(선한 삶)
보시는 것처럼 유일자에서 인간까지 순차적으로 방출된 위계에서 인간이 현세에서 선한 삶을 통해 역으로 세계 영혼을 거쳐 유일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신플라톤 철학의 사고였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염두에 둔 사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이제 위의 시에서 언급한 구절을 대입해 보겠습니다.
화자는 첫사랑으로부터 얼마 멀리 가지 않아 뒤돌아보면 첫사랑인 신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신플라톤철학의 그림에서 비가시적인 세계의 자리에 기독교의 신을 위치시키는 다음과 같은 모양이 그려집니다.
비가시적 세계 가시적 세계
신(God) <---- > 인간 (+물질적 존재들)
(선한 삶)
그런데, 기독교 사고에서는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이런 생각은 기독교 사고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신플라톤 철학에 기독교의 신을 얹어놓은 모습이지요. 그래서 때로는 ‘이교도적 사고’라 불리기도 합니다. 자, 이제 둘의 차이가 보이시지요? 이 그림에서 인간의 영혼이 신과 함께 있던 저 비가시적인 세계가 바로 인간의 ‘첫 번째 행로’였으며, 오른편의 가시적인 물질 세계인 현세가 바로 4행에서 말했던 ‘두 번째 행로’인 것입니다.
‘두 번째 행로’인 현세의 삶도 한 번 구분해서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육신을 가진 아기로 태어나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 청년, 장년의 단계를 거쳐 노년에 이르고 마침내 생을 마감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기baby -> 어린이child -> 청소년youth -> 성인adult -> 노년old -> 죽음death
이렇게 말이지요. 이때 어린시절, 즉 아이는 저 위의 그림에서 신과 함께 있던 세계와 가장 가까이 있잖아요. 그러니 ‘첫사랑’인 ‘신’과 가까이 있어 고개만 돌리면 신을 볼 수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자 이제 이어서 시를 보겠습니다.
When on some gilded cloud or flow'r
My gazing soul would dwell an hour,
And in those weaker glories spy
Some shadows of eternity;
어느 황금빛 구름이나 꽃에
내 응시하는 영혼이 한 시간정도 머물러
그 한결 희미한 광휘 속에서도
영원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었던 그때;
어린시절에는 “구름이나 꽃” 즉, 자연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육체의 눈(eyes)이 아닙니다. 영혼(soul)입니다. 그러기에 그저 바라보는(see, look at) 것이 아니라 직관과 영혼으로 “응시(gaze)”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희미한 빛” 속에서도 “영원의 그림자”를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광휘glories”는 아주 중요한 메타포입니다. 단순한 ‘빛light’이 아닙니다. “(최고의) 광휘Glory”는 곧 ‘신God’의 징표이며 신입니다. ‘최고의 광휘Glory’가 ‘신’의 빛이라면, “보다 약한 광휘glories”는 자연에 어린 신의 그림자같은 빛입니다. 그 빛 속에는 신의 그림자가 어려있지요. “영원의 그림자”는 바로 신의 광휘의 흔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어린시절에 인간은 자연대상에게서 신의 광휘를, 신의 존재를 직관으로 보고 느꼈다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에게 있는 신의 흔적인 ‘빛’ 즉, “영혼”으로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이성을 빛으로 은유하는 까닭, 여기에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 부르기도 하잖아요. 왜 암흑이라고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종교적 맹목에 이성의 빛이 꺼져 있었던 시기였기에, 이성의 빛이 밝혀지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은유적으로 그리 칭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이렇게 빛으로 가득한 어린시절에 인간은 감각으로 범하는 죄도 아직 모르는 순결한 존재이기도 하지요. 다음에서 말하는 것처럼요.
Before I taught my tongue to wound
My conscience with a sinful sound,
Or had the black art to dispense,
A sev'ral sin to ev'ry sense,
But felt through all this fleshly dress
Bright shoots of everlastingness.
내가 내 혀에게 내 양심을
죄스런 소리로 상처내도록 가르치기 전,
혹은 모든 감각에게 각각의 죄를
나누어주는 사술을 지니기 전,
그저 온 이 육신의 옷을 통하여
영원의 밝은 싹을 느낄 수 있었던 그때.
어린시절, 우리의 모든 감각은 어떤 죄도 범하지 않은 순결하고 순수한 상태였다고 화자는 말합니다. 혀는 죄가 되는 말 하지 않고, 눈과 귀로 흉악하고 사악한 일 보고 듣지 않으며, 입으로 악한 말은 내뱉지도 않는 어린시절, 그저 “육신의 옷”인 온몸으로 내면에서 강렬하게 터져나오는 “영원의 밝은 싹” 즉, 신의 ‘광휘의 흔적’만을 느끼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었지요.
O how I long to travel back,
And tread again that ancient track!
That I might once more reach that plain,
Where first I left my glorious train,
From whence th' enlighten'd spirit sees
That shady city of palm trees.
오, 나는 얼마나 되돌아 여행하고 싶은지,
그리하여 다시금 저 옛길을 다시 밟고 싶은지!
맨 처음 나의 찬란한 무리들을 떠나왔던 곳,
그 평원에 다시 한번 갈 수 있도록;
빛을 받은 영혼은 그곳에서
저 야자나무 그늘진 도시를 본다.
그러니 성인인 시인은 다시 그 어린시절로 “되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야 그 “옛길” 즉 “맨 처음 찬란한 무리들을 떠나왔던 평원”으로 갈 수 있고, 거기엘 가야 “야자나무 그늘진 도시” 즉, 성스러운 신이 계시는 그곳, 신의 도시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그림을 한 번 더 보시겠습니다.
경계지대(평원)
첫 번째 행로(The 1st race) 두 번째 행로(The 2nd Race)
선존재(Pre-existence)의 세계, 현실 세계
전생, God = Glory(광휘) 자연에서 만나는 약한 광휘들
인간은, Mind, Soul, Spirit 인간은 육체를 지닌 변화, 소멸
불멸의 존재 죽음의 존재
찬란한 무리(the glorious train), baby -> child -> youth -> adult -> old -> death
즉, 천사들과 함께 존재 <--------------------<-----------<--------------
저 그림에서 두 번째 행로를 살고 있는 성인인 화자는 먼저 어린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다음에 “첫 번째 행로”와 경계 지대인 “평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평원에서는 “첫 번째 행로” 즉, 신과 함께 불멸의 영혼으로 존재하던 영혼이 세계가 보이고, 마침내 그곳에 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현실은 자신의 바람과 다릅니다.
But ah! my soul with too much stay
Is drunk, and staggers in the way.
Some men a forward motion love,
But I by backward steps would move;
And when this dust falls to the urn,
In that state I came, return.
하지만, 아! 내 영혼은 너무 오래 머물러
죄에 취해 비틀거리는구나.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 나가는 것을 사랑하지만
나는 뒷걸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하여 이 육신이 쓰러져 유골단지에 담길 때,
내가 왔던 그 상태대로, 되돌아가고 싶다.
그는 지금 현세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현세의 삶을 영위하며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짓게 되는 많은 죄가 육신도 “영혼도” 잠식해 버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비틀거”립니다. 그렇기에 그는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앞에는 더 많은 죄의 시간이 그를 기다릴 뿐 아니라, 결국에는 ‘죽음’이 그를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뒷걸음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깐,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인간은 현세를 살고 죽음을 거친 다음 영생에 이르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에 나타난 사고방식은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엄밀한 의미에서는 기독교 철학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사상과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결합한 태도라고 할 수 있지요.
마지막 두 행, “육신이 쓰러져 유골단지에 담길 때” 즉, 죽음에 이를 때, 그는 “(처음에) 왔던 상태대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처음에 왔던 상태, 즉 완전한 영혼의 상태, “첫 번째 행로”에서 존재하던, 신과 함께 “영혼”으로 존재하던 그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시인의 바람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뒷걸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구절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앞에서 제가 제시한 그림을 참고해 보자면 성인인 시인이 어린시절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 구절을 해석합니다. 말 그대로 “뒷걸음”인 것이지요. 즉, 우리가 바라보는 앞쪽이 죽음이 있는 세계라면 “뒷걸음”은 죽음이 있는 앞쪽으로 걸어가지 않고 뒤로, 어린시절로 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문제가 있습니다. “육신이 쓰러져 유골단지에 담길 때”라는 구절은 글자 그대로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뒷걸음”이라는 표현과 모순됩니다.
저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쪽, 즉 어린시절을 등지고 죽음을 바라보면서 걷던 화자가 돌아선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 시선은 어린시절 방향으로 향해 있겠지요. 그러나 걸음은 죽음 쪽으로 “뒷걸음”이 되지요. 즉, 시인은 자신의 마음과 시선은 저 어린시절로 향하되 현실에서 걸음은 죽음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요. 그래서 어린시절을 보고, 그리 가고자 하는 욕망을 품은 채, “뒷걸음”으로 죽음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운명과 현실을 인정한 것이지요. 그러나 마침내 죽음의 순간이 되어 육체의 굴레를 벗을 때 그의 영혼은 비로소 어린시절로, 평원으로, 그리고 마침내 신의 곁으로 “왔던 그 상태대로” 순수한 영혼이 되어 다시 돌아간다는 것, 그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무지개」라는 시에서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이라 했습니다. 그 까닭은 이제 분명해집니다. 세속의 진애가 묻지 않은 상태로 신 곁에서 영혼으로 존재하던 그 완전하고 순수한 무결의 상태에 더 가까이 있는 보다 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인 것이지요.
헨리 본의 시 「후퇴」는 고대 플라톤 철학의 재해석인 신플라톤 사상이 기독교와 만나는 접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철학과 종교가 문학 속에서 결합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 시가 인간 중심주의 문예부흥의 시기인 르네상스의 작품이라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이제 인간은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철학이나 종교가 아니라 문학 혹은 예술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헨리 본의 「후퇴」“The Retreat”입니다.
The Retreat
Henry Vaughan
Happy those early days, when I
Shin'd in my angel-infancy!
Before I understood this place
Appointed for my second race,
Or taught my soul to fancy aught
But a white, celestial thought;
When yet I had not walk'd above
A mile or two from my first love,
And looking back (at that short space)
Could see a glimpse of his bright face;
When on some gilded cloud or flow'r
My gazing soul would dwell an hour,
And in those weaker glories spy
Some shadows of eternity;
Before I taught my tongue to wound
My conscience with a sinful sound,
Or had the black art to dispense,
A sev'ral sin to ev'ry sense,
But felt through all this fleshly dress
Bright shoots of everlastingness.
O how I long to travel back,
And tread again that ancient track!
That I might once more reach that plain,
Where first I left my glorious train,
From whence th' enlighten'd spirit sees
That shady city of palm trees.
But ah! my soul with too much stay
Is drunk, and staggers in the way.
Some men a forward motion love,
But I by backward steps would move;
And when this dust falls to the urn,
In that state I came, return.
후퇴
행복했어라, 저 어린 시절은! 내가
천사와도 같은 동심으로 빛나던 시절!
두 번째 인생행로로 정해진
이곳을 내가 이해하기도 전,
혹은 내 영혼에게 하얀 천상의 생각 이외엔
다른 어떤 것을 상상하기도 가르치기 전;
내 첫사랑으로부터
일이 마일도 채 걸어나가지 않았던 그때;
그리하여 돌아보면 (그 짧은 거리에서)
그의 빛나는 얼굴을 힐끗 볼 수 있었던 그때;
어느 황금빛 구름이나 꽃에
내 응시하는 영혼이 한 시간정도 머물러
그 한결 희미한 광휘 속에서도
영원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었던 그때;
내가 내 혀에게 내 양심을
죄스런 소리로 상처내도록 가르치기 전,
혹은 모든 감각에게 각각의 죄를
나누어주는 사술을 지니기 전,
그저 온 이 육신의 옷을 통하여
영원의 밝은 싹을 느낄 수 있었던 그때.
오, 나는 얼마나 되돌아 여행하고 싶은지,
그리하여 다시금 저 옛길을 다시 밟고 싶은지!
맨 처음 나의 찬란한 무리들을 떠나왔던 곳,
그 평원에 다시 한번 갈 수 있도록;
빛을 받은 영혼은 그곳에서
저 야자나무 그늘진 도시를 본다.
하지만, 아! 내 영혼은 너무 오래 머물러
죄에 취해 비틀거리는구나.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 나가는 것을 사랑하지만
나는 뒷걸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하여 이 육신이 쓰러져 유골단지에 담길 때,
내가 왔던 그 상태대로, 되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