❹ 일하는 자 - 행함으로 의롭다 함이 되기를 도모하는 자를 "일하는 자"에 비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에 참가하는 자를 "일 아니하는 자"(5절)에 비한다. 하나님 앞에서 무슨 선을 행하여서 그것의 보수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의 노력은 헛되다. 천국에는 삵군 관계로 들어갈 자 없다. 천국은 오직 "일하지 않는 자", 곧, 제 힘으로 의를 얻으려고 헛수고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를 구걸하는 영적 걸인(靈的乞人)만이 들어간다. 이러한 구원을 받은 자만이 참된 선을 행한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 하나님께서 보상적(報償的)으로 구원을 주시는 자가 아니신 사실을 역설(力說)하기 위하여, 우리 본문은, "일을 아니할지라도"란 말씀에 다시 "경건치 아니한 자"란 말씀을 첨부한다. 사람이 구원 받을 자격 없는 것으로 말하면, 선을 못하는 정도만이 아니고, 그보다 우심하게 "경건하지 아니한" 정도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무자격자보다도 차라리 반자격(反資格)을 상대하고 구원을 주셨으니, 이는 사랑으로 좇아 나타난 은혜이다. 그러나 이런 구원은, 하나님의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심판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자를 칭의(稱義)하심에 국한하여 위하신 하나님의 처사이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주의할 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일군이 가지는 보수적 기대를 일소하고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의를 구걸하는 영적 걸인의 의식(意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만일 자기의 공로로 구원 받기를 바란다면, 그는 은혜로 구원 받기를 배척하는 자이다.
믿는 자– 이 말은 헬라 원어로 피스튜온티 에피(πιστεύοντι ἐπί)인데, 그것은 하나님과 및 그 말씀 위에 온 몸을 던져 업히우는 것을 가리킨다.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3절 하반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❻ 행복 - 이 말의 헬라 원문( 마카리스몬 μακαρισμόν )은 "복되다"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신(神)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의 복됨을 가리킬 때에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유디미우스 지가베누스(Euthymius Zigabebus)는 말하기를, "복되다 함은, 존귀와 영예의 최대한 상태를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마카리스몬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행복을 가리킨다.
❼ ~ ❽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 이 말씀은, 시 32:1-2 상반인데, 70인역(LXX)대로 인용한 것이다. 히브리 원문에 의하면, 여기 있는 "불법"이란 것은 폐솨( ע )인데, 패역한 죄로서 공공연하게 내놓고 범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죄"란 말은 카타아( ה )니, 하나님의 뜻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는 행위로서 연약하여 짓는 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죄"란 말이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은 히브리 원어로 아온( ןוֹ )인데, 사곡(邪曲), 불공정을 의미하는 바 인생의 정도(正道)를 좇지 않는 윤리적 죄악이다. 위의 세 가지 죄악은 모든 죄악을 총망라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죄들의 용서됨에 대하여, 역시 각이(各異)한 동사(動詞)로 진술되었다. "사하심을 받고"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네수이( יוּש )인데, 치워버림이다. 그리고 "가리운다"는 말은 케수이( י וּס )인데 하나님께서도 그 죄를 보이지 않게 가리움이다. 그 다음에 나온 동사 "죄를 인정치 아니함"은 야크쇼브( ב )라고 하는데, 죄로 여기지 않고 도말함이다. 위의 세 가지 말은 사죄 성질의 어떠함을 상세히 밝혔으니, 범죄의 흔적이나 후환이 없도록 하는 깨끗한 사죄요, 무소부지(無所不知)하신 하나님에게도 죄가 보이지 않게 가리워 버리는 전능하신 처분이고, 죄가 있어도 간주되지 않는 철저한 대속(代贖)을 보이는 사죄이다. 누가 "복이 있는자"라는 선언을 받았는가? 그는 모든 공적(功積)을 소유한 성자(聖者)가 아니고, 회개하고 믿어서 하나님의 의(義)를 얻는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