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광역매일 pdf.PDF
지국장 밑에서 배달 및 수금 업무를 돕고 부수확장을 위한 판촉직원을 안내하는 일 등 지국 전반의 업무를 총괄하는 사람이 총무인데, 예전에 박 총무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지국에서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고, 관할지역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한편 그 일은 오토바이 없이는 업무가 불가능하기에 나는 오토바이를 수 십 년 타는 생활을 하게 됐다.
나의 친형은 젊은 청춘의 피 끓는 시절 통기타를 퉁기며 친구들과 어울려 부두가 낚시와 축구를 즐겼고, 큰 누나가 사준 전축에서는 사이먼 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등 당시 유행하던 팝송이 집안에 늘 울려 퍼졌다. 주말의 명화에서는 외화가 넘치게 쏟아지고, 미국 영화배우 제임스 딘이 청춘의 우상으로 떠오르다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도 그 무렵이다.
제임스 딘의 영향인지 어느 날 형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먹고 오토바이를 집어타고 길 가던 행인을 치어버리는 대형 사고를 쳤다. 더구나 뒤에는 여자 친구를 태운 채로. 가난했던 집안의 가족들을 책임지던 모친이 그때 겪은 청천벽력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고, 뒷수습을 하느라 돈을 빌리고, 그 빚을 갚아나가는데 꽤 오랜 세월이 걸렸던 기억이 난다.
형은 잉크병에 만년필촉을 적셔 일기장에 꼬박꼬박 청춘의 열정을 기록했었는데 그 날의 기록은 무슨 내용으로 채워졌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런 형편이고 정서인데 오토바이를 타고 지국에서 총무 일을 한다고 하니 엄마의 반대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십 년 넘는 세월동안 무탈하게 박 총무의 업무일지를 계속 기록할 수 있었으니 되돌아보니 감사가 남는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2년 울산을 공업특구로 지정하고 공단을 조성한 관계로 공장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고, 그 무렵 울산의 지형은 도시화가 가속됐다. 근로자들이 밀려들자 그들의 쉼터가 되고 보금자리가 되는 사택이 필요했고, 땅값이 살 때 기업에서는 대단지 사택을 만들었다. 울산의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많은 곳이 공단 사택부지였다. 지금 남구의 홈플러스와 동부아파트, 대현중학교가 위치한 주변도 원래는 동부화학 사택이 있었다.
드넓은 대지 위에 고급 사택들이 드문드문 나눠져 있었고, 박 총무의 오토바이 소리가 지나가면 신문이 배달되었다. 그때는 일일이 방문해서 수금을 했다. 어느 집에 누가 살고, 어느 회사를 다니는지 정도는 자연스레 알 수밖에 없었다. 일반 주택의 독자들도 안면이 트여 밥 먹고 가라고 할 정도였고, 커피 한 잔 정도는 동네 어르신들에게서 쉽게 얻어먹던 시절이었다. 남편의 월급봉투로 일가족 생활이 유지됐고, 여성들의 고위직 일자리도 그렇게 많지 않던 시기였다.
주택가 집들에 형광등 불빛이 커지면 박총무의 오토바이 소리는 요란해진다. 두 서너 시간 정도 바쁘게 다니면 그 날 수금할 금액은 채우고도 남는다. 그러던 것이 차츰차츰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고, 인터폰으로 방문객을 확인하게 되고, 경비실이 늘어나게 됐다. 아파트 문화의 급속한 보급과 대량의 인구 유입은 관계의 단절로 이어졌다. 이제 신문 구독자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독자들 또한 지국장이 누구인지 몰라도 신문 보는데 지장이 없고, 어느새 수금도 지로와 자동이체로 대체됐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만약 그때의 신문들을 꾸준히 스크랩해두었다면 역사의 자료가 됐을 것이고, 울산박물관에 기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덧 신문의 언어가 내 삶의 일부가 됐다는 자술서를 남기는 지금, 박 총무는 신문에 쓸 칼럼의 언어를 고르고 있다.
<박정관 굿뉴스울산 편집인, 중구뉴스 기자>
울산대교의 심장을 밟고 서다(울산대교 시민개방 행사 현장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