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설의 아시아 신화로 읽는 세상] (4) 곰이 조상을 낳고..아무르강 우데게이족 신화, 고조선과 닮은꼴
2017. 11. 1.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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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우데게이 신화와 단군신화
곰과 관련된 시조 신화는 단군신화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시베리아나 중국 동북부, 일본 홋카이도 등에도 전해지고 있다. 이들 지역은 ‘곰 문화권’으로 불리기도 한다. 곰을 둘러싼 신화를 이해하는 것은 곧 단군신화를 더 잘 이해하는 길이다. 사진은 단군신화를 관광상품화하기 위해 한 업체가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채화식을 하는 장면.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선 세종 21년, 그러니까 1439년 7월2일 병조에 이상한 첩보가 올라온다.
함길도 도절제사의 보고서인데 회령 절제사의 보고서를 다시 올린 것이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회령 절제사는 이렇게 쓴다.
오도리(吾都里)의 촌장 마가탕(馬加湯)이 와서 말했습니다.
“구주(具州)의 우지개(亐知介) 등이 ‘어떤 사람이 강에서 큰 고기를 잡았는데 배를 갈라 보니 아이 둘을 배고 있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동네 사람들과 함께 가 보니 애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고 떠들어댔습니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우지개의 풍속에 여자는 모두 방울을 차는데, 무오년 5월에 여자 셋이 벚나무 껍질을 벗기기 위해 산에 들어갔다가, 한 여자는 집으로 돌아오고 두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그해 11월, 사냥하는 사람이 산에 들어가 곰 사냥을 하다가 나무의 빈 구멍 속에서 방울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나무를 베어 내고 보니 두 여자가 모두 아이를 데리고 있어서 그 연유를 물었답니다. 여자들 대답이, 지난 5월에 벚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속에 들어왔다가 길을 잃어 집에 돌아가지 못했는데, 수곰의 협박으로 함께 자서 아이를 낳았다는 겁니다. 애들 얼굴이 반은 곰의 모습과 같아서 그 사냥꾼이 아이들은 죽이고 두 여자는 데리고 돌아왔답니다.’”
첩보는 두 가지 사건을 전하고 있다. 둘 다 비현실적인 사건이다. 큰 고기가 아이를 뱄다는 것도, 곰과 교접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첩보를 신화적 사건으로 읽으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신화 속에는 늘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첨해 이사금 시절에 동해안에 큰 물고기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 의자왕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손진태의 <조선민담집>(1930)에는 고래 배안에 들어갔던 사람 이야기가 있는데 고래가 덥석 삼켜 배안에 들어가 보니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안에서 노름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신화와 민담의 상상에서는 흔히 있는 사건이다. <산해경>이나 <어우야담>에 기록되어 있는 인어(人魚)의 상상력도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이를 밴 물고기 사건보다 더 우리의 흥미를 끄는 부분은 곰의 아이를 낳은 우지개 여자들 이야기다.
EBS 창사특집으로 마련한 다큐프라임 <호랑이의 땅> 프로그램에 나온 우데게이족.
우선 몇몇 정보를 확인해 보자. 마가탕이 촌장을 한 ‘오도리’는 건주여진족이 거주하던 오늘날 중국 지린성 지역이다. ‘구주’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두만강 동북쪽 만주 지역을 일컫는다. 풍문을 전한 구주 우지개는 오늘날 우데게이족이라고 부르는 소수 종족이다.
현재 우데게이족은 러시아 비긴강, 아무르강 지역에 살아남아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구주 지역 여진족의 일부로 살기도 했던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부 우데게이들은 한양에 들어와 살기도 했다. 현종 때까지도 우지개가 실록에 언급되는 것을 보면 17세기까지만 해도 우데게이족은 주로 함경도 변경 지역에서, 일부는 내륙에 들어와 우리와 섞여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이들은 곰과 결혼한 여자 이야기를 떠들어댔을까?
우지개 여자들을 협박해서 함께 산 곰은 또 어떤 존재였을까? 이 의문을 풀려면 우데게이족의 신화와 삶을 만나야 한다.
‘사냥꾼이 자신의 아이들을 숲에 남겨두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곰이 소녀를 아내로 삼아 함께 살았고, 범이 소년을 남편으로 삼아 함께 살았다. 범과 소년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고 곰과 소녀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우데게이족의 시조이다. 그 때문에 우데게이족은 곰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생각한다.
어느 날 소년이 사냥에서 화살로 곰한테 상처를 입혔다. 곰이 죽으면서 자신이 누이동생의 남편이라고 말하며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이후로는 오빠에 의해 살해된 곰 고기는 누이동생이 먹을 수 없고 여성은 언제나 곰 가죽에서 잘 수 없다. 곰의 음경 뼈는 모계를 따라 상속하도록 하라.” 이 금기는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러시아 학자들이 보고한 우데게이 구전 신화이다. 어떤 소녀와 곰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우데게이족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 그래서 우데게이 사람들은 곰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생각한다는 설명도 덧붙어 있다. 전형적인 동물 시조신화, 곧 토템신화다.
한데 이상한 것은 동물과의 결연에 앞서 사냥꾼 아버지가 느닷없이 아이들을 남겨두고 강물에 뛰어들었다는 진술이다. 왜 투신했을까? 하지만 우리의 의문에 대해 이 신화는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의문을 풀려면 또 다른 우데게이 시조신화로 우회할 필요가 있다.
‘누나 벨레가 남동생 이그드이가와 함께 살았다. 어느 날 남동생은 누나가 곰인 비아투와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동생은 누나가 여행을 떠난 사이에 그 곰을 창으로 찔렀고, 곰은 피를 흘리면서 도망쳤다. 여행에서 돌아온 누나는 이런 사실을 알고는 비아투를 찾아 집을 떠나버렸다. 곰을 찾은 누나는 곰과 함께 살았지만 곰 남편은 결국 남동생에 의해 살해된다. 그 후 누나는 남동생을 떠났고, 남동생은 다른 여자와 혼인을 했다.’(두 편의 우데게이 시조신화는 ‘시베리아 우데게이족 신화와 신앙에 대한 연구’(곽진석, ‘한국민속학’ 36, 한국민속학회, 2002)에 소개된 번역문을 일부 수정해 인용)
첫 번째 시조신화의 변이형으로 보이는 이 신화는 오누이가 함께 사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함께 살았다 함은, 이야기의 맥락을 보면 근친혼 관계였다는 뜻이다. 평온하던 둘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다음 장면이다. 누이가 다른 남자, 곧 비아투라는 이름의 곰과 동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본부(本夫)이자 동생에게 발각되는 장면이 그것이다. 처남이자 본부의 공격을 받은 곰은 도망쳤지만 결국에는 살해된다. 첫째 신화에서 유언을 남기고 죽은 곰이 바로 이 곰이다.
왜 남동생은 곰을 죽였을까? 이 살해에는 누이이자 아내인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 남동생의 분노와 복수 이상의 문화적 맥락이 개입되어 있다. 결혼제도의 변화가 그것이다. 퉁구스족의 일원인 우데게이족은 오랫동안 족내혼(族內婚) 풍습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누이가 함께 살았다는 진술은 족내혼의 다른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족내혼에서 족외혼(族外婚)으로의 변모는 상당히 충격적인 문화 변동 현상이고 신화는 이 충격을 완화하고 조절하기 위해 개입한다. 그래서 낯선 처남을 죽이려고 하는 남동생의 형상, 남동생을 떠나는 누나의 형상이 창조된 것이다. 이 신화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제 남동생은 누이가 아닌 여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다.
결혼제도의 변동과 신화의 대응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첫 번째 시조신화의 아버지가 돌연 강물로 뛰어든 이유가 짐작이 간다. 아버지의 투신은 결혼제도의 변동을 예고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부친의 죽음 이후 오누이가 각각 곰, 범과 짝을 맺었다는 이야기가 그 좌증이 아닐 수 없다.
시조신화가 말하는 이 최초의 족외혼을 통해 곰을 시조신으로 숭배하는 우데게이족이 탄생했을 뿐만 아니라 곰과 맺어진 또 다른 관습까지 형성된다. 여성은 곰 고기를 먹을 수 없고 곰 가죽을 덮고 잘 수도 없지만 곰의 남성성을 상징하는 음경 뼈는 모계로 상속된다는 관습이 그것이다.
신화가 말해주듯이 우데게이 사람들은 곰을 조상으로 여기고 신으로 숭배한다. 곰을 사냥하여 죽이지만 죽은 곰을 위해 벌이는 의례가 있고, 의례에서 부르는 곰을 위한 노래와 이야기가 있다. 우데게이족만 그런 것은 아니다. 시베리아, 중국 동북부 지역에 살고 있는 한티족, 어웡키족, 나나이족, 에벤족이나 일본 홋카이도의 아이누족 등 다수 종족들이 곰의 신화와 의례를 여전히 전승하고 있다. 흔히 ‘곰 문화권’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 주민들은 곰은 신성한 존재이며 자신들과 같은 핏줄이라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우데게이족 신화 내용이 실린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
다시 1439년으로 돌아가 보자. 구주의 우지개 사냥꾼은 자신들이 시조로 여기는 곰과 두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왜 죽였을까? 마치 사실처럼 기록하고 있는 ‘세종실록’의 정보만으로는 진실을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신화와 의례의 변형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두 가지 추론은 가능하다.
하나는 두 여자가 이웃 종족의 남성과 강제 결혼(늑혼·勒婚)을 했을 가능성이다. 우데게이족 가운데는 곰을 시조로 여기는 씨족도 있고, 범을 시조로 모시는 씨족도 있다. 우데게이와 섞여 살았던 오로치, 나나이족도 비슷하다. 방울을 찬 우지개 여자들을 잡아 애를 배게 한 곰은, 당연한 말이겠지만, 실제 곰이 아니라 곰을 시조로 숭배하고 곰을 사냥하여 곰 가죽옷을 입은 곰 씨족 남성이었을 터인데 길 잃은 두 여자를 억지로 아내로 삼은 것이다.
한데 이 사건 안에 등장하는 두 여자와 곰과 사냥꾼의 관계는 우데게이 시조신화의 누이(벨라)와 곰(비아투)과 남동생(이그드이가)의 관계와 유사하다. 실화처럼 보고된 우지개 이야기는 우데게이 시조신화의 변형일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이그드이가가 비아투를 죽였듯이 사냥꾼이 곰 아이를 살해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조신화와 곰 의례의 약화 혹은 부재가 초래한 결과일 가능성이다. 15세기, 아무르강이나 비긴강 지역의 우데게이는 수렵과 어로 중심의 원시적 삶과 더불어 자신들의 신화와 의례를 전승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생활이 달라진 때는 20세기 초 러시아가 이 지역을 정복한 뒤 위생문제 해결을 빌미로 우데게이들을 크라스노야르로 집단 이주시킨 다음부터다.
그러나 일찍부터 중원이나 한반도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던 만주 지역의 우데게이족은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신화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동아시아 중세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원시적인 곰 살해 의례는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와 더불어 시조신화의 동물조상신이라는 관념과 믿음도 유지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성 관념의 부재가 곰 아이를 죽인 것이다.
두 가능성 가운데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지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세종실록’의 보고서가 구전되는 우데게이족 시조신화와 고조선의 단군신화를 이어준다는 사실이다. 단군신화의 곰과 범은 우데게이 시조신화의 곰과 범과 무관할 수 없다. 우데게이족과 그 이웃 종족들의 곰과 범의 신화를 더 따라가 보면 단군신화를 훨씬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