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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어떻게 하늘을 나는가 - 문경 조령산 산행기
그리움이 길을 내고
“힘든 산에는 왜 오르세요?” 점심을 같이 하던 중 한 분이 내게 묻는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을 종종 받게 된다. 나는 빙긋 웃었다. 이태백이 ‘산중문답’에서 보여준 것처럼, 빙그레 웃음으로써 답변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웃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마음은 절로 한가하더라(笑而不答心自閑)’.
실상 나는 삶과 문학, 그리고 산행에 대해 내 생각을 개진할 만큼 고수는 못 된다. 그래서 ‘왜 사는가, 왜 쓰는가, 왜 걷는가’를 물으면 언제나 무척 곤혹스럽다. 군산에서 전주로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 물어 본다. 나는 왜 오르는가?
등산가의 수만큼 등산의 동기가 있으며, 등산을 하는 방식에 따라 체험 내용이 달라진다. 돌아보면, 나 자신의 경우에도 등산의 동기와 체험 내용이 조금씩 변해 온 듯하다. 20대에는 성취감, 혹은 정복의 쾌감을 맛보기 위해 산을 오른 적도 있었다. 지리산을 좋아했던 젊은 날에는 하루에 몇 km를 주파했다는 것을 스스로 뿌듯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30대에는 극기심(克己心),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 산을 오르기도 했다. 내 안팎의 난관에 맞설 용기를 산에서 기르려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산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40대 후반, 중년이 된 이후부터는 건강을 회복․유지하기 위해 산에 간다.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안정을 산에서 얻었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산을 찾는 진정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거기 산이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라는 조지 맬러리(1886~1924)의 말로 답변을 대신할 수도 있으리라. 좀 더 그럴 듯하게 ‘산이 거기 있고 내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맬러리의 저 유명한 말이 우문현답이지만, 각자가 몸으로 산을 체험하기 전에는 그 참뜻을 깨우치지 못할 듯하다.
조금은 추상적이고 전달이 불충분하겠지만, 그리움이 나를 산으로 이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먼 곳에의 그리움(Fern Weh!)'을 지닌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나라에 대한 동경만이 아니라, 일상의 공간을 벗어난 곳에 대한 지향성을 뜻한다. 더구나 산은 높이와 폭과 넓이를 지닌 곳이 아닌가? ‘I go to prove my soul’ 시인 R. 브라우닝이 ‘페가수스’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자신의 혼을 증명하기 위해 떠나는’ 사람만이 실존적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인간은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길 떠남은 공간의 이동에만 그치지 않고, 그것이 정신적 모험, 정신적 길 찾기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움이 나와 산 사이에 길을 내어, 나는 그 길을 따라 걷는다. 그 길에서 산과 강, 그리고 새와 꽃을 만나 눈인사하고, 다른 사람의 생과 잠시 동행하는가 하면, 오랫동안 함께 걸어왔으면서도 잊고 지냈던 ‘나’를 마주하기도 한다. 배낭을 짊어지고 집을 나설 때마다 나는 산과 숲길에서 어린 나, 훼손되기 이전의 순수한 ‘나’를 찾길 바란다. 시집 <질문의 책>(문학동네)에서 파블로 네루다가 노래하는 것처럼,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묻곤 한다.
산길, 하늘에 이르는
2013년 6월 11일 산우회의 제 53차 산행지는 문경 조령산이다. 조령산은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서, 백두대간 상에 험준한 바위로 이루어졌다. 오늘 산행은 ‘신풍교 - 절골 - 촛대바위능선 - 조령산 - 신선암봉 - 공기돌바위 - 천선암 - 신풍교’를 거치는 원점회귀 산행을 하게 되는데, 산행 시간은 6시간으로 잡았다.
호남고속도로 상행선을 타고 회덕을 거쳐 증평를 빠져 나온 버스는 34번 국도를 따라 증평, 괴산 산막이옛길을 지나 연풍나들목으로 접어든다. 중부내륙고속도와 만나는 지점에 연풍나들목이 있는데, 이곳에서 오른쪽 이화령터널 쪽으로 가면 문경에 이르고, 국도 3호선의 왼쪽으로 충주, 수안보 방면으로 가다 신풍나들목에서 빠져 나오면 원풍리 절골에 이르게 된다.
과거에는 조령 제3관문에서 능선을 타고 깃대봉, 신선암봉을 거쳐 정상(조령산)을 경유해 이화령으로 내려서거나, 이화령에서 시작하여 정상에 오른 다음 조령 제1관문으로 내려서는 코스가 인기 있었는데, 요즘에는 이번에 우리가 산행한 것처럼, 원풍리에서 절골을 경유해 정상을 다녀오는 원점회귀 코스가 많이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10시. 조령휴게소에서 몸 풀기를 마친 후 절골을 향한다. 조령산 자락에 상암과 중암이 있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한 듯하다. 대웅전과 약사전이 있는 신선암(神仙庵)이 절골 길옆에 있었지만, 산행을 마치고 둘러보기로 하고 지나치기로 했다. 하지만 돌담 너머에 짙푸른 머리를 내민 능소화, 연두색 휀스 아래에 꽃줄기를 밀어올리고 있는 접시꽃이 내 눈길과 마음을 붙든다. 붉은 접시꽃이 딱 한 송이만 벙글어 있다.
꽃을 좋아하는 분들과 산행을 하게 되면서, 여린 꽃자루를 밀어 올리는 작고 소소한 생명을 사랑하게 되어 이들을 떨림으로 지켜보게 되었다. ‘슬픔일 때 곡비(哭婢)가 되고, 기쁨일 때 연인이 될 줄 아는’ 시인, 김선우의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에바다기도원을 지나, 촛대바위능선을 타기 위해 가파른 숲길을 오른다.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아, 초입을 찾기 어려워 산행하기 불편한 길을 따라 오른다. 산악대장을 따라 선두 그룹에서 산행을 하는데, 점점 후미와 간격이 벌어지고 있다.
백두대간은 마패봉(925m) - 깃대봉(850) - 신선암봉(939m)으로 굽이치다가 조령산(1026m)에서 가장 높이 솟구친 후 이화령 방향으로 잦아들며 내달리고 있다. 촛대바위 능선은 백두대간 조령산에서 원풍리 절골로 내리뻗은 줄기라서 촛대바위 직전부터 등고선이 750에 이르고 있어 오르기가 쉽지 않다.
하늘에 오르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천로역정(天路歷程)처럼, 촛대바위 능선은 로프를 붙들고 암벽을 오르내리는 구간이 제법 많아 협력 산행을 해야 한다. 로프 구간이 촛대바위를 앞에 두고 있는가 하면, 촛대바위보다 고도가 높은 곳에 세미 클라이밍 구간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산의 높낮이와 관계없이 산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온다. “Is it worth the risk?” (그것은 목숨을 걸 만한가?) “Bergsteigen - eine Sucht?” (등산, 그것은 병인가?)
산행의 힘겨움과 보람, 희열이 한몸을 이루는 까닭에 회원들은 모두 로프 구간을 거뜬히 통과한다. 에베레스트의 수직 세계나 그린란드의 수평세계, 그 ‘죽음의 지대’ ‘한계상황’에 직면하며 대자연을 경험하는 분들에 비하면 우리들의 산행은 실로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조령산을 오르는 산우회 회원들의 마음속에도 저마다의 고산 거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리라.
10시 55분. 남도소리가 촛대바위능선을 타고 올라온다. 회원 한 분이 단가 한 가락 뽑아내는 듯. 고통의 숲에서 소리로 달래며 살아온 사람들이 남도사람이 아닌가? 손목 수술을 앞둔 상황에서 산행에 동행하며 회원들에게 기를 불어 넣어 주신다. ‘소리새’ 대장님과 ‘산과강’님은 길을 개척하며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데, 나는 뒤에 오는 분들과 함께 가기 위해 걸음을 늦추기로 했다.
11시 15분. 중간 그룹을 만나 촛대바위 능선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능선을 넘어오는 솔바람 솔내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일행과 함께 달콤한 모주로 목을 축인다. 857봉에 올라서니 암벽등반(R.C) 연습장이 있는 절골의 장대한 화강암 봉우리들이 눈앞에 다가온다.
12시 37분 헬기장 아래에서 이정표를 만난다. 능선에서 아래로 50분 정도 내려가면 조령샘을 지나 이화령에 닿게 되고, 20분만 더 오르면 조령산 정상에 서게 된다 하니 다시 힘이 솟구친다. 이 구간은 암릉도 없는 흙길이라서 떡갈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들과 가녀린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헬기장 떡갈나무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걸림이 없는 마음․삶을 생각한다. 잣나무숲을 지나니, 정상에 다가갈수록 나무들의 키는 작아지고 풀들이 바람에 몸을 누인다. 문득 조령을 원래 ‘초재’라 불렀다는 기록이 연상된다.
12시 50분. 조령산 정상(1026m)에 도달했다. 2시간 30~3시간 걸리는 구간을 중간팀은 2시간 50분에 오른 셈이다. 기념사진을 찍은 후 산마루에서 함께 점심 식사를 한다.
지현옥과 조지 맬러리
“새도 쉬어가는 鳥嶺山” 조령산 정상을 표시하는 표지석을 문경시에서 2013년 5월에 세웠다. 국어학적으로 보면, 조령산의 의미는 달라진다. <동국여지승람> 문경현 산천조에 이곳은 속칭 초재(草岾)라 기록되어 있다. 초(草)는 억새 등을 말하는 ‘새’이고, 재(岾)는 동국 한자로서 ‘재’ 또는 ‘점’으로 읽으니, 새재는 억새 무성한 높은 고개를 뜻하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산이 억새가 두드러진 산도 아니고,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높은 고개이므로 새조차 넘기 힘든 고개(산)로 불리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정상 표지석 옆에 문경읍을 바라보고 선, 나무로 된 추모비가 있어 눈길을 끈다.
山岳人 지현옥 “들꽃처럼 산들 산들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영원한 자연의 품으로 떠난 지현옥 선배를 기리며……” (2012. 4. 29 서원대학교산악부 백두산악회)
세상을 떠난, 고(故) 지현옥, 박영석, 고미영 대장을 생각하며 잠시 마음을 모은다. 월간 <山> 2009년 6월호(창간 40주년 기념 특집호)에는 2009년 5월 21일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한국루트)를 개척한 박영석 대장의 표지사진, 한국의 대표적 8,000 거봉 등반가 5인(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오은선, 고미영)이 함께 활짝 웃으며 창간 40주년을 축하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안타깝게도 오은선과 히말라야 완등 경쟁을 하던, 고미영 대장이 7월 11일 히말라야 낭가파르팟(8,125) 등정 후 하산길에 추락해, 월간 <山> 2009. 8월호는 ‘고미영추모특집’으로 꾸며지게 된다. “포기란? 배추 셀 때만 필요한 말이에요.”라며 활짝 웃고 있다. 그 후, 박영석 대장도 2011년 10월 18일 안나푸르나(8,091m) 남벽 신루트 개척에 나섰다가 실종되었다.
지현옥(1959~1999). 창간 40주년을 기념하여, 월간 <山>이 선정한 한국의 대표 산악인 40인(1명은 비워 39인을 선정함)에 뽑인 인물이다. 39명 중 여성은 5명(지현옥, 오은선, 고미영, 김영미, 이명희)이 선정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지현옥 대장만 고인이었다.
지현옥 대장은 한국 여성 산악계의 개척자였다. 그녀는 1993년 북미 매킨리 한국 여성 최초 등정, 1993년 에베레스트 한국여성 최초 등정(원정대장), 1997~8년 가셔브룸 1봉(원정대장), 2봉 한국여성 최초 등정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1999년 4월 말 안나푸르나 등정 후 하산 도중 실종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에베레스트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시험무대였다. 온몸을 갈기갈기 찢을 것 같던 육체적 고통을 첫 원정에서 체험했다면 에베레스트는 넘을 수 없는 사회적 편견을 넘어가야만 했다.”
지현옥을 생각하며, 영국 출신 산악인 조지 맬러리(1886~1924년)를 떠올리게 된다. 하버드 대학 강연 중, ‘왜 산에 오르느냐?’는 물음에 그는 ‘거기 산이 있으니까’라는 유명한 답변을 남긴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53년 5월29일, 뉴질랜드 출신 에드문드 힐러리(1919~2008년)와 네팔 세르파 텐징 노르가이(1914~1986년)가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라고. 하지만, 어쩌면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이는 조지 맬러리일지도 모른다. 맬러리는 1924년 영국 히말라야 원정대에 참가해 정상 근처에서 실종됐다. 이후 75년이 지난 1999년 정상 아래 200m 지점에서 그의 시신은 발견됐지만, 그가 정상을 밟았는지 여부는 지금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다.
조지 맬러리의 흔적을 추적하는 산악만화 ‘신들의 봉우리’(홍구희 옮김, 애니북스 펴냄)가 국내에서도 출간된 바 있다. 일본 소설가 유메마쿠라 바쿠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다니구치 지로가 그려낸 만화이다.
“무엇 때문에 오르는 걸까? 왜 나는 위로 가려는 걸까? (……) 찾을 수가 없다. 산에는 어떤 것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내 안에 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내면에 잠들어 있는 광맥을 찾으러 가는 행위와 같을 것이다. 꼭대기를 지향한다는 그 행위야말로 해답인지 모른다.” (4권 209~210쪽)
허기진 새가 하늘을 난다. 새는 하늘에 있어야 비로소 새가 된다. 솟대가 그러하듯이, 지상의 울음이 다한 곳에서 새는 하늘을 향하게 된다. 날개를 지녔다는 것, 그것은 추락을 전제로 하기에 비상과 추락은 새의 숙명이다. 새는 내려앉기 위해 날아오르고, 날아오르기 위해 내려 앉는다. 닭의 퇴화된 날개에서 서글픔을 느끼듯, 하늘을 잊은 인간 또한 나를 슬프게 한다.
왜 나는 산에 오르는가, 그것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통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서양인들은 자연(nature)을 인공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지만, 동양인에게 산, 혹은 자연은 신의 또 다른 이름, 도(道), 하늘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동화의 대상, 물아일체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산과의 만남, 삶과의 대화
1시 20분. 정상에서 식사를 마치고 신선암봉(939m)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 약 5분쯤 내려가니 전망점이 나타난다. 정상 부근에서 백두대간의 준봉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소인 듯했다. 왼쪽으로 시선을 주니, 가까이 우리가 가야 할 신선암봉(937m)이 있고, 그 너머에 신선봉(967m), 신선봉 옆으로 마역봉(925m)이 조령 제 3관문을 향해 잦아들며 이어지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가까이 928봉이 보이고, 저 멀리 월악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조령산 정동 방향에 문경의 진산이라 할 수 있는 주흘산(主屹山) 영봉(1106m)과 주봉(1079m)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조령산 정상에서 신선암봉에 이르는 구간을 0.8km 내려오면 상암사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곳 상암사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2.4km를 가면 문경새재 마당바위가 나온다. 절골갈림길에서 신선암봉은 오르막으로 약 45분, 신풍리 절골은 내리막길 40분이 소요된다. 후미팀들은 대부분 상암사 갈림길로 하산한 듯하다.
2시 10분 밧줄을 잡고 위태로워 보이는 칼바위 낭떠러지 구간을 통과한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퍼플’님 의 긴 머리가 말갈기처럼 흩날린다. 우리가 걸어왔던 촛대바위 능선을 돌아본다. ‘참말로 징헌 세상을 다 살었어야.’ 어머님의 음성이 문득 들리는 듯하다.
2시 20분 신선암봉(神仙巖峯)에 도착했다. 비가 올 듯, 주흘산 주봉(主峰 1079m), 영봉(靈峰 1108m)이 구름에 잠겼지만, 부봉(釜峰, 921m)의 6개 봉우리 암릉, 부봉에서 마역봉(마패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장대한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한양을 등진 채 토라져 돌아앉은 문경미녀 ‘주흘산’과 수인사한 후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한다.
공기돌바위를 앞에 두고 마지막 암벽 하강을 한다. 공기돌 바위 옆에 있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3시 20분. 신선암봉에서 40여분을 내려와, 너럭바위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며 배낭에 남아 있는 비장의 막걸리를 꺼내어 나누어 마신다. 이제는 위태롭게 암벽을 오를 일이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다. 이 구간은 등산로를 정비하기 위해 최근에 작은 나무들을 베어낸 흔적이 많았다.
산행을 정리할 겸, 일행의 가장 뒤에서 하산하기로 했다. 조선 소나무 숲을 내려오는데, 솔바람에 실려 오는 풍경소리가 들린다. 청암사로 절 이름을 바꾼 천선암(중암, 中庵)이었다. 일행은 이곳을 들르지 않고 마을로 내려간 듯한데, 등산로를 벗어나 절로 내려가기로 했다. 법당에 신발은 놓여 있으나, 수행 중인지 수행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느티나무 한 그루만 절을 지키고 있을 뿐, 아무도 없는 듯하다. 용화전에 미륵부처를 모신 듯하나 내부를 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린다. 간간이 떡갈나무 잎새에 빗방울이 듣는다.
3시 50분. 산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갈림길에 도달했다. 이정표에는 이곳에서 신선암봉을 오르는데 100분, 촛대바위까지 90분이 소요된다고 안내하고 있다. 에바다기도원 입구에서 다시 한 번 조령산을 뒤돌아본다. ‘사철나무’ ‘하늘빛’님도 하산 중이다. 하산시간 4시에 맞추어 신풍교에 도착했다.
절로 가는 절
저녁 식사 겸 하산주를 준비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산행을 마쳤지만, 이상하게도 허전한 느낌이 든다. 무엇을 빠뜨린 듯해서, 신풍교 다리 아래서 세수를 하고 도로 이정표를 보았다. 300m 앞에서 길은 조령관문과 문경새재, 수안보로 나뉜다고 안내하고 있다. 그리고 지방도 한켠에 새재 자전거길이 나 있다. 애마 비앙키를 데리고 온 것은 아니지만, 자전거길을 따라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신경림 시인의 시 ‘새재’를 생각해 보며, 옥수수밭 너머로 보이는 조령산을 바라보고 싶었다. 무엇에 이끌린 듯 500여 미터를 걸으니, 마애 미륵불군을 소개하는 사진이 나타난다.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아 집결지에서 자꾸만 멀어지는데도 조령관문을 향해 발걸음을 빨리 해 걸었다.
이윽고 미륵불 참배용 양초를 파는 무인 가게가 나타난다. 하지만 마애미륵불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또 길을 따라 가니 원풍리마애불상군(보물 제97호)를 알리는 표지판이 길 오른쪽에 있고, 도로 가까이 소나무 뒤에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마애불좌상 2기가 암벽에 새겨 있었다. 사전에 자료를 찾지 않은 상태에서 문화재를 우연히 접하고 보니 놀라웠다. 바래봉 산행에서 마애불상군을 접하지 못한 아쉬움을 조금 달랠 수 있었다.
마애불은 높이가 12m나 되는 큰 입석을 우묵하게 파고, 두 불상을 나란히 배치했다. 둥근 입술, 가늘고 긴 눈, 넙적한 입 얼굴 전면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엄숙한 듯하면서도 자비로운 모습을 띠고 있었다. 가슴 등 신체 표현은 몸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옷주름의 선도 무디게 표현되어 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뜻하는 광배에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는데, 세부 모습은 닳아서 사진 상으로도 잘 인식할 수 없다.
두 불상을 조각한 사례는 죽령마애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묘법연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와 석가여래의 설화를 반영한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다보탑과 석가탑에서 보여주듯, 석가모니가 영산도량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실 때 땅 속에서 다보여래의 탑이 솟아나 석가여래의 설법이 진실임을 증명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 어른께 물으니, 절골에는 상암과 중암이 있었으나, 상암은 한국전쟁 중 폐허가 되어 현재는 중암만 남았다 한다. 가까이 보이는 약사도량 신선암에 대해 물으니 유서깊은 절은 아니라 한다. 내친 김에 발걸음을 재촉해 신선암에 들르기로 했다. 다행히 이제야 하산하는 ‘비타민’님을 만나게 되었다. 휴대폰을 두고 왔지만, 일행들이 내 행적을 알 수 있을 듯하여 마음이 놓였다.
법당의 마당에 풀이 무성하고 대웅전과 약사전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대웅전 둘레에 그려진 달마도 벽화, 절 입구에 세운 솟대가 인상적이었다. 솟대의 기러기는 무겁게 내려앉은 흐린 하늘을 우러르며 비상을 꿈꾸고 있었다.
비가 내릴 듯 날이 어두워진다. 버스 속에서 상념에 잠긴다. 삶의 전망은 여전히 어두운데, 날아오르는 솟대의 기러기. 권력의 힘에는 초연했으나,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숭산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수도를 했던 보리 달마(達磨), 구도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 팔을 잘라 달마에게 바쳤던 혜가(慧可). 조령산 산길과 암벽에서 길을 찾고 삶을 생각했던 산우회 회원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새들이 떠난 숲처럼 적막하다. 인간에 의해 망가진 자연에서 새들이 더 이상 노래하지 않듯이, 인간 본연의 성품이 망가진 인간의 숲 또한 고적하고 삭막하다. 맑은 영혼을 지닌 인간들이 숲을 이루어야 새들이 다시 깃들고 노래한다. 숲에서 정화된 우리들이 세상의 길 가에 한 그루 나무가 되고 함께 숲을 이루어, 상처 입은 새들이 인간의 숲에서 치유를 받고 함께 노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맸는데, 돌아와 보니 봄은 매화가지에 이미 무르익었다’는 게송을 남긴 선사의 깨달음처럼, 인생의 지혜는 낮고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떠나지 않고, 찾지 않고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 법. 한 번 쯤 ‘아스팔트 위의 삶’에서 벗어나야 마음의 눈이 맑아져 꽃도 보이고 새노래도 들리리라.
글을 쓰다 보니 새날이 밝아온다. 2013년 6월 14일.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고갱전(6. 14~9.29)이 열리는 날이다. ‘고갱 그리고 그 이후(GAUGUIN and after)’라는 주제로 ‘신화로의 여행’을 하게 된다. 고갱의 대표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앞에 마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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