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소씨는 주로 진주와 하동을 근거지로 했는데 고려말 왜구의 침입을 피해 진위현으로 이주하였고 조수연이 부락산 일대에 세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덕암산 일대 우곡, 도일동, 칠괴동, 동삭동 등을 고려말 활약하고 전사한 장군이 있어 사패지로 받았는데 고려말 조선 중기까지 송탄 최고의 명문가였다.
최고의 명문가인 진주 소씨가 우곡에서 사라지게 된 이유가 궁금해서 직접 방문도 하고 자료를 찾아보았다.
진주 소씨 묘역과 蘇怡의 묘- 司直 직책이 보인다
조선왕조실록과 平澤市史, 지역신문 등에 진주 소씨에 대한 글들이 있어 이를 토대로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진주 소씨가 우곡이나 도일동, 칠괴동 등에서 명문가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지금 송탄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는 수성 최씨, 원주 원씨, 청주 한씨 등이 모두 진주 소씨와 연관되어 있다.
이들은 송탄에 입향하게 된 것이 모두 진주 소씨와 결혼으로 관련이 있는데 최유림으로 유명한 수성 최씨는 최경이, 원균으로 유명한 원주 원씨는 원몽이 그렇다고 한다.
진주 소씨 묘역 인근에 최유림 장군 묘가 있는데 배우자가 진산 소씨로 소이(蘇怡)의 사위라고 최유림 신도비석에 기록이 있다. ※진산 소씨는 진주 소씨의 다른 이름
이렇듯 명문가였던 진주 소씨가 우곡 등 일대에서 멸문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영조 때 있었던 이인좌의 난이 직접적 원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22권 기록에 의하면 진위의 소씨 가문 소성(蘇晟)·소면(蘇冕)·소정(蘇鼎) 등이 노적(孥籍) 당한 기록이 있다.
노적이란 모역, 반역 등의 중죄에 대해 죄인은 극형에 처하고, 그 처자도 연좌시켜 노비의 적에 올리고 재산은 몰수하는 처벌을 말한다
반군과의 전투가 안성에서 심했고 진위 땅에 관군 오명항이 있으면서 전투 계획을 세웠다고 하니 진주 소씨 가문이 직접 가담하여 난이 실패하면서 멸문당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인좌의 난은 조선시대 당쟁이 원인이 된 것으로 서인이 남인을 몰아내고(경신환국 1680년) 이후 서인이 분열하여 소론고 노론이 대립하고 노론이 강력 지지했던 영조가 왕이 되자 소론의 일부가 이에 반발하여 전국적으로 계획하여 일으킨 난이다.
이인좌의 난 이후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각 당파에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던 정책이 탕평책(蕩平策)이다
소씨 묘역 위쪽에서 바라 보면 바로 건너편으로 좌측에 최유림 장군 묘역이 있고 멀리 송북동 여기저기 보인다
최유림 장군의 부인 진산 소씨는 蘇怡의 여식이라 했으니 소이는 정경부인이 된 여식의 묘를 200미터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는 형국이다.
최유림의 신도비에 배위 晉山蘇氏가 시직을 지낸 怡의 여식이라고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