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속 안동 마을 : 길림성 연길시 천교령 태양촌(2015.6.23)
일제 강점기
경북 안동, 문경, 의성의
우리 조상분들께서
남의 나라 빼앗아
주인질하는
못된 일본 놈 세상이 된
조선 땅에서 살 수 없어서
내 나라를 되찾겠다며
독립 운동했다는 이유로
모진 핍박과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며
더 큰 독립 운동을 위해
눈물 뿌리며
정든 고향을 떠나
다시 오마
고향산천아
조국 광복이 되면
다시 찾아오리라
눈물을 뿌리며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이역만리 땅으로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 옮겨
황량한 만주 벌판
작은 골짜기에 터를 잡으셨지요.
정착한 첫 해는
토굴을 파서
추위와 맹수와
굶주림을 이겨내셨습니다.
그 겨울은
몹시도 길고 추우셨답니다.
그 긴 겨울 지나
해동이 되자
땅을 일구어
경작을 시작하셨지요.
그렇게 집성촌을 이루어
몇 백 세대가
다정스레 사셨습니다.
낯선 나라에서
나라 잃은
이민족의 설움도 많으셨지요.
그래도
살아나야 하기에
그 많은
수모와 아픔을 견뎌내셨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우리 아픈 역사와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며
한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하셨습니다.
명절에는 색동옷 차려 입고
성묘하고 세배하며
경북 안동의 토속 음식인
안동 식혜도 만들어 드셨습니다.
그렇게 힘겹게 떠나셨건만
다시 오마 했던
고국 땅을 영영 밟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신 분들이 대부분이십니다.
2005년
2016년
두 번
그곳을 다녀온 적 있습니다.
중국 속 안동 마을 태양촌은
우리 민족의 시대적 통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 사진입니다.
안동 마을 태양촌에서
안동 태생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었습니다.
안동 지방에서만 맛볼 수 있는
안동 식혜도 만들어 드신답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 한국에 가보셨어요?]
[아니, 아주 어렸을 때 엄마 등에 업혀온 이후 한 번도 가보질 못했지]
아이들이 그 할머니들 손을 붙잡고 펑펑 웁니다.
할머니도 아이들도 그렇고 울었습니다.
그 기억을
아이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아프고 슬픈
우리 역사를 가슴에 담았습니다.
...............................................................
중국 연변 안동마을 인심에 두손 다 들었다(글/안병렬) |
북쪽에 사는 오랑캐의 말은 북풍에 의지하고 남쪽에 사는 월나라의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튼다.(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고 하였던가? 이 이역만리 중국 연변 땅에 안동 사람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다는 말에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어디라던가 전라도 무주 사람만이 사는 곳이 있어 무주 군수가 찾아가고 하였다는 이야기는 듣고 또 훈춘시의 정암촌이라는 곳에 충북 청주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중국 땅에 안동 사람이 모여 산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비록 안동에서는 늘 이방인의 대접을 받고 있어 불만을 토하고 때론 대놓고 욕도 하지만 그래도 안동에서 20년 가까이 살아오는 동안에 나름대로 정이 들었기에 일단 "안동"이란 말만 나와도 귀를 쫑긋하기 마련이요 혹 안 좋은 말이라도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변호하느라 야단을 하는 터이다. 그런데 이곳 이 이역에서 안동 사람이 모여 산다니 어찌 흥분되지 않으랴? 며칠 전이던가. 5년전 이곳에 와서 병원에서 간호과장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이선생을 우연히 만났더니 여기서 약 3시간 거리에 안동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있다는데 가보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내가 어찌 그 말을 놓치랴? 곧 가자고 하니 이번주는 심장병 수술이 있어 몸빼기가 곤란하고 다음주 토요일에 가자며 안내자에게 연락해 보겠다고 하였다. 당장 가고픈 마음이라 안내자가 없어도 길만 물어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니 시골길이라 안내자가 없으면 안 된단다. 나는 전에 자주 이용하였던 택시기사 박군에게 전화를 하여 당일 택시를 대절하기로 약속을 하고서 그 다음주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그 토요일이 되기 며칠 전 이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안내자 아주머니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도저히 못 가겠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호사다마인가? 이를 어쩌나? 게다가 갑자기 날씨마저 추워졌다. 호기심에 함께 가려고 했던 내자는 이 다음 날씨가 좀 풀리면 가자고 사정을 하였다. 몸이 약한 내자는 이 날씨에는 도저히 나설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들뜬 마음은 도저히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더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나는 주소만 물어서 찾아가자고 이선생을 졸랐다. 이에 이선생은 그 아주머니에게 간곡히 부탁을 하여 왕청현임업국에 다닌다는 사람을 소개받았다. 왕청현은 연변조선족 자치주에 속한 하나의 현이다. 현(縣)이란 한국의 군(郡)과 같이 시(市)와 동급의 행정단위이긴 하나 인구나 기타 규모가 시보다 작은 곳으로 대개 산골 농촌지방에 많다. 연변에는 안도와 왕청만이 시가 못 되고 현으로 있다. 가려고 하는 그곳은 연길에서 세 시간이 넘게 더 걸린다고 하고 왕청이 연길서 두 시간 가까이 걸리므로 왕청에서도 한 시간이 넘게 떨어져 있는 산골임이 틀림없었다. 산골이라니 더 가고 싶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일행은 나와 이선생, 그리고 내자 세 사람이었다. 내자는 아픈 몸을 무릅쓰고 따라나섰다. 하루 종일 빈방에 따분하게 갇혀 지내는데 지쳐서 어디든 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내자 역시 구미가 당기는 곳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내자는 며칠 전부터 준비한다고 야단이었다. 간단한 점심에 과일 몇 가지이지만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다며 꽤 신경을 썼다. 당일엔 새벽 2시에 일어났다나. 마치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날뛰었다. 안동사람들이 사는 왕청현 동신향 태양촌 아침 6시 40분, 택시는 약속대로 정확히 도착해 있었다. 날씨는 좀 쌀쌀하기는 하였으나 예상보다는 덜 추웠다. 약속대로 이선생 댁으로 가 태웠다. 이선생은 얼마나 옷을 많이 껴입었는지 몸이 둔해 보일 지경이었다. 7시 정각, 연길을 출발하였다. 왕청은 도문 쪽으로 가다가 외편으로 갈리어 간다. 전에 경박호 가는길에 그 옆으로 지나쳐 갔으므로 대강의 방향은 알았다. 길은 포장이 잘되어 있었다. 차는 경쾌하게 잘 달렸다. 한 시간 반을 더 달려 왕청현임업국에 다니는 안내자 연청장을 만날 수 있었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았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그의 인도로 그 마을을 향해 나섰다. 길은 물론 비포장이었다. 천교령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오르막길이 꽤 높았다. 길가의 산들이 문자 그대로 한산(寒山)이었다. 소나무 한 그루 없이 잡목뿐이었다. 두목(杜牧)의 시가 떠올랐다. 遠上寒山石徑斜 멀리 쓸쓸한 산 돌길을 비스듬히 오르니 白雲深處有人家 흰 구름 깊은 곳에 인가가 있구나. 停車坐愛楓林晩 수레 멈추고 그대로 늦단풍 든 수풀을 보노라니 霜葉紅於二月花 서리맞은 잎이 이월의 꽃보다 더 붉더라. 비록 단풍철은 지났으나 "원상한산석경사 백운심처유인가"라는 첫 연을 그대로 그려놓은 듯하였다. 두만강 연안과는 달리 내륙으로 들어와서인지 이곳은 소나무가 드물었다. 잎 떨어진 잡목들이 패잔병들처럼 앙상히 늘어서 있고 그 사이사이에 허연 플라타너스가 보초병처럼 일렬로 서 있어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그 위로 흰구름이 둥실둥실 무심히 떠 있었다. 그 너머로 인가가 있을 것 같았다. 가까이만 그런 게 아니었다. 멀리도 그러했다. 쓸쓸함, 그것이었다. 그러나 단풍철에는 정말 "정거좌애" 할만한 경치가 펼쳐지지 않을까? 그러나 시인 두목이 단풍 든 산을 한산(寒山)이라고 하였으니 이 삭막한 산은 냉산(冷山)이라 하였을까? 그 단풍 든 장면을 이 냉산과 비교해 상상하며 산을 넘고 들을 지났다. 30분을 좀 지나 달렸더니 큰 동네가 나타났다. 요령 시멘트 공장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공기가 좋지 않은 듯하였다. 동네가 모두 먼지에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집집마다 적막,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닭 몇 마리가 마당에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잘못 보았던가? 그 닭들도 먼지를 뒤집어쓴 듯 하였다. 그 마을을 지나 얼마를 더 가니 좀더 큰 마을이 나왔다. 천교령이란다. 천교령(天橋嶺), 하늘 다리의 고개. 그러나 여기는 평지가 아닌가? 다리도 고개도 없었다. 거기서 차는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섰다. 조그만 다리를 건넜다. 얼른 보니 천교령대교(天橋嶺大橋)라 쓰이어 있었다. 조그만 다리를 대교라 함도 우스웠고 하늘 다리와 큰 다리가 겹침도 재미있었다. 이 다리를 건너서는 계속 강을 따라 올라갔다. 가야강이냐고 하니 그렇단다. 지류여서인지 수량은 얼마 되지 않아 개천 같았다. 한참을 가니 또 작은 마을이 나왔다. 동신이라고 하였다. 동신향의 소재지라 하나 조그만 시골 마을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가는 마을도 동신향이란다. 행정구역상으로 정확히 왕청현 동신향 태양촌이라고 하였다. 이역에서의 고단한 삶의 여정 조금 더 달려 그 마을에 닿았다. 그런데 안내자인 연청장은 그 마을에 닿아서는 깜박 길을 잘못 든 듯 차를 돌리라 하더니 다시 그만 그냥 가잔다. 몇 미터 더 가서 오른쪽으로 차를 몰아 들어가도록 하여서는 어느 집 앞에 멈추게 하였다. 처음 가려던 집은 아니나 이 집에 가도 괜찮다는 표정이었다. 마당에 들어서 두리번거리는데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나오더니 어서 오라며 반긴다. 그런데 그 말씨가 연변의 말씨가 아니고 경상도 말씨라 너무도 반가웠다. 거친 듯한 인상을 주는 함경도 말씨만 늘 듣다가 귀에 익은 경상도 말씨를 들으니 고향에 온 듯 푸근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방은 아주 따뜻하여 좋았다. 아직 연길에서는 스팀이 들어오지 않아 벌벌 떠는데 방이 뜨뜻하니 마음마저 느긋해졌다. 방은 중간에 미닫이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리는 방에 들어가 다리를 죽 뻗었다. 온 몸이 노곤해져 곧 누워 한숨 잤으면 하였다. 운전기사 박군은 건너방으로 들어가더니 곧 누워버렸다. 험한 길에 장시간 운전하느라 피곤하였으리라. 그 집에는 할머니와 아들 부부, 그리고 손자 하나, 모두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아들은 약 40세가 가까워 보였다. 안내자인 연청장이 할머니를 가리키며 자기 처의 외숙모라고 우리에게 소개해주었다. 나는 "한국 안동에서 온 사람인데 안동분들이 산다기에 반가워 무턱대고 찾아왔습니다" 하고 우리를 소개하였다. 할머니는 아주 깔끔하게 생긴 분이요, 자부는 뚱뚱하게 생긴 농촌의 전형적인 아주머니였다. 고부가 잘 오셨다고 반겨주었다. 뜻밖에 방은 너무도 깨끗하고 가구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연변의 농촌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하도 신기하여 "세간을 보니 이 집은 아주 부자인 모양입니다" 하니 그렇지 않단다. 그저 중간 정도라고 하였다. 궁금하여 농사를 얼마나 하느냐고 하니 논 10무, 밭 7무쯤 된다고 하였다. 한 무는 1천평방미터이니 한국식으로 계산하면 대강 논이 3천300평이요 밭이 약 2천300평이다. 적은 농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중간이라고 하니 잘사는 집은 더 많은 논밭을 가진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동네가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어 부촌 같았다. 대체적으로 조선족 마을이 다 찌그러지는 초가에 궁색한 면이 곧 보이는데 이 마을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초가가 하나도 없고 모두가 다 넉넉해 보이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어디서 오셨느냐고 하니 문경서 왔다고 하였다. 응당 안동에서 왔다고 할 줄 알았다가 좀 실망을 하였다. 성씨를 물으니 황씨라고 하였다. 그러나 곧 시댁은 안동이고 성은 하씨라고 하였다. 나는 친정과 시댁을 분간도 하지 않고 물었는데 할머니는 이를 분명히 밝혀 친정은 문경이요 황씨이고, 시댁은 안동이요 하씨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주 사리가 분명한 분이셨다. 반가워 안동 어디냐고 하니 서후라고 하였다. 나는 전에 서후면 어느 마을인가에 사육신의 한 분인 하위지의 자손들이 산다는 말을 들은 듯하여 반가웠다. 할머니는 이 동네의 내력을 잘 아는 노인들이 올 봄에 세 사람이나 죽어 이제 아는 사람이 없어 안 됐다며 좀 일찍 오시지 않았냐고 안타까워하였다. 이야기하는 사이에 아들은 안동분을 찾는다고 나가더니 할머니 두 분을 모시고 왔다. 한 분은 큰어머니요 다른 한 분은 큰어머니와 동갑인 이웃 노인이라고 하였다. 큰어머니란 노인은 이가 다 빠져 앞니 두 개만 남아 있었다. 두 노인이 다 하도 호호백발에 많이 늙어 연세가 얼마냐고 하니 73살로 둘이 동갑이라고 하였다. 나이에 비해 너무 늙어 있었다. 그 얼굴에 그 찌들린 삶이 그려져 있는 듯하여 가슴이 답답하였다. 정말 그 주름마다에 억울함과 설움과 슬픔과 배고픔과 추위 등 고달팠던 이역에서의 삶의 여정이 다 한(恨)으로 응축되어 스며 있는 듯하여 보기가 민망하였다. 우리는 가져간 과일이랑 과자들을 내어놓았다. 이 선생도 이것저것 많이 가져왔다. 노인들은 포도를 즐겨 먹는 듯하였다. 어디서 오셨느냐고 하니 이가 빠진 노인은 풍산면 소산이라고 하였다. 그럼 안동 김씨냐고 하니 삼척 김씨라고 한다. 소산이라면 으레 안동 김씨라 여겼다가 의외의 대답에 놀라 소산에도 삼척 김씨가 있느냐고 하니 그렇단다. 아무래도 이상하여 다시 확인하고자 언제 이리로 오셨느냐고 하니 열 한살에 왔다고 하며 풍산서 조금 떨어진 소산마을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죽기 전에 한번 가보았으면 하였다. 그 말이 내 가슴을 찔렀다. 11세라니 엔간한 것은 다 기억하리라. 그 기억 때문에 더 향수에 젖어 괴로울 것이었다. 이 노인의 기억이 이처럼 확실하니 소산에도 삼척 김씨가 살았던 모양이었다. 또 한 노인은 더 늙어 있었는데 길안면 명기동이라고 하였다. 몇 살에 오셨느냐고 하니 역시 11살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 노인의 기억도 확실한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명기동의 위치를 몰라 물으니 대답을 못하였다. 정신마저 아주 희미하였다. 이 두 노인들의 이야기가 답답하였던지 아들은 또 나가더니 할아버지 한 분을 모시고 왔다. 인민복 차림의 기골이 장대한 분이셨다. 어디서 오셨느냐고 하니 길안면 명기동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안 노인을 가리키며 자기 누님이라고 하였다. 성씨를 물으니 처음에는 김해 김씨라 하더니 나중에는 의성 김씨라 하였다. 그러다 세 살에 와서 잘 모른다고 하였다. 그래도 어른들께 성은 바로 들었을 것이 아니냐고 하니 자기는 세 살에 와서 잘 모르지만 의성 김씨가 맞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누님이라는 노인의 동의를 구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니 그 노인도 고개를 끄덕인다. 김해 김씨는 비교적 잘 알려진 성씨요 의성 김씨는 덜 알려진 성씨인데도 이를 기억하는 걸 보아서 의성 김씨가 맞지 않을까 싶었다. 또 이 마을에 의성 김씨가 5, 6호 있다는 걸로 보아 함께 온 의성 김씨가 맞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명문의 후예들이 어쩌다 이 이역만리에까지 흘러들어와서 이렇게 자기 성씨마저 아리숭하게 되었는지 생각하니 처량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하니 의성 김씨가 여러 집 있기에 자기도 따라서 의성 김씨로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곳 분들 가운데는, 심지어 대학 교수 가운데도 자기의 본관을 잘 모르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분이 더러 있는 것이다. 일제의 개간사업으로 집단이주 시켜 나는 화제를 바꾸어 동네에 대해 물어보았다.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이 마을이 번성할 때는 180호나 되었는데 지금은 80여호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두 안동, 예천, 문경, 상주 등의 사람만 산다고 하였다. 그 가운데도 안동 사람이 절반쯤 된다고 하였다. 물론 한족(漢族)은 한 집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한족은 아예 발을 못 붙이게 한다고 하면서 자랑스러이 얘기하였다. 어떻게 이렇게 오시게 되었느냐고 하니 일본 사람들이 몽땅 데리고 왔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남만(南滿)으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여기를 개간하러 일본 사람들이 이리로 데리고 왔다고 하였다. 얘기하는 걸로 보아 1930년대 후반 일제가 이곳을 개척하면서 한 지방 사람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킨 듯하였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후 다른 부락은 더러 흩어지고 새로 들어오고 하였지만 이 마을은 나간 사람만 많고 들어온 사람은 적었던 모양이었다. 아직 한국에 돈벌러 나간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는다고 하는 걸 보아서 이 마을의 보수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마을은 산에 둘러싸여 있긴 하여도 앞에 강이 흐르고 들도 제법 넓어 살기에 좋은 곳 같았다. 그러므로 자족(自足)함을 알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았던가 보다. 이렇게 돈을 받으면 우리가 어디 동포입니까?" 차츰 이야기는 한국으로 옮겨졌다. 이 집 할머니는 오빠가 한국에 있어 몇 해전에 나가 보았다며 이야기를 하는데 대체적으로 흉이 많았다. 첫째로 그 오빠가 전라도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여수에 사는데 올케가 전라도 사람이라 재미가 없더라는 것이다. 영 취미 없다는 투였다. 그 올케의 야박한 인심도 다 전라도 사람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전라도 사람이기에 그런 나쁜 마음을 가졌다는 투였다. 어쩌다가 이 영호남의 이질감은 이렇게도 깊이 박혔는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다음으로 이 할머니의 불만은 밥의 양이 적다는 것이었다. 이는 뭐 한 두 사람으로부터만 들은 말이 아니어서 놀랄 건 없지만 하여튼 이곳 사람들에게 한국의 밥은 너무 적은 양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는 이곳에서 이들이 먹는 양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저 우리의 곱을 먹는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공기에 살살 펴서 주는 밥이 이들의 배에 어찌 찰 수가 있겠는가. 할머니의 말은 크게 두 숟가락 뜨고 나니 없더라는 것이다. 모처럼 모국이라고 찾은 이 할머니에게 친척들은 인정도 물자도 넉넉하지를 못하였던 모양이다.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이 이 댁의 며느리는 뒤에서 똑딱똑딱 뭘 장만하고 있었다. 내자가 밥을 하는 줄 알고서 우리는 점심을 준비하여 왔으니 그만두라고 하여도 할머니가 남의 집에 와서 밥을 안 먹으면 어쩌느냐고 하면서 우리 밥이 햅쌀밥으로 좋으니 자시고 가져온 밥은 가져가시면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사람 집에 오시면서 어찌 밥을 가지고 오느냐고 나무랐다. 밥 자시고 며칠 푹 쉬다 가라고도 하였다. 참 후한 인심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며느님은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점심을 준비하였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우리를 안내하였던 분이 안보이더니 한참만에 돌아왔다. 그러니까 이 며느님이 뭐라고 하는데 아마 이 분이 처음 자기가 가려던 집에 가서 점심을 시킨 모양이라 이를 나무라는 눈치였다. 이를 알았던지 이 집 할머니가 거기서도 같이 이리로 와서 먹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타작이 끝나지 않았다며 오지 않았다. 나는 이 인심을 보며 아직도 순수한 분들이 살고 있구나 하는 흐뭇함을 느끼었다. 우리 어릴 때 들은 이야기 -만주에서는 과객이라도 어느 집에 들어가면 한 해 삼동을 지나고 간다는- 가 기억나 가슴이 훈훈하였다. 나중에 내자에게 들은 말인데 그 며느리가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곧 나가서 돼지고기를 사가지고 오더라는 것이다. 아예 자기 집에 오신 손님에게는 밥을 대접한다는 생각이 박혀 있는 것이다. 이 인심이 길이길이 오래오래 고이고이 간직되면 얼마나 좋으랴. 이윽고 점심밥이 다 되었다. 햅쌀밥에 콩나물에 된장국에 정성스러이 차려졌다. 내자가 장만한 찹쌀밥도 불고기도 함께 내놓아 푸짐하게 상이 벌어졌다. 이 집의 손자와 친구들도 여럿 왔다. 또 이 며느리는 언제 나가 맥주와 소주 등 술을 준비해 왔다. 우리는 술을 못 먹는다고 사양을 하기가 참 딱하였다. 마침 이선생이 지혜롭게도 말을 잘하였다. '우리는 모두 예수 믿는 사람이다. 그래 술을 안한다. 할머니께서도 한국에 가보셔서 잘 알지만 한국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많지 않던가? 예수 믿는 사람은 밥 먹을 때 기도를 한다. 우리가 기도할테니 양해하라' 이렇게 말을 하고 나를 보고 교수님이 기도 인도하시라 하였다. 나는 엉겁결에 기도를 하였다. 먼저 우리가 이렇게 민족의 사랑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고 이 댁과 여기 모인 사람들, 그리고 이 마을에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은혜를 내려달라고 기도를 하였다. 너무 급히 하느라 굶주리고 있는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참 순진하신 분들이었다. 아마 이런 장면을 처음보는 분들도 있을 터인데 이 낯선 광경에도 전혀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아이들마저 웃거나 신기해하지도 않았다. 모두 진지하고 숙연한 분위기였다. 이 기도 덕분인지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았다. 모두들 둘러앉아 유쾌하게 얘기하며 점심을 먹는데 며느리는 뒤에서 수발을 하느라 바빴다. 암만 같이 와서 먹자 하여도 예, 예, 하고 대답만 할 뿐 뒤에서 무얼 챙기기만 한다. 참 무던한 분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며느리는 심장병이 있다고 고백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선생은 우리 병원이 심장병 전문병원인 줄 모르느냐며 꼭 한번 나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겉보기엔 아주 건강해 전혀 병을 가진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그녀의 친정 어머니도 심장병을 앓는다고 하였다. 이선생은 그러면 어머님도 모시고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서울에서 의사들이 와서 심장병 수술을 내일부터 하므로 바쁘니 15일 지나서 오라고 날짜까지 잡아 주었다. 며느리의 대답에 앞서 할머니가 먼저 그러마고 대답하였다. 고부간에 사이도 참 좋았다. 이 무던한 며느리의 뒷바라지 덕택에 모두들 가만 앉아 즐거이 밥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술 마시는 사람도 또 즐거이 술을 마셨다. 이 집 아들은 본인이 시인하듯 무척 술을 좋아하였다. 연방 잔을 비우며 연청장에게 권하였다. 할아버지도 안노인들도 몇 잔씩은 다 하였다. 그 마시는 모습들이 그렇게도 흐뭇하게 보였다. 점심을 먹다 맛있는 콩나물 이야기가 나왔다. 내자가 이런 콩을 좀 구할 수 없느냐 하니 할머니가 우리집에 많다고 하였다. 좀 사자며 내자가 약 50근, 그리고 이선생이 약 30근을 청하였다. 그렇게 많은 양이 필요치도 않은데 혹시 돈을 안 받을까 염려하여 많은 양을 주문하는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자 우리는 서둘러 일어섰다. 택시기사가 교대시간인 4시반 전에 들어가야 한다고 미리 독촉을 하였던 것이다. 모두들 섭섭해하였다. 우리도 섭섭하였다. 이다음 천천히 한번 와서 놀다 자고 가라고 하였다. 그때는 식혜도 해놓겠다고 하였다. "식혜", 이 말에 내자가 놀라 할머니가 식혜도 할 줄 아느냐고 하니 알지 왜 모르겠느냐 한다. 이 말에 나는 다시 한번 안동을 실감하였다. 식혜는 안동에서만 먹을 수 있는 안동 토박이 음식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감주를 식혜라고 하는데 안동분들이 말하는 식혜는 감주가 아니고 전혀 다른 안동 특유의 음식인 것이다. 무와 생강 등이 들어가고 맵고 시큼하여 감주처럼 단맛은 없으나 입을 콱 쏘는 듯한 그 나름의 독특한 맛에 먹을수록 당기는 음식인 것이다. 그 식혜란 말에 더욱 반가워 나와 내자는 정말 그러겠다고 대답하였다. 헛말이 아니라 꼭 한번 와서 밤을 새우며 놀다 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아들의 이름을 적고 그 큰댁에 있다는 전화번호도 적었다. 가방을 챙겨 일어서는데 할아버지가 넌지시 자기가 이 마을 노인회장이라며 이 다음 올 때는 자기를 찾으라 하였다. 그리고는 자기 이름이 김 아무개라고 하였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나 그러겠다고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오니 그 며느리와 이선생이 밀고 당기며 다투고 있었다. 이선생이 콩값이라며 100원을 주는데 이 아주머니가 안 받으려는 것이라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었다. 그 며느리는 마대 두 자루에다 콩을 담아 차에 실었는데 이선생이 그 값을 받으라니 안 받겠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다가가 받으시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안 받겠다고 달아난다. 그래도 따라가며 하도 받으라니까 정 그러면 반만 받겠다고 한다. 그러나 어디 잔돈이 있어야지. 그래 기어이 다 받으라고 하였다. 이때 아들이 나에게로 오더니 귀에다 대고 "선생님, 이렇게 돈을 받으면 우리가 어디 동포입니까?"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무안하였다. 그리고 콧날이 시큰하였다. 그래 곧 이선생에게 그만 그 돈 넣으시라고 하였다. 할 수 없이 이선생은 돈을 도로 집어넣었다. 인정을 인정으로 받지 못하고 꼭 돈으로 갚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자세가 참으로 부끄러웠다. 그렇다. 정을 돈으로 갚을 때 그 정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정은 계속적으로 확대되고 재생산되는 효능을 갖는 반면 돈은 그 즉시 청산을 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니 상대는 계속적인 확대, 재생산을 요구하는데 우리는 이로써 단절하고 청산을 원하였던 것이다. 이 얼마나 상대에 대한 큰 모독인가?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꼭 다시 한번 더 놀러 오너라", "꼭 병원에 오너라" 는 당부를 피차에 하며 헤어져 오후 1시 정각에 우리는 떠났다. 자꾸 뒤돌아 보이었다. 이역만리 떨어진 안동마을 인심 돌아오는 차에서 나는 곰곰 생각하였다. 이게 동족의 정이요 고향의 정이던가? 이게 정말 안동 사람의 본모습이던가? 안동분들이 이렇게도 정 있는 분들이던가? 늘 안동분들의 배타적 심성에 고까워하며 속으로는 나도 내 고향 경주가 자랑스러운데 당신들만 우쭐대느냐 하였는데 오늘만은 두 손을 들었다. 참 안동 사람을 본 것이다. 이 중국땅 연변의 한 모퉁이 산골에서 본래의 참 안동사람을 본 것이다. 그 참 안동사람 앞에 나는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리고 안동에 살면서도 안동의 본모습을 잃은 안동 사람들은 이곳에 오셔서 자신의 본 모습을 보고 가시라고, 그리하여 제발 그 고자세의 텃세를 좀 낮추시라고 권하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안동분들에게 - 하긴 일부의 사람이지만 - 좀 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단지 우거(寓居)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사람을 멸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안동에의 애정은 언제나 짝사랑이었다. 그들은 나를 용납해주지 않았다. 하긴 안동에서 3대를 살아도 안동사람이 되지 못한다는데 내 비록 처향이라 하더라도 겨우 20년 가까이 산 것만으로 어찌 감히 안동인인 체하랴? 언감생심 내 생각이 애초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안동분들 - 역시 일부이지만 - 에 대해 늘 좀 섭한 마음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오늘은 영 그게 아니다. 오늘은 정말 이 이역만리에서 안동의 덕을 톡톡히 보았으니 다시 한번 안동에 감사해야겠다. 그리고 안동의 참 모습을 나도 좀 적극적으로 배워야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집에 도착하니 오후 5시, 트렁크를 열어 짐을 내리는데 이게 어인 일인가? 콩이 너무도 무거웠다. 부탁한 것보다도 더 담은 것이다. 그런데 또 알고 보니 얻어온 게 콩 뿐이 아니라 된장에다 썩장에다 고춧가루도 있었으며 콩은 두 집 합쳐 100근이 넘을 거란다. 나는 아예 조금만 달라고 하여 조금 얻어올걸 하고 후회하였다. 아무리 정이라도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걸 어쩌랴? 이 다음 병원에 오면 그때 모셔다 잠이라도 따뜻이 재워 보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과연 그 아주머니가 그 먼 길을 무릅쓰고 거금을 쓸 각오를 하며 병원에 올 것인가 의문이었다. 안 오면 정말 한번 더 가서 콩값도 인정으로 갚고 또 오붓하게 하루밤쯤 즐기고 와야겠다고 다짐하였다. 눈을 감으니 이 중국땅 연변에서 그 안동 마을의 그 은근한 정이 가슴에 스며오는 듯하다. 아마 세월이 지날수록 더 진하게 스며오리라. 빨리 한번 더 가서 그 안동 사람의 품에서 푹 좀 쉬고 싶다. 그리하여 그 인심을 배우고 싶다. 그러면 내 가슴도 좀 훈훈해지리라. 좀 더 여리어지리라.<안동> 출처 : 안동사랑방(작고하신 안병렬 교수님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