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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避難>
난세의 몸살을 앓고 있는 이 땅이 애처롭다
허공에 부유하는 작은 별
경계 밖에서 나는 별이 되어 서 있다
우주 한 귀퉁이에 버려진 듯 쭉 뻗어 있는
요요한 꿈속 같은 한반도 북위 38도
눈물 그렁한 어머니가 여기 어디쯤
나의 거동을 젖은 눈으로 보고 계실까
다가올 수 없는 금기의 몸이 되어
들리지 않는 외침을
나를 향해 울부짖고 있지나 않을까
은하수는 푸른 물결 소리를 내며 가슴 저리게 흐른다
한반도 허리쯤에서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는 가난한 별들
남으로 남으로 가야 한다, 는 일념뿐이었다
체구가 건장한 상류 쪽에서 호근 아저씨 팔을
할아버지가 꼭 붙잡고 그 다음 형이 매달리고
나는 형의 왼팔에 매달려
다리가 물 위에 떠 발이 닿지 않았다
깊은 강도 무사히 건널 수 있기를 가슴 졸이는 어머니
슬픈 역사를 지닌 별은 임진강을 건너고 있다
불씨 같은 생명을 떠나보내는 어머니별
시간의 물굽이를 따라 안전하게 건너는 모습에
빤짝 한 번 빛을 발하고 허공에서 사라졌다
나는 어머니가 계시는 쪽으로 별이 되어 서 있다
<남은 돌 하나>
정전 후 휴전선 경계를 이룬 곳
국군과 인민군이 수없이 짓밟아 초토가 된 땅
묵은 돌 하나 발밑에서 집어 들었다
나고 자란 기억을 산기슭을 어림잡아
여기가 내 집터,
안채에 할아버지 할머니
건넛방에 아버지 새어머니
사랑방에 증조할아버지
행랑채에 돌금이 아재가
동네 청년들과 겨울이면 새끼를 꼬다 출출하면
닭서리로 재미를 붙이던 곳
안방에서 작은형의 시샘을 물리치고
나는 할머니 가슴에 손을 얹고 잠이 들곤 했다
집 앞 채마밭 밑에 개울가에서
복순이 누나 몽당 숟갈로 감자 깔 때
오순도순 초가집 굴뚝 무쇠솥 밥 짓는 연기
흐린 여름날에는
길고 뾰족한 주둥이, 붉은 깃털을 가진 비오새* 한 쌍이
돌배나무에서 단옷날 그네 터 밤나무로 날아가며
그 높고 청량한 소리로
또로로 또로로 온 동네 일기예보를 했다
지금은 남북으로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지만
이게 바로 계절마다 별미음식 정겹게 넘겨 주고받던
그 울타리
남은 돌 하나
내 고향 애환이 담긴 블랙박스다
가재 잡던 뒷골 도랑물
논으로 건너가는 기다란 홈통 외나무 봇도랑
마주 건너다보며 나뭇잎 흘려보내던 아이들 그림자
그리면 지워지고 그리면 또 지워지고
봄 여름, 모란꽃 함박꽃 향기 가득 품고
알알이 붉게 익은 앵두나무가 서 있던 우물가
지금은 폭염에 그을린 움푹 파인 방공호 자리
추억은 나를 아프도록 놓아주지 않고
한평생 끌고 다닌다
* 호반새
<어떤 해후>
세월은 가혹하게 흘렀다
70여 년 만에 만난 소꿉친구 그녀
검게 변한 얼굴 잔주름의 세월은
손에 지팡이까지 쥐여 주었다
군 초소에 신분증 맡기고 들어가
폐허가 된 집터를 찾아보았으나
어림짐작도 이젠 가늠하지 못한다
실버들 꺾어 호드기 만들어
어린 그때처럼 불어 보게 하려고
주머니칼도 준비했는데
실버들 사라진 개울조차 분간이 안 가고
멀찌감치 고목이 된
낯선 버드나무 한 그루만 외롭게 서 있다
만나지 말고 어릴 적 기억만 가지고 여생 살자고 한
그의 간절했던 타이름의 전화 속 목소리가
그럴 법도 했다
무너진 어떤 성역에서 파르르 맥박이 떨린다
세상의 발전은 눈이 부신데
초토화된 땅덩어리 거꾸로 가는 이 유배지
지팡이 짚고 등 굽은 세월을 안고
하루하루 울먹인다
<극에 달한 슬픔>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구한 흐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유엔군의 승리를 예상해 볼 수 있었던 상황에 중공군의 대거 참전으로
1950년 12월 15일부터 흥남 부두에 집결해 해상으로 철수를 시작
한반도 최북단에서부터 유엔군의 후퇴에 줄을 이어
많은 사람이 남쪽을 향하는 피란행렬을 이루었다
1951년 1월 4일 두 번째 서울을 내주는 치욕을 이름하여 1.4 후퇴라 한다
수원의 어느 고갯길에 다다랐을 때
허공에서 난사하는 비행기의 폭격으로 행렬은 아수라장이 되어
아이들은 가던 자리에 엎어지며 행렬은 순식간에 죽음의 공포였다
비행기가 사라졌을 땐
죽은 사람과 부상자가 이불 보따리와 함께 나뒹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언니의 등에 업혀 가던 일곱 살 여자아이
다리에 부상 당한 언니의 등에 더 이상 의지할 수 없게 되어
급기야 버려지는 아이가 되어야 했다
방금 남동생 하나도 폭탄의 후폭풍으로
어디로 튀어 달아났는지
가족 모두의 기아와 다급한 슬픔이 극에 달했다
이것을 뒤에서 알아본 젊은 부부의 애끓는 부축으로
죽음의 고갯길을 넘어
내리막길에서 다리를 끌고 어린것을 걸려 오산을 벗어난 여자아이
그것은 죽음의 고갯길을 넘는 일
아픔을 가슴에 묻은 그 아이가
지금 나와 함께 같은 방향의 영혼을 추억하고 있다
<할머니의 침묵>
지금은 간데없는, 누대의 땀방울 쌓인 돌각담 밭이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굴러온 돌들이 황무지가 된 풀숲에서
곤한 역사를 안고 시름한다
젊은 것들 죽일세라 다 피란 내보내고 하얗게 센 머리카락으로 국군이 오면 국군, 인민군이 오면 인민군을 피해 삶은 고구마를 산속 바위굴에 이어 날라 제비 새끼들 배곯을까 노심초사하던 할머니
정찰기 지나가고 나면 포탄을 피해 잔솔밭에 숨는 꿩처럼 돌무더기에 머리를 처박았다 돌 틈으로 들여다보이는 낯익은 항아리 하나 숨어 있었다 열어본 적 없는 비밀스러운 모습이다
온갖 포격에도 견뎌낸 할머니의 온화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가만히 하나하나 돌을 들춰내고 열어보니 할머니의 못다 한 말씀이듯 한가득 쌀이 들어 있었다 화약먼지 살바람으로 허공을 닫은 딱딱한 공포 속에서 헤진 손 굽은 무릎 누구를 위한 비손이었을까
시난고난 앓다가 실어증으로 일러줄 말도 못해서 가슴 터지게 가셨을 할머니 연약한 근력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쌀 항아리, 성곽을 축성한 옛이야기처럼 가늠이 안 된다
이 비밀은 마지막으로 어떤 힘의 기적이었을까
잊히지 않는 기억들, 가슴이 시려온다
<고독한 능소화>
악착같이 오르는 그 무엇의 악착이 있어
저렇듯 높이 오르기만 하는가
애초에 하늘 좌표에 뿌리를 묻었으면
천성이 그러하니 얼마나 땅속 깊이 뿌리를 두었을까
높디높은 곳에 붉은 꽃 등 매달고
어미 잃은 손자 기르느라 눈이 평생 짓물렀던
할머니 얼굴 환하게 비춰 줬으면 좋겠다
간장 담은 됫병을
자루에 넣어 두 귀퉁이 끈 매고
붙들어 맨 멜빵에 설움이 철없다
내 어린 잔등의 자루 속이
좌우로 뒤뚱거리던 피란길에서
어서 가라는 할머니 손짓이 너와 나란하였으리라
한탄강 벼룻길 고주박이를 타고
하늘을 향해 붉게 올랐지만
나는 그 시절의 서러운 한때를 기억해야만 했다
어디에 목숨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전쟁 통에
푸른 강물의 이무기는 물살을 사납게 뒤틀고
용이 되지 못하는 너의 치오름도 공중에서 길을 헤맸다
기억의 먼 뒤쪽에서 그리움을 움켜쥐고 있는
너의 고독한 독백에 묻는다
외줄에 목숨을 내건 어떤 사연이 또 있는지를,
<메꽃 소식>
외나 어디! 마라 마라 어디!
왼쪽 암소와 오른쪽 황소* 를 모는 밭갈애비** 마음 놓고 지르는 목청에
앞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겨릿소로 밭을 가는 고향의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6~8월에 피는 메꽃을 기다리기에는 아직은 이른 봄
돌이 오줌을 싸서 거친 밭에서도 잡곡 농사가 잘된다는
두 마리 소가 끄는 쟁기로 뒤집어 갈린 밭고랑을 쫓아가며
메 싹을 주워 종댕이에 담았다
식성이 안 좋은 나는
메를 섞어 지은 밥은 맛이 좋아 밥투정을 안 했다
어느 날 밭 갈러 가는, 우리 집 일하는 아재를 쫓아갔는데
남의 밭으로 갔다
거친 묵정밭이 우리 밭이 됐다고 했다 메를 엄청 많이 주워서 좋았다
밭 주인을 동네 아이들 이름으로
훤히 기억하고 있는 나는
그 후로 우리 밭은 남의 밭이 된 것이 더 많아
메 줍던 밭의 궁금한 안부에 메 주우러 가기에 낯설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1946년 이후부터
북한에서 시행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의한 토지개혁이었다
어떤 속박***을 아는지
땅속 깊이 뿌리 내린 연분홍 메꽃 안부가 흙바람에 자욱하다
* 큰 수소
** 밭 가는 쟁기를 모는 사람 강원지방 방언
*** 메꽃 꽃말 중에서
<풀잎처럼>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할 무렵
우리 가족을 따라나선 몇몇 동네 사람들과 사태골 산속으로 옮겨 피신해 있었다
돌로 쌓아 방공호를 만들고 초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있을 때
처음 보는, 거무스름한 피부의 유엔군들이 나타나 총을 겨눈다
할아버지가 손을 머리 위로 들길래 온 가족이 횡대로 서서 손을 들었다
군인 한 사람이 할아버지 얼굴에 총을 겨누자 그 자리에 있던 가족들은 사색이 되어 떨고 있다
방공호 안으로 몰려 들어간 군인 몇 명이 함께 있던 여인들을 끌어안고 옷을 벗기려고 달려들었다 사력을 다해 저항하는 몸에 화롯불을 들어붓는다
여인들의 비명에 가족들은 치를 떨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 마른 나뭇잎들
땅이 울고 하늘은 분노하는 것일까?
태어나서 한 생명으로
하늘의 섭리에 따라 풀잎처럼 살았는데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나 잘못하였는가?
옆에 서 있던 한 병사가 할아버지를 겨누던 총부리를 밀어내더니 그들의 부대로 끌고 갔다
치닫는 불안과 슬픈 시간을 어찌 필설로 다 하랴
이런 짓을 말리려다 여자들의 아버지나 오빠가 행악行惡의 현장에서 파리 목숨처럼 사살되는 일은 당시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해는 지고
멀리 캄캄한 어둠 속에 비틀거리는 검은 그림자가 산 아래서 움직인다
할아버지는 얼굴에 피멍이 낭자한 채 기어서 올라오셨다
옆구리에 끼고 올라오신 종이 뭉치를 떨어뜨리며
참혹한 가슴팍에서 식빵 한 덩어리 꺼내 보였다
야, 그래도 검둥이가 인정은 있더라, 개울에서 얼굴 씻겨주고 이걸 주더라
<떼거지 피란민>
1951년 1월 3일 부산으로 두 번째 수도가 이전되고 전국은
피란민 행렬로 이어질 때
깊은 산속에 길게 숨어 피신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산밑으로 내려와 머물다가
군 트럭과 열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평택군 서탄면 버드내(내천리) 벌판에 땅굴처럼 지어진 피란민 수용소였다
어쨌거나 의식주가 해결되고
포탄과 총알의 위험에서 벗어난 안도는
무지갯빛을 그려도 좋을 듯했다
배급 쌀은 알랑미* 밥알은 파리가 빨아먹은 것처럼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찰기가 하나도 없기는 했지만 감지덕지다
전선이 엎치락뒤치락 치열해지면서 그나마 쌀 배급은 중단되고
하얀 바둑알 같은 납작한 콩만 나와, 둥둥 몇 알 띄워 삶아서 물배를 채웠다
급기야 그것마저 중단되어 거리로 구걸을 나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 문설주에 기댄 채 고개만 떨구고 몸을 늘어뜨렸다
한동안 마을 주민들이 밥을 잘 주었으나
밀어닥치는 피란민 떼거지를 감당하기 어려워 수용소 가까운 마을에서는
밥때만 되면 대문을 걸어 잠가 난민들은 점점 먼 거리 마을로 구걸을 다녔다
당시의 온 나라 국민이 함께 겪은 설움과 고통은 다르겠지만
휴전 후에 나라는 또 다른 국민적 각성과 문화 창달로 오늘이 기반 되었으리라
* 안남미의 강원도 방언
<이념의 발걸음조차 달랐다>
보무당당한 제식 훈련 같은
발걸음이 요구된 인민학교* 등굣길은 사뭇 비장했다
교실 벽보판에 조소 친선만세,
굵직한 글씨의 표어 밑에
웃옷은 못 입은 채
아랫도리만 가린 추레한 배불떼기, 리승만**이라고 쓰인 초상화
어린아이들이 뭘 알겠는가
등굣길에 한발이 앞으로 땅을 구르듯 힘차게 내디디면 반대편 팔의 주먹은
힘차게 가슴을 치듯 교차한다
그때 스탈린과 김일성 노래가 튀어나와 앞산을 찌렁찌렁 울린다
그 정신은 이들의 가슴에 달린 둥근 테두리에 별로 표시된 소년단 마크로 함축돼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사오 학년 전원이 인민학교 소년단이었다
학예회 연극은 지도자를 우러르는 내용으로 되어 있고 미술 시간엔 인공기를
그리는 게 거의 전부였다
하지만 남한에 피란 온 후
초등학교 생활은 사뭇 달라서
등교 시간 잘 지키며 공부 열심히 하면 되고
미술 시간엔 선생님이 정해준 사생화를 그렸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등굣길 발걸음이 신나고 재미났다
*초등학교
**당시 북한식 표기
<고향의 구름 그리기>
6.25 전 북한의 한탄강
지금은 휴전선 이남 대한민국이 된 한탄강 유원지 고향이 지척인 가을 하늘이 드높다
꽃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꽃 한 송이 꺾어주면
꽃대가 시들도록 쥐고 놀았다
말을 배우면서
밤하늘이 좋아 반짝이는 별을 세고
하얀 달을 가볍게 자주 불렀다 “달 달!” 하고
지금은 수시로 다른 모양을 연출하는 가을 하늘의 변화무쌍한 구름을
핸드폰 액정 속에 가두느라 바쁘다
유원지 아름다운 가을꽃 배경에
광활한 띠를 두른 하늘의 새털구름을 내려 앉혔다
아이의 구름은 미래로 가 있고
나의 구름은 어린 시절 고향 대추를 붉게 익혔다
순이에게 따다 주려고 대추나무에 끙끙거리고 올라가다가 무명바지가 훌렁 벗겨졌다
알나리깔나리 누구누구는….”하며 놀리고 올려다보고 섰던 순이는 재빠르게 도망갔다
나는 골이 잔뜩 나서 혼내주려고 사립문 앞에 벼르고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애가 나오는 모습을 보곤 돌아서 도망쳤다
꽃 뒤에 숨은 얼굴이 피식 웃는다
구름은 가고픈 곳에 마음대로 달려갈 수 있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