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하늘을 보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길어진 여름으로 느끼는 가을은 한 달 남짓이라 한다.
기온이 더 매섭기 전에 가벼운 마음으로 일요일 아침, 당산을 오른다.
싸한 공기가 얼굴에 와닿고 목 안이 칼칼하다.
건강공원 입구의 국화를 보니 가을과의 작별 시간이 가까워짐을 느낀다.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간다.
어제 토요일, 서면의 한 식당에서 개성왕씨병사공파재부친목회 월례회가 있었다.
창원에서 사무국장 내외가 배석하여 수도권종중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차월 10일 모송재시제 행사장 준비에 도움을 청하였다.
신입 종친의 소개도 있었다.
그는 정유생(1957년생)으로 장파소종중 파조이신 21세 봉의 선조의 9대손이다.
장파 세계(世系) 말미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으니 막둥이 집안의 인물이다.
족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그를 대하니 더욱 친밀감이 솟아 오른다.
호적부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니 익령군(왕기/王琦)의 개성탈출기가 후손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에서 남으로 시선을 두면 실미도가 있고 다시 아래로 영흥도가 보인다.
지금은 선재대교와 영흥대교가 연결되어 섬 아닌 섬이 되었다.
옹진군에서 백령도 다음으로 큰 섬으로 해안경관이 수려하고 일출과 일몰이 아름다우며
여름철 피서지로 세인의 관심을 받고 있는 곳이다.
아래 글은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와 ‘옹진군향리지(甕津郡鄕里誌)’에 근거한다.
택리지는 여주이씨 이중환이 전국을 현지 답사하여 1751년(영조28년) 편찬한 지리서로
산세의 위치와 자연을 서술하며 인물과 풍속을 담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그는 숙종 때에 출사하였으나 영조 즉위 후 노론이 집권하고 남인파의 몰락으로
여러 번 유배 당하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선 전역을 돌아보았다.
영흥도에는 조선이 개국하며 개성왕씨 후손에 대한 학살사(虐殺史) 편린(片鱗)이 전하여 온다.
인천 옹진군 영흥면에 소재한 영흥도는
원 도서명(島嶼名)이 연흥도( 燕 興島)로 과거 제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고려말 종실 익령군(翼靈君) 왕기가 고려가 망한 후의 정세를 예견하고
성을 바꾸어 가족과 함께 개성을 떠나 바다를 건너
이 곳에 숨어 들은 후 영흥도(靈興島)로 바뀌었다고 한다.
폭풍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을 뻔 하였으나 하늘의 뜻으로 다시 살아났다하여
봉호(封號) 익령에서 영(령/靈)을 따왔다.
1394년(조선태조3년) 음4월, 전국에 피바람이 불어왔다.
15일에는 강화도에서, 17일에는 공양왕 부자(父子)가 삼척에서, 20일에는 거제도에서
왕족과 수 많은 후손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심산유곡에 숨어 살던 후손들 또한 세상 밖으로 끌려나와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유는 단 하나, 개성왕씨인들이 모반(謀反)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위정자(爲政者)는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익령군은 다행히 화를 면하고 자손들은 그대로 이 섬에 살 수 있었다.
높은 산 남서쪽에 매일 올라 북쪽 송악산을 바라보며 고려의 안위를 염려하던 산은
국사봉(國思峰/해발156m)이 되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바다에는 고향을 잃은 서글픔이 담겨 있지만
영흥도를 새 터전으로 삼고 일가를 이룬 익령군의 후손에게는 새로운 고향이 되었다.
이중환이 영흥도를 찾았을 때 후손들은 옥(玉)씨로, 전(全)씨로 개명하였고
신분이 더욱 낮아져 말을 지키는 목동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영흥도는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이 추격해 왔을 때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강화를 떠나 진도로 가기 전 70여 일 정박하였던 임시 기지이기도 하였고
동란 시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가 되어 한반도 전세(戰勢)를 바꾼 역사를 품고 있기도 하다.
익령군길이 현재 조성되어 여행을 선호하는 탐방객이 많이 찾아 각광 받는 명소가 되었다.
종실(宗室/종친)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국왕의 부계(父系) 친척이다.
군주국에서 왕의 가족이나 혈통이 이어진 친척이다.
문헌에 의하면 고려 건국 초기에 종실을 정1품인 원군(院君) 또는 대군(大君)이라 칭하다가
현종 때에 이르러 당 제도를 인용하여 종실 또는 공이 있는 자에게 오등작위(五等爵位)를 수여하였다고 한다.
공, 후, 백, 자, 남작이 그것이다.
종실에 봉작을 주게 된 배경에는 종실은 과거(科擧)를 볼 수 없어
명예직 이외의 관직에 출사(出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봉록(俸祿)으로 먹고 살았다.
봉록이란 일 년 또는 분기별로 관리에게 지급하던 쌀, 보리, 피복 등 금품을 의미한다.
특권을 주어 대우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대군(왕의 적자)의 자손은 현손(4대손)까지, 왕자군(왕의 서자)은 3대손까지 봉군하여 예우했다고 한다.
우리가 현재 칭하고 있는 종실(종친)의 범위가 당시에는 무척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흥도에 뼈를 묻은 익령군 왕기의 정체가 궁금하다.
그가 고려 멸망을 예견하였다 하였으니
효은태자계 중시조인 12세 교서감공(증 감정공) 왕미(王亹) 할아버지께서 생을 이어가신 여말선초 시절이다.
종실이면 왕실족보인 고려성원록에 등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성왕씨 남양종중이 보유한 고려성원록 사본에는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
만약, 종실이 아니라면 종족기인 세보에서 찾을 수 있다.
갑신세보 한글본을 검색하니 한자의 음과 훈이 동일한 이름 두 분이 나타난다.
한 분은 평양공파 후손으로 16세 영원군(寧原君)이다.
그는 1390년(공양왕2년) '이초의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청주로 유배되었다.
정5품 중랑장인 고려 무신 윤이와 이초가 이성계의 정변을 감지하고
명나라 황제 주원장을 찾아가 이성계가 명나라를 곧 공격할 것이라고 알리자
정도전이 황제를 만나 무고임을 해명한 사건이다.
이 여파로 이색 등 고려 유신이 살해되고 영원군 또한 청주옥사에 투옥되었다.
1392년(공양왕4년/조선태조1년),
거제에서 피주(被誅/타인에게 죽임을 당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한 분은 세마공파 28세 후손으로 1826년생이다.
조선 후기 인물이니 우리가 찾는 분이 아니다.
갑신세보 한자본 후미에 등재된 종족별기(별보)에도 안타깝게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별기에는 종족기에 세대와 계통이 전하지 아니하거나
고려가 망한 후 성을 바꾼 자의 행적이 일부 실려 있다.
택리지 속 내용이다.
[익령군이 머물었던 3칸짜리 고택은
지금까지 엄중하게 잠겨 있어 누구도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방안에는 서책(書冊)과 기명(器皿/기물)을 쌓아 두었으나 어떤 물건인지 알지 못한다.
예전에 한 관리가 바람을 쐬러 이 섬에 왔다가 잠깐 문을 열어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목장의 말을 치던 여러 남녀가 애걸하면서 이렇게 호소하였다.
“이 문을 열면 번번이 자손 중에 누군가 죽게 되는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까닭에 서로 경계하여 열어보지 못한 지가 3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관리는 문 여는 것을 그만두었다.]
"익령군의 명복을 빕니다."
영흥도 수평선 너머 태양이 얼굴을 보인다.
잠시 후 밝은 햇살이 온누리를 감싼다.
첫댓글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