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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담어(산스 크리스 트어, 범천국어)
감숙성 돈황시, 장액시, 평량시, 천수시, 청해성 서령시 일대에서 고구려, 가야, 신라가 시작되었다.
그당시 조상들은 월지족과 오족으로 있었으며 일부는 돌궐, 유연족도 있었다.
두만 선우에서 모돈 선우, 선비족, 오손족, 오환족 등으로 분화하다가
반도로 유입해 들어오게 된다. 그것이 부여족의 남하이다.
현재 산스 크리스 트어는 극소수의 인구만이 사용한다.
(내몽고~카슈미르, 북인도 5만여 명)
범어에서의 마(摩)는 아우를병(幷)이다.
아우를병(幷)이 뜻하는 말은 병합(합병)하여 통합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우를 병(幷)을 풀어보면 가리, 가라이다.
더 정확히는 가 ㅎ 리 가 ㅎ 라 이다.
범어 마(摩)는 가리, 가라이다.
아우를 병(幷)은 광개토 비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북부여 고구려, 기후 조선, 시라인들이 과거 한때 가라인들로 살았음을 증명해 주는 말이다.
월지족과 오족은 북인도 카슈미르로 들어가 중인도로 진출하면서 범천국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이 바로 실담어로 산스 크리스 트어이다.
한국어는 실담어에서 나왔다.
가야, 연나라 문자.
가야문자.
가야와 연족(燕族)이 사용한 문자로 가야시대 김해 일대에서 발견되는 문자다.
범어인 산스 크리스 트어와 한자의 초기 원형이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이동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특히 섶나무는 월나라의 구천(勾踐 기원전497~ 464년)이 월 왕에 오르자 마자,
오나라의 합려(闔廬)왕을 쳐서 죽였다.그러자 합려의 아들인 부차는 섶나무 위에서
매일 복수를 다짐하고 구천을 쳐들어가 승리하게 된다.
구천은 bc 494년 회계산(會稽山)에 들어가서 버티다가 견디지 못하고,
오나라 왕 부차의 신하가 되었다.
구천은 회계산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매일 쓸개즙을 핥으며 부국강병에 힘썼다.
이 고사가 와신상담(臥薪嘗膽-섶나무에 누워 쓸개즙을 핥음>인내하여 마침내 원수를 갚음)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오나라의 부차와 싸워 승리하고 부차를 자살케 하였으며 서주(徐州)의 맹주가 되었다.
그의 최대 영역은 호북성까지 진출하여 손에 넣었다.
그 바람에 호북성, 호남성 일대에서 일어나 사천성 파촉 지방을 장악한 초나라에 망하게 된다.
이름으로 보면 고구려 고씨도 남방에서 살다가 북방으로 밀려나서 생성되는 나라이다.
중국인들은 고씨를 구씨로 발음하여 고천을 구천으로 발음하였다.
중원 남부에 삼묘가 있는데 치우의 후손들이다.
월나라는 초나라에 망하고 초나라는 진시황의 진(秦)나라에 망한 후
오월초인들이 북방으로 사방으로 흩어진다.
산스 크리스 트어는 그렇게 생겨나게 된다.
고구려는 월지의 황룡국을 점령하고 고구려가 태어난다.
신라는 가라를 점령하고 태어나는 나라이다.
고구려와 가라 shilar는 산스 크리스 트어를 사용한 종족이다
기자, 마한, 백제, 동진권의 조선은 한양에서 그것을 조합하여 한글을 완성해내는 나라이다.
함경도로 들어온 이지란등 10여 가문의 숙여진족은 산스 크리스 트어인 국정문자를 사용하였고
태종 이방원은 이지란을 스승으로 두고 국정문자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정적들에게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았으며 이로 인해 세종 이도 역시 왕자 시절 때부터 국정문자를
익히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일이다.
고로 산스 크리스 트어에서 모음만 제거하면 한글 자음은 쉽게 세종 혼자서도 찾아 낼 수가 있었을 것이고
모음까지 단독으로 만든 이후에 아래아, 여린히읏, 여린비읍, 반치음, 꼭지이응 등 부가음을 어떤 모양으로
결정할 것인지에 대해 집현전 학사들과 연구해서 완성했을 것이다.
세종의 주도로 집현전이 만들어진 것이고 한글 창제에 주도적인 역활을 한 것이 틀림이 없다.
만약 집현전에 참여한 학사들중 한글 창제에 두드러진 두각을 나타낸 자가 있었다면
훈민정음 반포때 그의 이름이 올라갔을 것이었고 조선 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용비어천가, 훈민정음 혜례본, 세종실록, 훈민정음 반포,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
그 어디에도 참여하여 만들었다는 단서나 이름이 올라간 적이 없으므로
세종이 사라진 국정문자에서 찾아내 단독으로 창제(創製)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1443년 세종대왕이 단독으로 한글을 창제한 이후 1446년 4월 6일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나서
1446년 5월27일 왕비 소헌왕후 장례식 때 신미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듣게 된다.[1450년 세종 승하].
祐國利世 慧覺尊者(우국이세 혜각존자-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하며 깨달음의 지혜를 얻은 자)라는 말은
어떤 일(소헌왕후 장례주관)에 대해 승려들에게 불교 관련으로 불교의 설법을 높여 주기 위해
의례히 보편적으로 내리는 말이다.
한글 창제에 대해 공을 인정해서 우국이세 혜각존자라고 내려 준 게 아니다.
祐國利世 慧覺尊者라는 말은 불교에 공헌한 국사급 대사에게 내리는 불교식 전문 한자 용어이지,
한글을 창제하는데 기여해서 하사하는 정치, 행정, 교육 전문 용어가 아니다.
세종대는 유교 사회가 막 정착되어 가는 시기였으며 불교에 대한 탄압이 적었을 때였다.
그래서 소헌왕후에 대한 장례식을 불교식으로도 거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에 세종 이도가 훈민정음 28자를 직접 친제(親制)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친제(親制), 어제(御製)란 세종 임금이 직접 지었다는 뜻이다.
어제라는 말은 사관들이 일반적으로 사초에 기록하는 말이고 친제(親制)라는 말은 세종이 친히(몸소) 직접
지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특별히 기록하는 말이다.
[사초(史草)는 왕과 왕세자, 왕자가 절대 보지 못함. 조선 후기 왕은 승정원일기를 볼 수가 있었음.
조선후기 왕은 승정원일기를 통해 왕 자신의 행적에 대해 사초에 어떻게 기록했는지 유추할 수가 있었음.
연산군이 사초를 봤다가 무오사화(1498년), 갑자사화(1504년)를 일으키고 결국은 중종반정이 일어남.
사초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을 본격적으로 올리기 전에 세번에 걸쳐서 가기록하는 과정을 말함].
모든 일에는 "동기부여"라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세종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백성들을 위해 글을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국정 문자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쉬운 글자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보급하려고 했던 것이다.
[국정 문자를 모르는 상태에서 한글을 창제하여 백성들에게 보급하겠다는 구상을 쉽게 하지 못함].
조선 초기는 불교에 대한 탄압이 적었고 대사는 인정받는 신분이었으므로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에 주도적으로 나섰다면 실록에 반드시 기록되었어야 하며 과학(격물) 발전을 추구하였던
세종 시대에 천민이었던 장영실도 실록에 기록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비교해 보았을 때
신미는 아무런 관련 사실이 없고 한글은 세종이 친히 직접 창제(創製)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이다.
[한글창제같이 획기적인 발견, 발명으로 큰 업적을 남기면 권력을 쥔 한자권 정치세력이 큰 권력을 갖는 것을
미리 차단시키는 공작을 가했음. 장영실도 어가의 수레바퀴가 무너져 세종이 부상을 입자 기다렸다는 듯이 쳐냄.
신미대사가 실제로 한글 창제에 결정적인 기여했다면 큰 탄압을 받았을 것이고, 최소한 자신이 참여한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등 다수의 저서에 자신이 한글을 지었다는 단서는 남겨 놓았을 것이지만,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세종말년과 세조때 다수의 학자들과 함께 참여하여 공동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에
한글을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치에도 맞지 않는 역사 왜곡임].
十=RA(태양)
十(열십자)는 훗날 십자가가된다.
십자가는 RA(태양)와 같은 뜻이라고 글로써 사용하였으므로
태양(RA)을 상징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놀라운 순간이다.
2천3백여 년 전 이전부터 십자가가 태양을 상징하였다는 사실이
실제로 밝혀지는 순간이다.[디오니소스교(아폴로교)에서 유래]
p/s
결정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섬서성 한중시 태백현 태백산의 높이 3,761미터는 기독교 성서학자들이 하느님의 천지창조가
기원전 3,761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사실이다. ^^
이것으로 환인>환웅 신화가 서역으로 퍼지면서 문명이 전파되어 바알>여와이야기로 이름이 바뀌어
천지창조가 되었던 것이며 그것이 신격화되어, 다시 동방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세계사와 종교사를 뒤집어 버리고도 남을 발견이다.^^.
환인/환웅 신화(bc3898)가 성경의 천지창조 bc3761년보다도 137년이나 앞선다.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진출하여 환인/환웅 신화를 전파하고도 남는 세월이다.
bc 3500년 경 태호 복희 시대 때 여와가 부여족의 조상인 수유족, 수유족의 조상인 수인족을 이끌고
서역 수메르 지방으로 들어가 무역을 활성화시킨다.
이 시기에 수메르 지방 이라크 남부에서 우르국이 세워지는 시기이다.
그 주변으로 셈어족(수메르인/ 말과 글이 한국식 어순]에서 햄어족[인도, 유러피언]으로 분화하는
니푸르국 등도 세워진다.
여와는 요단강 서부 지구[요르단 서안지구] 여리고 항에서 여인들의 지갑을 꺼내기 위해
창녀촌을 세워 무역을 활성화시키고, 이태리 베네치아[베니스/위니(이)사威尼斯]항으로 들어가
창녀촌을 세워 무역을 활성화시킨다.
그 후 이집트 나일강 유역으로 들어가 무역을 활성화시킨 후, 그리스 고린도 항으로 들어가
철의 삼각주 무역을 연결한 후 고린도의 수호신이 되었다.
세계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bc 3500년 경 수메르인 메소포타미아 진출.
bc 3450년 경 이집트 나일강 유역 도시국가 분립.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서 최초로 도시국가가 형성되어 분립하게 되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그 후 bc3000~ bc1100년 경 힛타이트 문명이 멸망한 이후 bc 550년 힛타이트 문명을 건설한
후리인[구리인], 아무르인[아모르인], 모압인[감숙성 흑하 압수 지류인], 사라센인 주역들이
비단길, 초원의 길 중간 기착지인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를 세우고
이라크 바빌론 문명을 점령하고 bc 668년 신 바빌론을 세워 실크로드 무역을 단절시킨 영국 앙골계 페니키아 문명을
무너뜨리고 힛타이트 제국을 재 건설하여 실크로드 무역을 다시 회복시킨다.
여기에서 앙골지다(사투리 옹골지다)라는 말이 나온다.-앙골족이 적은 병력으로 일당백으로 싸워 붙은 이름
힛타이트 문명이 이집트로 들어가 상이집트를 지배하다 혈통이 지나치게 희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라센 페르시아인들에게 바턴 터치하고 돌아가자, 사라센 페르시아인들이
bc 525년 시리아 서북부 파르티아 지방에서 아케메네스 제국을 세우고
이집트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리스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bc 336년에 일어나 bc 325년 아라비아, 이집트를 장악한
아케메네스 제국을 침략하고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까지 점령하여
실크로드무역이 다시 단절되자,대월지가 사마르칸트로 들어가 셀레우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실크로드 무역을 회복한다.
서기 800년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전신인 오토만 인과 압바스 왕조, 티벳 토욕혼 인들이
중앙아시아를 어지럽히면서 실크로드 무역이 조금씩 쇠퇴해가자,
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 장수 고선지가 출정했다가 키르키즈 탈라스 전투에서 패해
이들에게 실크로드 중간 길이 넘어가며 쇠락하기 시작한다.
이후 중원에서 만들어지는 물건이 더 좋아지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800년대 실크로드 무역이 단절되자 오월의 강동, 강남 진출이 활발해져 5대 10국 시대가 펼쳐지며
960년 송나라 조광윤이 통일하게 되고 오월은 동남아시아로 밀려난다.
기원후 1100년대 로마 교황청 주도로 십자군 1, 2차 전쟁을 일으키면서 서역을 침공하여
비단길, 초원의 길 무역을 다시 절단내고 만다.
1100년대 십자군 전쟁 이후로 실크로드 무역이 단절되어 문명이 고대기로 회귀한다.
타락한 로마 교황이 교황청 뒷간에서 활동하던 창녀들에게만 돈을 쓰게 되고 창녀들은 곳간에 쌓아 놓고
재투자를 하지않아, 중세 유럽이 페스트에 시달리는 등 경제가 쇠퇴되어 가자 서역을 약탈하기로 한다.
1096년 십자군 제1차 전쟁으로도 경제난이 해결되지 않자, 1147년 제 2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다.
이일로 근현대 들어서 로마 교황청은 철저하게 반성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1200년대 오스만 투르크[터키(튀르키예) 제국 중심]가 일어나 실크로드를 장악하자,
몽고가 일어나 거란, 여진을 돈황 지구[건주여진/ 후일의 생여진], 청해 지구[란주여진/ 숙여진]에서
동만주 동북 삼성으로 몰아낸 후, 서역 실크로드 교통로를 장악한 오토만 제국(터키중심)을 몰아내며
천하를 5 한국으로 재편하게 된다.
여와시대 당시에는 남자가 돈을 벌어오면 아내가 집집마다 보관하고 쓰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가 침체되어 있어서 발전이 없었다.
창녀촌을 열게 되면 사내들이 돈을 쓰기 때문에 아내들이 창녀들에게 남편을 빼앗길 까 봐 자극을 받아,
귀걸이, 팔찌, 장신구, 화장품, 향수, 옷, 신발 등 치장품을 사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무역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기초 경제의 기본 근간이 되었다.
이것으로 나일강 유역에 도시국가가 분립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비단길 초승달 무역, 초원의 길 반달 무역은 이렇게 완성되어 갔던 것이다.
"경제의 시작"은 여와가 창녀촌을 열어 철의 삼각주 무역을 완성하고 초승달 무역과
반달 무역로를 개척하여 완성시킨 것이 지구 경제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종교인은 "경제의 신" 여와를 최고의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