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나리아」
야마모토 후미오(山本文緒)는 문장력이 있는 작가입니다. 글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주인공 하루카(春香)는 25세 여성입니다.
유방암에 걸린 적이 있고 지금도 유수가 없습니다.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할 때에 이러한 육체적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이러한 육체적 고통은 그녀의 정신까지 피폐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간단합니다.
‘이제 건강해졌으니까 자신을 암이라고 말하지마 라고 남친과 가족은 말하지만, 이미 끝났다고 하면 어째서 매일 나는 멀미와 구토와 불면증에 괴로워하고 있을까, 나는 아직 전혀 끝나지 않았는데’ 라는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은 아픈데,
타인은 이미 암 환자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하루카는 매달 호르몬 주사를 맞고 있고 주사를 맞으면 걷는 것조차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우울합니다. 아픔은 자신밖에 모릅니다. 누구도 당사자가 되어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타인은 이러한 하루카를 이해해주지 않고 하루카가 빨리 사회에 복귀하기를 바랍니다.
「상실의 시대」에서 나오코가 ‘그저 약했을 뿐이죠’(228p)라고 죽은 기즈키를 설명하듯이,
하루카는 약한 사람입니다.
그녀도 ‘이제 암 소동에 마침표를 찍지 않으면 안 된다. 나도 알고는 있다’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삐뚤어진 성격은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구요...
‘대치(対峙)하는 것이 괴로워서’ 라고 하며
하루카는 사회에 나가기를 거부합니다.
대치하는 것이 괴롭다는 것은 타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녀는 약한 사람입니다.
고통을 참아내는 힘은 모두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운동선수와 몸이 약한 사람이 고통을 참아내는 힘은 전혀 다를 것입니다. 회복의 능력도 다릅니다. 회복이 빠른 사람이 있고 늦은 사람이 있습니다. 체력도 모두 다릅니다. 개인차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실연을 하였을 때 그것을 벗어나는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어느 사람은 금방 벗어나기도 하지만, 어느 사람은 평생을 가도 극복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재능도 다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게 비추어 타인을 판단합니다. 여기에 타인과의 갭이 생기는 것입니다.
효스케는 운전사고를 내었다는 이유로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룬짱은 몰라’라고 하면서 운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신에게는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하루카에게도 그러한 것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사랑입니다. 섹스도 그렇구요.
나가세(永瀬)는 쓸데없는 친절입니다. 가진 자의 여유이겠지요. 하루카가 스스로 극복하는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작품은 하루카가 출구를 찾을 때 ‘아득히 먼 곳을 가리키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하루카는 희망적일까요 절망적일까요.
하루카도 스스로 출구를 찾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간도 역시 그녀에게 소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카는 유방암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라고 하고 플라나리아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유방암은 그녀의 아이덴티티가 아니고 단지 콤플렉스이겠지요.
절단되면 재생된다고 하는 플라나리아, 하지만 그것은 하나가 절단되어 두 개로 재생되는 것이고 재생된 것은 이전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크기도 반이 됩니다.
하루카가 재생하고 싶은 것은 플라나리아가 아니고 사람과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부모님이 바쁘셨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컸습니다. 그녀는 사랑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가세에게 관심을 받았을 때 그녀를 따르게 됩니다. 그녀에게는 이러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효스케와의 관계에서도 그렇구요.
하루카를 위해서는
열심히 하지 않아도 좋아(頑張らなくてもいい)
힘내지 않아도 좋아
그렇게 말해주며
단지 그녀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5세에 캐미숄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 쓸쓸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40대가 되고 50대가 되면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세요. 모두 재미있습니다.
「네오키드」에 친구가 더 잔혹하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스카의 솔직한 마음이 담긴 편지를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받기 싫으면 모른 척하고 내버려도 됐을 텐데 친구라는 건 친절하면서도 잔혹한 것이구나.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했다’ (152p)
「네오키드」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나옵니다.
‘내가 디디고 선, 그야말로 단단하다고 굳게 믿어왔던 대지가 그렇게도 간단하게 무너져버릴 살얼음이었다는 건 까맣게 몰랐다. 그러나 얼음이 깨지면서 빠져든 물밑에서 이제 나는 꼼짝없이 얼어 죽는구나 했더니, 뜻밖에도 거기에는 ‘남아도는 시간’이라는 이름의 뜨뜻미지근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에 홍건히 누워서 지내는 일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편안하고 아늑했다. 더구나 나는 그 밑바닥을 박차고 솟아오를 어떤 동기도, 어떤 목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132p)
남아도는 시간은 참 좋은 시간입니다.
시간이 천천히 흐릅니다...
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프랑스에서는 정년을 낮추라고 데모를 하는데
한국에서는 정년을 높이라고 데모를 합니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요.
인도는 기차가 보통 하루 늦게 온다고 하더군요. 오늘 기차가 내일 온다는...
이러한 인도인의 삶은 나쁜 것일까요.
하루카는 꼭 취직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학생들도 꼭 대기업에 취직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인생에서 실패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