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역사를 품다 14> 《시조21》 2024. 겨울호 연재
또 하나의 수도, 익산 백제
김덕남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서라벌 곳곳에 이 노래가 퍼지기 시작했다. 아름답기 짝이 없는 미염무쌍媚艶無雙의 소녀 선화공주와 마를 캐 팔아 생계를 잇는 서동의 러브스토리다. 이를테면 얼레리꼴레리 원조 격 노래다. 마를 주고 아이들을 꾀어 이 노래를 부르게 한 서동은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가 궁에서 쫓겨나자 길을 안내하여 백제로 데려갔다. 이는 삼국유사 기이편에 나오는 무왕(600~641재위)의 이야기다.
백제는 수도를 중심으로 한성 백제, 웅진 백제, 사비 백제로 나뉜다. 그런데 익산에 쌍릉이 있다. 즉 대릉과 소릉이다. 무왕과 왕비 선화공주의 능이라고 전하는 익산시 석왕동으로 향했다. 평지 같은 구릉으로 산책하기 좋은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다. 이마에 솟은 땀을 산들바람으로 식히는데 숲속의 꾀꼬리가 청아한 목청을 동그랗게 굴려댄다. 잔디로 잘 단장한 대릉 앞에 섰다. 석물이나 비석 하나 없어도 높은 신분의 무덤이라는 것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 의하면 ‘쌍릉은 『고려사』에 후조선後朝鮮 무강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말통대왕릉이라 부른다’라고 한다. 후조선은 위만에 쫓겨온 고조선 준왕이 세운 마한이라고 전한다.
일제가 조선 침략의 명분을 찾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추진했던 고적조사사업의 하나로 전국의 왕릉급 무덤들을 무자비하게 파헤칠 때 쌍릉도 그들의 손을 피해 갈 순 없었다. 1917년 일제가 발굴할 당시 이미 도굴되어 썩다 남은 목관과 관꾸미개, 옥 장신구, 치아 등만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예부터 전해지기로 마한시대의 왕릉으로 여겨졌으나 믿기 어려우며, 그것을 조사하니 쌍릉의 대묘 소묘 모두 백제시대 말기의 능묘라는 것은 명백하다”라고 야쓰이 고적조사위원이 보고서를 남겼다. 관까지 다 빼냈으니 주인은 실종되었다. 무덤만 남기고 주인은 어디 갔을까?
엑스레이를 찍는다/ 잃어버린 마음 찾으려
가슴을 관통하는 빛/ 신검神劍처럼 서늘한데
울지도/ 웃지도 않고/ 앙다문 하얀 뼈마디만
-박해성 「실종」 전문
익산 쌍릉 중 대릉(무왕릉으로 전함)
2017년 재발굴이 이루어졌다. 발굴팀이 널길을 지나 널문을 여니 매끈하게 다듬은 화강암 무덤방 관대 위에 사각 나무상자 하나만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고 한다. 발굴책임자(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최완규 교수)가 상자 뚜껑을 들어 올리는 순간 뒤로 넘어질 듯 놀랐다고 한다. 못질하지 않은 상자 속에서 한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100여 점의 뼛조각이 나왔다. “울지도 웃지도 않고/ 앙다문 하얀 뼈마디만” 찾은 것이다. 누구일까? 유골을 정밀 분석한 결과 161~170cm 키에 60대의 남자였으며,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으로 620~659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나왔다. 무왕은 641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니 이 무덤의 주인이 바로 무왕이라고 학계에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풍채가 훌륭하고 뜻과 기상이 호방하고 걸출하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무왕이란 사실을 뒷받침하였다.
귀족들과의 갈등, 신라,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점점 약해지는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야심 찬 무왕은 후손들에게 무슨 말을 던지고 있을까. 잠시 목례를 올린 후 180m 거리에 있는 소릉으로 향했다. 대릉보다 약간 작은 느낌이다. 도굴되어 아무것도 없었으나 다행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릉 관장식이 있다고 한다. 대릉 관장식과 비교해볼 때 소릉이 먼저 조성되었으리라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가 먼저 사망했다는 뜻인가. 그래도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확증은 찾지 못했으니….
방향을 왕궁리 유적지로 틀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떡시루에 떡을 쌓듯 출토 기와편을 정돈해 놓았다. 30만 점 정도의 기와편이 수습되었다니 그 당시 건물 규모를 짐작해 본다. 1989년부터 현재까지 발굴 조사를 한 결과 백제 말기 궁성으로 조성되어 일정 기간 사용 후 그 자리에 사찰을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축구장처럼 생긴 직사각형 유적지의 규모를 둘러본다. 남쪽은 여러 개의 대형 건물터가 있다. 잔디로 조성해 놓은 넓은 터에 저 혼자 우뚝 솟아 있는 5층 석탑 앞에 섰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정제된 조형미가 돋보인다. 살짝 들린 지붕돌의 네 모서리마다 울렸을 풍탁은 간데없다. 부여 정림사지 석탑과 흡사하다. 밑에서 쳐다보면 웅장하나 멀리서 바라보면 단아하고 유려한 느낌이다.
익산 왕궁지 석탑
내 맘속 풀지 못한 그리움 하나 있다
잊히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가
풍탁에 바람을 걸어/ 그림자로 늙어간들
차오르는 달빛조차 감당할 수 없을 즈음
잘 생긴 탑 하나 조용히 옷을 벗는다
손길이 닿기는 했을까/ 차마 못 지운 떨림 하나
아, 미륵의 땅 여자 되어 한 천 년은 살아봐야
옥개석 휘어지는 그 아픔을 가늠할지
늦가을 왕궁리에서 쓴다/ 그대/ 그대/ 그립다
-정진희 「왕궁리에서 쓰는 편지」 전문
“옥개석 휘어지는 그 아픔”은 “미륵의 땅 여자”만이 알고 있겠지. 나 또한 미륵의 땅 여자 되어 그리움의 편지를 쓰고 싶다.
1965년 5층 석탑을 해체 보수할 당시 두 개의 사리공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국립익산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금빛 찬란한 무늬의 사각 사리함과 사리함 안에 담겨 있는 녹색 유리 사리병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방 공방에서 나왔듯 백제 장인의 숨결과 손길이 느껴졌다. 또 하나의 사리공에서는 금동함 안에 순금 금강반야경판이 나왔다. 금 경판 19장을 금 경첩으로 연결하여 금띠로 묶은 금 책자다. 얇은 금판에 글자를 새기고 두드린 장인의 불심을 한줄 한줄 눈으로 더듬었다.
다시 호젓한 북쪽의 구릉으로 걸음을 옮겼다. 산책하기 딱 좋은 곳이다. 공동화장실, 공방터, 수로가 있다. 재현해 놓은 화장실 거적을 들추자 남자가 엉덩이를 까고 앉아 볼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거적을 내리다 다시 보니 실물인형이라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평일이라 손님도 뜸하다. 포석정의 물길처럼 구불구불한 물길이 U자형 수로와 함께 끝도 없이 이어진다.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백제인의 여유가 보인다. 아기자기한 조경석 아래로 찰랑 넘쳤을 물굽이가 눈에 어려 무왕과 선화공주가 거닐었을 이 길에 내 발자국을 포개본다. 발바닥으로부터 가슴 찌릿한 그리움이 인다.
바로 옆에 있는 백제왕궁박물관에 들어섰다. 학예사의 설명을 따라 전시실을 돌았다. 담장 모형을 재현해 놓았다. 담장은 폭 3m 높이 6m, 둘레의 넓이가 250×490m다. 발굴 당시 퀴퀴한 냄새와 함께 깊이가 3m나 되는 긴 구덩이를 발굴하였는데 기생충 알이 나왔단다. 이동식 변기와 뒤처리용 막대기도 나왔다. 또한 화장실에서 일정하게 보관된 오물이 빠져나가는 하수로가 있어 정화조 구실도 하였다니 수세식 화장실의 원조를 여기에서 만난다. 공방 터에서는 귀금속을 만든 금, 동, 유리 도가니가 나왔다. 금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는 유리구슬을 꿰어 목에 걸면 요즘 패션에 하나도 뒤지지 않겠다.
또 다른 건물터에서는 수도를 뜻하는 ‘수부首府’라는 명문기와편이 나왔다. 이것만 보더라도 여기가 백제의 수도였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또 하나의 증거도 전시해 놓았다. 일본 교토 청련원에서 발견된 7세기의 ‘관세음 응험기’다. 이 기록에는 “백제 무광왕(무왕)께서 지모밀지(익산)로 천도하시어 새로이 정사를 경영하셨다. 그때가 정관13년(639년 무왕 40년)이었다.”라는 문장이 있다. 다만 우리의 역사 기록물에 없으니 교과서에도 등재되지 못하는 비운을 익산은 안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무왕의 탄생설화가 있다. 익산 무룡지에 사는 과부와 용과의 사이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니 이름은 ‘장’이었다. ‘장’이 곧 무왕이다.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이라고만 되어 있다.
‘27대 위덕왕(554~598재위)과 아좌태자가 법왕(부여 선)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위덕왕의 동생인 혜왕(598~599재위)이 28대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1년 만에 죽자 혜왕의 아들 법왕(599~600재위)이 29대 왕의 자리를 잇는다. 그러나 위덕왕의 숨겨진 아들 ’장‘은 사촌인 법왕을 1년 만에 제거하고 30대 무왕이 된다.’ 이 이야기는 수년 전 방영하였던 ‘서동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 시기 권력 암투가 극심했음을 말해준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미륵사지로 핸들을 돌렸다. 광활한 규모에 눈이 휘둥그레하다. 잔디 위에 멀리 복원한 서탑과 재현한 동탑이 보인다. 동탑과 서탑 사이에는 목탑 터가 자리하고 있다. 그 앞에 대형 당간지주가 옛 그대로 서 있어 세월의 덧없음을 말해준다. 서탑은 1915년 일제가 허물어져 가는 탑을 보존하기 위해 서쪽 면을 시멘트로 때워 놓았다. 다시 2001년부터 시멘트를 떼어내고 복원하여 2019년 4월 30일 준공하였다. 1층은 동서남북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었으며, 한반도에서 가장 큰 석탑이다. 1400년을 견딘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안간힘’으로 ‘버티는/ 백제의 뼈’(박권숙 「미륵사지 석탑」 중에서)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지명법사를 만나기 위해 사자사로 행차하던 무왕 부부가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나게 된다. 이에 왕비가 큰 절을 지어줄 것을 간청하자 지명법사가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산을 무너뜨려 평지로 만들었다. 그 후 세 개의 금당과 세 기의 탑, 회랑을 가진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미륵사지 발굴과정에서 지하 3~4m 깊이까지 뻘층이 있었기에 못을 메워 절을 세웠다는 이 기록을 입증한 셈이다.
잔뼈들이 잡히는 초가을 선들바람
폐사지 주춧돌을 쭈볏쭈볏 건너더니
석탑의 무너진 어깨를 층층이 딛고 선다
백제 땅 고운 날을 약속한 미륵 삼존
그 앞날을 내디디듯 까치발에 힘을 주면
미륵이 돌아오실까 하늘 참말 푸르다
-박명숙 「석탑에 부는 바람-미륵사지 석탑」 전문
2009년 1월 1층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가 나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발견 당시의 유물을 바로 옆의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해 놓았다.
금동, 금, 유리로 이루어진 삼중의 사리병, 봉안 내력을 적은 사리봉영기, 아름다운 색깔의 유리구슬, 관꾸미개, 금족집게 등 여러 공양품이 금방 넣은 것같이 고스란하다. 사리내·외호의 곡선미와 우아, 섬세한 연꽃무늬와 인동당초무늬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이며 물방울을 튕길 듯하다. 여백엔 물고기알 문양을 가득 채웠다. 뚜껑에서 어깨로, 허리로 흘러내리는 유려한 곡선을 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온다. 감전된 듯 찌릿하다. 무왕의 염원이 여기에 다 담겨 있겠다.
손바닥만 한 사리봉영기에는 앞뒤 금판에 새겨진 193글자가 선명하다. ‘부처님이 남긴 사리가 수많은 불가사의한 영험을 가져다준다. 대왕과 왕후의 복을 기원한다. 황후가 이 사리를 봉안한다. 백제 왕후 좌평 사택적덕녀(百濟王后佐平沙宅積德女)’라는 글귀로 무왕의 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판명되었다. 사리를 봉안한 시기는 ‘기해년(639년, 무왕 40년) 정월이십구일봉영사리’로 되어 있다. 무왕이 사망하기 2년 전이다. 그렇다면 서동과 선화의 사랑은 허구란 말인가.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던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무너져 없어진 동탑과 중앙의 목탑이 발굴되었으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더 생각해 보면 왕의 부인이 꼭 하나라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선화공주 사후에 좌평 사택적덕의 젊은 딸을 새 왕후로 맞아들인 건 아닐까. 의문과 상상 사이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자왕의 생모가 누구인지도 밝혀지지 않은 역사, 멸망한 나라의 비애다.
만경강과 호남평야를 품고 있는 풍요의 땅, 익산으로 도읍을 옮겨 새롭고 강력한 백제를 건설하고자 했던 무왕의 염원이 1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왕궁지, 왕의 사후세계인 왕릉, 왕실 사찰인 제석사, 백성의 정신과 사상을 하나로 묶는 미래의 새 천지, 즉 미륵세상을 꿈꾸는 미륵사와 여러 개의 성으로 둘러싸인 익산은 백제의 네 번째 수도의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교과서에 익산이 네 번째의 백제 수도로 기재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깃든 익산에서 다시 한번 ‘서동요’에 가락을 얹어 불러본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김덕남 :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젖꽃판』 『변산바람꽃』 『거울 속 남자』 현대시조100인선 『봄 탓이로다』. 올해의시조집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수상 등
- 《시조21》 2024.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