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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새로운 시작
잔인무도한 제갈정이지만 자기 손자만은 몹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손자가 독사탕을 먹었다는 말을 듣자 몹시 불안해졌다. 일순 그는 어찌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사부를 죽이려고 작심한 지 10여 년이나 되는데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도 없었지만 어린 손자의 생명도 경각을 다투는 판이니 방심할 수가 없었다. 실로 진퇴양난이었다.
"형님, 사숙의 말을 곧이듣지 마시오. 거짓말입니다."
속문성이 소리쳤으나 어린 손자 녀석에 대한 근심만 더해 갈 뿐이었다.
"사숙님, 정말 우리 손자한테 독사탁을 먹였단 말씀입니까?"
제갈정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나 같은 어린 사람들의 말엔 거짓이 없어. 내가 자네들처럼 거짓말로 밥벌이하는 줄 아는가? 우린 거짓말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데, 자, 보라구. 가슴이 뛰길 하나 얼굴색이 변하길 했나?"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이때 갑자기 제갈정이 소리쳤다.
"아서라, 멈추지 못할까!"
제갈정과 사숙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속문성이 신독행을 죽이기 위해 슬그머니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양호위환(養虎爲患)이란 말도 모르시오? 이 기회를 놓치면 조만간 우리가 해를 입습니다."
속문성의 말에 제갈정은 성난 얼굴로 고집했다.
"잔말 말고 내 말 들어!"
제갈정은 속문성을 노려보았다. 제 자식 귀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법. 제갈정은 속문성의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숙은 가냘픈 숨을 몰아쉬는 신독행과 망설이고 있는 제갈정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제갈정이 문득 물었다.
"사숙님, 저희들이 사부님을 놓아주면 사숙님도 우리를 놓아주겠지요?"
아이는 깊이 생각해 보는 척하다 한참 만에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에 소똥도 안 벗겨진 녀석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구나. 기다려라, 조만간 이 원수를 갚을 날이 있을 게다.'
제갈정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정중하게 물었다.
"사숙님께서 해독하는 처방을 알려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 셋이 집에 돌아가 해독을 시키지요. 사부님 일은 사숙님께 맡기겠습니다."
아이는 이에 두말없이 주머니를 뒤져 알사탕 두 알을 꺼내 제갈정과 속문성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어서, 어서 가지고 가라. 다시 와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제갈정과 속문성은 그 알사탕이 도대체 진짜 해독제인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의심스런 마음을 숨기고 일단 가져다가 먹이고 보자는 심산으로 급히 그곳을 떠났다.
아이는 신독행을 살피고 주변을 휘둘러보더니 나무집 안을 향해 꽥 소리쳤다.
"이 녀석, 냉큼 이리로 나오지 못할까!"
그리고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식, 대단한 놈이군. 늙은 독물과 꼭 같아. 사부님이 죽어 가는데도 제자란 녀석이 꼼짝도 않고 제 목숨 부지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 형님, 천하에 인종이 많아도 이런 인종은 드문데 어떻게 이렇게 형님이 몽땅 긁어 왔소?"
그러다가 그는 재차 꽥 소리를 질렀다.
"구양봉, 이 자식아, 냉큼 나오지 못해!"
구양봉은 내심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사부님이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제자로서 나가 보지조차 않았으니 누가 뭐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죽을 땐 죽더라도 사부를 구하려는 노력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았겠는가.
구양봉은 고개를 푹 떨군 채 밖으로 나갔다.
달빛 아래 꼬마 사숙이 서 있고 그 곁에는 기절해 쓰러진 신독행이 있을 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구양봉은 신독행에게 다가가 사죄하는 마음으로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았다. 스승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 보니 겨우 실낱 같은 숨결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초조와 불안에 싸인 구양봉이 아이를 향해 물었다.
"사숙님, 사부님께선 과연 회생할 수가 있을까요?"
구양봉을 보는 아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음에 없는 소린 하지도 마. 네 사부가 죽으면 너야 좀 좋으냐? 그 두 가지 절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는데. 심산에 들어가 수련만 제대로 하고 나면 고금에 위풍을 떨치는 무학 대가가 될 텐데 말야. 넌 아마 사부님이 죽으면 속으로는 춤을 출 게다."
그 말에 당황한 구양봉은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랐다. 그가 더듬거리며 변명하려 하자 아이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됐다. 됐어. 나와 같이 사부님을 정실로 모셔 가기부터 하자."
구양봉은 아이와 함께 사부를 맞들고 조심스레 정실로 향했다. 몸을 움직이자 고통이 느껴지는지 신독행은 처절한 신음 소리를 냈다. 아이가 중얼거렸다.
"이런 꼴에 세상에서 가장 독한 독물로 자처하고 있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군. 그렇게 총명하다는 사람이 제자들한테 이런 꼴을 당하다니, 불쌍도 하지."
구양봉은 입을 다문 채 사숙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부님의 일세영명(一世英名)이 이 한 번에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구나. 사람이 살려면 정말 독하지 않고는 안 되는가 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사부님이 제자들에게 독하게 굴지 않았던들 제갈정네들이 무엇 때문에 이런 엄청난 일을 모의했겠는가…….'
정실로 들어간 그들은 노인을 큰 옥침대 위에 눕혔다. 종잇장같이 창백해진 신독행은 아직도 혼수상태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구양봉과 아이는 옆에서 조용히 노인을 지켰다.
어느덧 날이 어슴푸레 밝아 왔다. 닭이 홰치는 소리와 더불어 유운장 사람들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듯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마치 신독행이 깨어나면 찔러 죽이기라도 할 듯이 단도를 쥐고 놀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신독행은 숨이 막히는 듯 가쁜 숨을 헐떡거렸다. 하지만 아이는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앉아 뱅그르르 몸을 돌리는 재미에 빠져 신독행의 생명 따위는 염두에도
없는 것 같았다.
"사숙님, 사부님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구양봉이 아이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아이는 이빨을 하얗게 드러내며 웃어댔다.
"네 사부의 목숨은 천하에 가장 뛰어난 의원이 와도 구해 내긴 다 틀렸어. 그러니 우리 같은 것이 암만 걱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자낸 그저 눈물 몇 방울 쥐어짜는 성의나 보이면 돼."
"사숙님, 이 궤짝에 가득한 약 가운데 소용되는 약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사부님께 드리려면 어떤 약이 좋을까요?"
"그래, 그래. 약을 먹여, 약을 먹여야지. 독약을 먹여 죽으면 모든 것이 시원하게 끝이 나는 거고, 좋은 약을 먹여 되살아나면 비록 큰 효과는 없다 해도 몇 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겠지."
아이는 공연히 신명이 나서 떠들더니 약상자 앞으로 냉큼 뛰어갔다. 그는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 약이나 마구 가져다가 신독행의 입에 하나씩 던져 넣었다. 신독행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약들은 신독행의 입가에서 흘러내려 비단 이불을 더럽혔다.
"왜 이 모양이야! 약을 먹어야지. 약 먹어, 약을 먹으라니까."
아이는 짜증스레 떠들어대더니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신독행의 입을 벌리고는 다시 약을 던져 넣었다. 그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목덜미의 대혈을 꼬집자 약이 목구멍으로 굴러 넘어가기 시작했는데, 환약 하나가 너무 큰 탓인지 목구멍에 덜컥 걸리고 말았다. 아이는 신독행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어찌나 사정없이 북 치듯 하는지 구양봉은 은근히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주먹으로 두드린 탓인지 목에 걸렸던 약은 신독행의 목을 넘어 뱃 속으로 쑥 내려가는 눈치였다.
신독행은 반나절이 지나서야 서서히 깨어났다. 그는 암담한 우수와 처량한 비애가 서린 눈으로 아이와 구양봉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네가 날 구했구나."
노인은 아이에게 말했다.
"형님이 뭐 좋다고 내가 구해 줘? 난 형님을 사람으로도 안 보는데."
아이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내가 너를 두 번 구해 주고 이번엔 네가 날 두 번째로 구해 주었으니 우린 서로 빚갚음을 한 셈이구나. 다음엔 너도 날 죽일 수 있고 나도 너를 죽일 수 있게 되었다."
"이 인간 봐라? 목숨이 겨우 붙어 있으면서도 다음 타령이네?"
아이가 빈정댔다.
"개 같은 자식, 죽지 못해 까부느냐?"
신독행은 노하여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갈갈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는 고소하다는 듯 웃으며 냉큼 침대 머리맡에 올라앉더니 신독행의 얼굴에 대고 사설을 늘어놓았다.
"20년 전 형님이 맞아들인 제자가 누구요? 제갈정이지? 제갈정이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악인이 없다고 좋아하며 받아들였지요. 그런데 어떤가? 아둔하고 심보 더럽고, 악인도 제대로 된 악인인가? 이런 제자를 둔 게 잘했소?"
"글쎄 그건 잘못했네."
노인은 한탄했다.
"잘못한 줄 알면 어디 그 악과가 어떤지 맛 좀 보시오."
아이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신독행의 입 언저리에서 수염 몇 개를 쭉 뽑아 들더니 입으로 휘휘 불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5년이 지나 또 술집에서 거렁뱅이 떼를 만났는데 그 거렁뱅이들이 마침 한 아이에게 달려들어 두들겨 패고 있었지. 그 아이가 급한 나머지 거렁뱅이 주머니에서 독사를 뽑아 내어 휘둘러 댔겠다? 독사한테 물린 거렁뱅이들이 아우성 치며 야단이 났었는데 이것을 보고 형님은 그 아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이라고 기뻐하며 데리고 와 둘째 제자를 삼았지요? 그런데 이 속문성이라는
둘째 제자도 음흉하고 괴벽한 엉터리 악종임을 누가 알았겠소? 제자감이 아닌 걸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그래 이건 잘못이 아니오?"
신독행은 역시 풀이 죽어 대꾸했다.
"잘못이지, 그것도 큰 잘못이지. 세상에 진정한 악인이란 드물거든."
아이는 그 말에 히죽 웃더니 또 잽싸게 신독행의 입에서 수염을 몇 가닥 뽑아 냈다. 신독행의 얼굴이 아픔으로 일그러졌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구양봉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 두 사람이 말끝마다 운운하는 그 진정한 악인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가.
"사부님, 사숙님, 두 분께선 말끝마다 진정으로 큰 악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는데 도대체 진정한 악인이란 어떤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구양봉이 참다못해 이렇게 묻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날 보고 네 사부님을 보면 안다. 우린 세상에서 제일 큰 두 악인들이다. 난 형님보다 못됐고 형님은 나보다 악하고."
아이가 웃으며 대답하자 신독행이 코방귀를 뀌며 말했다.
"네가 나보다 악하고, 내가 너보다 못됐지."
둘은 누가 더 악한가를 가지고 한동안 옥신각신하더니 아이가 먼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만둡시다. 그만둬요. 나이 먹은 늙은이가 나 같은 어린애와 다투다니, 나이가 아깝지 않소?"
"이 녀석아. 네가 아이냐? 자라지 못해 그렇지, 꾀는 누구보다 멀쩡한 놈이."
둘은 또 옥신각신하였다.
"사부님, 사숙님, 진정한 큰 악인이란 어떤 사람인지나 말씀해 주십시오. 제갈정이나 속문성도 큰 악인에 드나요?"
구양봉이 물었다.
신독행이 말 같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자 아이 쪽에서 입을 열었다.
"우리 구사독옹 문하는 악인도 여느 악인이 아니라 천하의 가장 큰 악인이 되는 게 소원이지. 평생 가장 탄복하는 사람이 셋이 있는데, 첫번째는 진나라 개국 황제인 진시황 영정이야. 그는 젊어서 진왕(秦王)이 되었는데,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중부(仲父), 기실은 그의 친아버지인 여불위를 죽였지. 그리고 그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살아서 아이 둘을 낳았는데 그 아이들을 산 채로 마대에 넣
고 때려죽였어. 그리고 6국을 삼키고는 6국의 재물은 물론 미녀란 미녀들은 몽땅 수레로 끌어다가 몇십 리나 되는 아방궁을 지어 놓고 밤낮으로 뚱땅거리면서 온갖 향락을 다 누렸지. 후에 그가 죽자 다른 사람이 그 아방궁에 불을 질렀는데 타는 데만도 한 달이 넘게 걸렸다나? 그래 이 진시황이 천하 최고의 악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신독행도 진시황을 흠모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악인은, 그 사람은 당나라의 두 황제와 놀아난 여인인데, 태종과 고종 두 황제의 귀비가 되어 황후 노릇을 했지. 아들 중종(中宗) 때에 이르러서는 태후 노릇에 성이 안 차 아들을 제치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지,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라 한고 자기 이름은 무조(武 )라고 부르게 했는데, 이 조( )자는 자신이 직접 만든 글자로 해와 달이 떠있는 하늘이란 뜻이지. 그러니 그 야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잖아? 그리고 여자만 남의 희비가 되어 무릎을 꿇을 것이 아니라 남자도 희비가 되어 무릎을 꿇어야 한다면서 남자들을 떡 주무르듯 가지고 놀았는데, 조금만 비위에 거슬려도 파리 잡듯 죽여 버리곤 했지. 그리고 계집들도 과거 시험을 치르게 하였는데 그땐 여자들도 재주가 있으면 과거하여 벼슬할 수 있었지. 이렇게 그 여자로 인하여 천하의 남자 일과 여자 일이 뒤
죽박죽 뒤집어지게 되었어. 사람이 살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주 큰 재주잖아?"
신독행은 어느새 숙연한 기색이 되어 있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에 대해 경모의 심정을 금치 못하는 눈치였다. 구양봉은 그들의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진시황 영정을 폭군이라고 한다. 6국을 삼키고 무고한 사람을 수 없이 죽였을 뿐만 아니라, 중부를 죽였으니 인정이 없고, 동생들을 산 채로 때려죽였으니 의(義)가 없고, 장성을 쌓느라고 무수한
창생을 죽였으니 제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쌓았다 해도 폭군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런 폭군을 숭배하면서 그런 사람이 되기가 소원이라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게다가 여인이라면 단정하고 현숙하고 부드러워야 할진대 남자처럼 세상을 쥐고 흔들려 해서야 어디 여인다운 여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측천무후가 대주 황제가 된 다음 후궁엔 남자 첩이 활개치고 음탕한 일이 천하에 널리 퍼졌는데
세상 천지에 이런 악한 여자는 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부와 사숙이 그런 측천무후를 이토록 칭송하니 구양봉으로서는 납득하려야 납득할 수가 없었다.
구양봉이 어이가 없어 멍청히 앉아 있자 아이가 놀리듯 말했다.
"자낸 나쁜 일을 하고 싶지 않나? 나쁜 짓을 하다가 남에게 들킬 때 기분이 어때? 기쁘지 않아? 악인이 돼 봐. 제 마음대로 아무 짓이나 할 수 있어 좋거든. 세상에 큰 악인이 또 하나 있는데, 나와 네 사부님이 모두 감복하는 사람이야. 그 악인이 누군가 하면 남송의 재상 진회란 인물이지. 그만하면 나쁜 것도 합격이고 악한 것도 합격이야. 남송 천하를 아예 엉망진창을 만들어 놓았거든.
뻔히 이겨 놓고도 악비를 억울하게 죽이고 금에게 노예처럼 해마다 숱한 공물을 바치게 하였으니 날고 뛰는 사람이 아닌가? 천하에 악인이 적지 않지만 진회처럼 나쁘고도 능력 있는 자는 별로 없거든. 듣자 하니 임안 철왕묘(鐵王廟)에 무릎을 꿇고 있는 동상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진회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처인 왕씨라더군. 어떤 사람이 진회의 동상을 보고 성이 나서 주먹질을 냅다 했
는데 주먹이 피투성이가 되는 줄도 몰랐을 정도래. 진회에 대한 증오심이 그 정도면 진회는 실로 굉장한 악인이지. 자네도 악인이 되려면 제멋대로 아무 짓이나 할 줄 알아야 하네. 남이야 어떤 말을 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말야. 이렇게 사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기나 하나?"
구양봉은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그는 글을 읽으며 언제나 선악을 분별하여 자기를 단속하는 삶을 살아왔지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건 상상조차 안 해 봤다. 정말 사람이 저 하고 싶은대로 자유자재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쾌락일까? 하지만 사람들이 어울려 세상을 살아가려면 도덕과 윤리는 꼭 지켜져야 하는 게 아닐까? 구양봉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때 신독행이 말했다.
"구양봉, 머잖아 제갈정 패거리가 다시 돌아와 날 죽이려고 할 게다. 두고 봐라, 내 말이 틀림없을 테니."
구양봉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제갈정이 사부님께 사죄하러 온다면 모르겠지만 다른 목적으로 찾아온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었다. 구양봉이 할말을 찾지 못해 묵묵히 앉아 있는데 신독행이 그의 귀에 대고 다시금 소곤거렸다.
"난 아무래도 살 것 같지 않구나. 너는 이미 나한테서 신공 두 가지를 얻었으니 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어서 달아나거라. 내가 죽기만 하면 사숙도 너를 가만 놔 두지 않을 거다. 죽일 거야."
구양봉은 흠칫 놀랐으나 사부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사부님을 구해 준 사숙이다. 그런데 설마 나를 죽이기야…….'
그는 속으로 생각하며 사숙을 바라보았다. 구양봉은 사숙이 금방 세 악인을 칭송하던 말을 떠올리곤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러나 구양봉은 사부를 저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사부님, 전 여기서 사부님을 구완하겠습니다. 사부님께는 현재 병구완할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네 사숙은 무공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도망가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워."
사부는 한숨을 쉬었다.
구양봉은 사숙을 돌아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날 죽일 테면 죽이라지.'
밤은 지겨울 정도로 천천히 흘러갔다. 세 사람은 이제 지친 듯 각자 침묵을 지켰다. 신독행은 구양봉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시일이 지나면 저 구양봉도 진정한 대악인이 될 놈이다. 나만 살아 있으면 구양봉은 성미도 점차 사납게 되고 사람도 점차 악하게 되어 나 같은 늙은 독물이 될 것인데, 내 목숨이 경각을 다투게 되었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구나. 저게 약빠르지 않으면 저 조그만 귀신 같은 녀석이나 제갈정 패거리에게 꼼짝없이 당할 텐데. 그러면 구양봉에게 가르친 신공 두 가지가 그들의 손에 넘어갈 게
뻔한 데, 차라리 구양봉을 내 손으로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구양봉은 사숙이 어린 몸에 고생이 많다는 생각에 신독행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헤아리지 못한 채 말했다.
"사숙님, 사숙님은 돌아가 쉬시지요. 제가 사부님을 돌봐 드리다가 임종하실 것 같으면 사숙님을 부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사숙은 빙긋이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있어야지. 그래야 큰일을 그르치지 않지."
"큰일이라니요? 무슨 일인치요? 저한테 알려 주시면 제가 때를 어기지 않고 깨워 드리지요."
"네가 날 깨워 줘?"
사숙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자식, 뭘 알기나 하고 하는 소리냐? 난 네 사부님이 숨을 거두면 두 가지 일을 해낼 계획이야. 한 가지는 화공대법(化功大法)으로 네 사부의 공력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네 사부의 몸을 들추어 그 두 신공을 적은 비적을 찾아내는 거야. 그런데도 날 깨워 주겠다는 겐가?"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했다.
"사부님, 저 사숙님이 지금 농을 하시는 겁니까?"
신독행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농이 아니다. 내가 죽고 나면 너도 죽일 거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 시체를 짓이겨 맘껏 원한을 풀 게다."
구양봉은 비로소 자신이 처한 위험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사부는 비록 무공을 지니고 있지만 지금은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하나? 사부님이 돌아가시면 나 혼자서 싸워야 하는데 좋은 방책이 없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부의 낯빛은 점점 더 창백해지고 숨결도 점점 가늘어졌다. 구양봉은 황황한 마음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부가 죽으면 자기는 사숙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밤이 깊어 가고 사위가 고요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부가 힘없는 목소리로 사숙을 불렀다.
"자우(自雨), 여보게, 내가 구양봉에게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몇 마디 가르칠 테니 옆에서 엿듣지 말게."
그러자 아이가 화를 벌컥 냈다.
"둘 다 죽은 송장이나 다름없는데 내가 엿들을 필요가 뭐 있소? 난 형님이 죽고 나면 저것도 죽일 작정이오. 그러면 저것이 무릎을 꿇고 손발이 닳도록 빌며 목숨을 구하고자 봉황력과 합마공의 비결을 토설할 게 뻔한데 내가 뭣 때문에 좀스럽게 엿듣는 짓을 한단말요?"
"내가 구양봉에게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알려 주면 구양봉이 자네를 이길 텐데 겁나지 않나?"
"구양봉이 아무리 무공을 닦은들 한 마리 두꺼비밖에 더 될까? 겁나긴 뭐가 겁난단 말요?"
아이는 가소롭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댔다.
"구양봉, 내 곁으로 가까이 좀 오너라."
구양봉은 사부의 말대로 바짝 다가앉았다. 사부의 창백한 모습에 구양봉은 목이 메었다.
'사부님이 죽더라도 그 시체를 사숙이 능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숙의 손아귀에서 사부님을 구해 내야 할 텐데……."
구양봉은 암만 생각해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결국 이렇게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사숙이 사부님을 다치기만 하면 나도 생사 결단으로 사숙과 싸우리라.'
신독행은 구양봉을 향해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내가 죽게 되면 네 사형들처럼 속으로 기뻐하겠지?"
사부의 뜻하지 않은 말에 구양봉은 급히 대답했다.
"사부님, 전…… 전……."
기뻐해도 좋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늙은 독물의 제자라고 하겠느냐."
"사부님,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로지 어떻게 해야 사숙님이 사부님을 손대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를 궁리했을 뿐입니다."
신독행은 구양봉을 보며 한동안 숨을 헐떡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나 신독행은 평생 악한 짓만 한 사람인데 너와 같은 착한 제자를 얻게 되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구나."
기쁘다는 소리인지 못마땅하다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구양봉은 사부의 심란한 심중을 헤아려 묵묵히 듣고만 앉아 있었다.
"자, 이런 소린 그만두자. 아무튼 너와 나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는 모양이니 어쨌든 합마공 내공심법을 전수해 주겠다."
천하기공(天下奇功)인 합마공을 잘못 수련하다가는 주화입마가 되어 오히려 화를 입음을 잘 알고 있기에 신독행은 지금까지 구양봉에게 합마공의 초보적인 입문에 관한 것만 가르쳐 주었을 뿐이지 합마공의 내공심법은 가르쳐 주지 않았었다. 그러나 목숨이 위태로워진 지금, 구양봉에게 내공심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앞으로 다시는 가르쳐 줄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공심법을
있는 그대로 가르쳐 주려는 것이었다.
이를 짐짓 모르는 척하며 앉아 있던 아이는 속으로 비웃었다.
'신독행, 이 늙은 것아, 넌 정말 총명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구나. 네가 여기서 내공심법을 얘기하면 내가 못 들을 것 같으냐? 저 미련한 놈이 미처 알아듣기도 전에 내 쪽에서 먼저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터득할 터인데, 네 놈이 죽은 뒤 저 제자 놈마저 내가 죽여 버리면 천하에 합마공을 아는 사람은 나만 남을 게 아니냐?'
아이는 쾌재라도 부를 듯 득의에 차서 희색이 만면해졌다.
"자우야, 구양봉에게 합마공을 가르치는 것을 몰래 엿들으면 안된다. 천하 악인들은 정정당당하게 행동해야 하느니라."
신독행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어린 사숙은 구양봉과 신독행을 번갈아 살핀 뒤 대꾸했다.
"좋아요. 듣지 말라면 그렇게 하겠소."
아이는 제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내가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면 저 못된 화상이 중요한 대목에서 얼버무리고 제대로 말해 주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런 상태로 영감태기가 죽어 버리면 내가 어디 가서 합마공을 완벽하게 터득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구양봉에게나마 제대로 전수하도록 피해 주자. 어쨌든 구양봉은 내 초롱에 든 새요, 구양봉의 것이 조만간에 내 것이 될 텐데 서두를 까닭이 없지.'
아이는 덧붙여 말했다.
"영감, 그 잘난 합마공이 뭐라구 나를 이렇게 업신여기는 거야? 나는 합마공이라면 진저리가 나는 사람이야. 조만간에 난 영감의 저 보배 제자와 더불어 합마공을 매장해 버릴 생각이오. 그래서 천하에 합마공의 뿌리를 아예 없애 치우고 말겠어."
그가 합마공을 수련하다가 주화입마가 되었기에 합마공을 이처럼 증오하고 있다고 생각한 신독행은 그가 정말 나중에 구양봉을 생매장시킬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신독행은 눈짓으로 구양봉을 자기 곁에 더 바싹 다가앉게 했다.
구양봉은 사부가 자기에게 합마공 비결을 얘기해 주려는 줄 알고 사부의 곁에 바싹 다가갔다. 갑자기 신독행이 손으로 침대 다리를 부여잡고는 소리를 내질렀다.
"쾌도!"
그 순간 침대는 '쩍' 소리를 내며 그대로 땅 밑으로 꺼져 내렸다. 어린 사숙은 뜻하지 않은 상황에 깜짝 놀라 잽싸게 침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런데 돌연 뒷덜미에 칼날이 날아드는 듯한 섬뜩함이 느껴졌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침대에서 손을 떼고 얼른 몸을 돌렸다. 침대가 내려감과 동시에 거기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왔던 것이다. 그는 바로 구양봉이 유운장에 들어설 때 만났던 칼날처럼
날카로운 얼굴의 쾌도라는 사나이였다. 쾌도는 매우 얇은 절도(切刀)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칼 쓰는 법이 놀라울 정도로 정묘하고 번개 같았다. 쾌도는 시퍼런 칼날을 정신없이 휘둘러 순식간에 어린 사숙을 벽 한구석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사이 침대는 땅 밑으로 사라지고, 어느새 양옆으로부터 석판 두 개가 밀려 나와 입구를 딱 막아 버렸다. 신독행과 구양봉은 이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쾌도에게 분노를 느꼈다. 쾌도만 아니었어도 그는 벌써 신독행을 쫓아 밀실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제 어디 가서 신독행을 찾으며 합마공의 내심공법은 어디 가서 알아낸단 말인가?
"쾌도 이 놈아, 내 너를 박살내고 말겠다!"
아이는 악이 받쳐서 미친 듯이 덮쳐 들었다.
사실 쾌도는 오래 전부터 지하 밀실에서 기다리다가 침대 다리만 움직이면 뛰쳐나오기로 돼 있었다. 밀실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오로지 칼 쓰는 법만 연구했다. 그래선지 칼을 휘두르는 솜씨가 번개 같이 날쌘 것은 물론 그 동작도 맹호같이 사나웠다. 그는 아이를 상대로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아이는 처음엔 쾌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어떻게 하면 밀실로 들어가 신독행을 죽
이고 구양봉의 입에서 내공심법을 받아 내는가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점점 사납게 달려드는 쾌도의 칼끝에 그만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의복이 찢어지고 살가죽이 베어져 뻘건 피가 내비쳤다. 몸놀림이 민첩했으니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그 칼에 배가 두 쪽으로 갈라질 뻔했다.
아이가 격분해서 소리쳤다.
"내도, 네 이 놈! 당장 달아라든가 아니면 내 손에 죽을 각오를 해라!"
그러나 그의 위협에는 아랑곳없이 쾌도의 칼은 점점 독해지고 날쌔졌다. 아이는 참다못해 맞받아 나가며 연속 몇 장을 쳐 갈겼다. 장풍이 어찌나 센지 쾌도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이는 더욱 묘한 몸놀림으로 쾌도의 칼을 요리조리 피하더니 뜻하지 않은 순간에 쾌도의 오른쪽 손목을 텁석 잡았다. 다급해진 쾌도는 칼로 아이를 치려고 했으나 아이는 틈을 주지 않고 두 손가
락으로 쾌도의 수양명대장경맥(手陽明大腸經脈) 위의 하렴(下廉)·편력(偏歷) 두 혈을 잽싸게 짚어 버렸다. 그러자 쾌도의 얼굴은 금세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주저앉더니 죽을 각오를 한 듯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아이는 쾌도의 출현이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듯 물었다.
"도대체 신독행이 너한테 무슨 이득을 주었기에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드는 거냐? 나한테 밀실로 들어가는 길만 말해 다오. 그럼 내 너를 죽이진 않을 테니."
그 말에 쾌도는 처연히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죽어야 내 처자를 살려 주겠다고 했소. 내가 죽지 않으면 처자가 죽게 되오. 그러니 난 죽어도 원통하지 않소."
말을 마치자 쾌도는 갑자기 덥석 칼을 집어 들었다. 곁에서 말릴 새도 없이 쾌도의 목에서는 어느새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아이는 화가 나서 죽은 쾌도의 시체에 화풀이를 한 뒤 밀실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 입구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집안을 빙빙 돌며 구양봉과 신독행을 향해 갖은 욕설을 퍼부어 대다가 문득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이렇게 찾아서야 그 놈들을 찾을 수가 없지. 온 유운장 사람들을 불러와야 한다. 장주님이 큰 봉변을 당하여 어디론지 사라졌다면 그들이 모두 찾으러 다닐 게 아닌가? 그러면야 밀실을 못 찾을리 없지. 어떻게든 내 손에 걸려들기 만 해 봐라. 그 길로 저승행이 될 테니까.'
그는 사람들을 찾으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구양봉과 사부는 향이 반 대쯤 탈 시간이 지나서야 지하에 이르렀다.
구양봉이 정신을 가다듬어 사위를 둘러보니 사면의 벽이 모두 돌로 쌓여진 크나큰 석실이었다. 석실 안에는 식량과 물이 있고 탁자와 걸상, 또 다른 물건들도 있어 얼마간 살아가는 데는 걱정 없을 것 같았다.
"사부님, 여기가 어딥니까?"
신독행은 희미하게 냉소를 지었다.
"여긴 내 무덤이다."
'그렇다면 사부님은 나를 여기에 순장시킬 셈인가?'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했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사부를 부축하여 의자에 앉혔다.
"내가 합마공을 가르쳐 주면 넌 나를 죽이고 이 밀실을 속히 나가라. 그렇지 않았다간 이 밀실에 갇혀 너도 죽는다."
"사부님, 사부님 병구완을 하여 같이 나가겠습니다."
신독행은 차갑게 웃으며 더 말이 없었다. 구양봉은 사부를 의자에 옮겨 앉힌 다음 물을 한 그릇 떠다가 탁자 위에 놓았다.
신독행이 구양봉을 보고 갑자기 말했다.
"너는 지금 네 궤계가 이루어졌다고 속으로 기뻐하고 있겠지? 그래, 나하고 같이 있게 되었으니 합마공, 이 천하 기공을 이젠 얻게 되었다고 정말 믿겠지?"
구양봉은 기가 막혀 어이없는 웃음만 웃었다. 사부의 말에 무어라 대답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는 왜 침대가 떨어져 내리는 순간 뛰쳐나가지 않았느냐?"
"사부님만 놔 두고 나만 살자고 뛰쳐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전 사부님과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 오직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침대가 떨어질 때 저도 사부님과 함께 떨어져 내려온 겁니다."
신독행은 구양봉의 말이 미덥지 않은지 희미한 냉소만 입가에 머금었다.
구양봉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아 사부와 마주앉은 채 석실을 휘 둘러보았다. 석실은 백 사람도 더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공간이었다. 그런 큰 공간에 두 사람만 앉아 있자니 몹시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신독행은 구양봉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 쾌도가 우리 침대 주변에서 나타났는지는 묻지 않느냐?"
구양봉은 사부의 묻는 뜻을 지레 짐작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사부님이 말씀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의 은혜에 감격한 쾌도가 은혜를 갚기 위해 날마다 사부님의 침대 주변을 지키고 있다가 사부님이 위험하다 싶으니 보호하고자 뛰쳐나온 거겠지요."
그의 말에 신독행은 앙천대소를 했다.
"거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 그래, 내가 그렇듯 인정 있는 착한사람 같아 보인단 말이냐? 내가 천하에서 제일 악한 악인으로 보이지 않는단 말야? 난 지금껏 누구에게도 착하게 대한 적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착하게 대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게끔 되어야 일이 제대로 되느니라. 쾌도는 내가 두려워 그러는 거다. 쾌도가 왜 날 두려워하는지 아느냐?"
"그건 모릅니다."
구양봉의 대답에 노인은 아주 자만스레 말했다.
"내가 그 놈의 처와 아들을 한 곳에 데려다 가두었다. 아주 좋은 곳이지, 조용하고. 그 놈은 처자와 매달 반나절만 만날 수 있지. 그래, 한 달에 반나절만 만나도 만족스러울까?"
구양봉은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처와 자식을 사랑한다면 한 달에 반나절만으로야 절대 만족스러울 리가 없지.'
"물론 만족스러울 리 없겠지. 나는 그 놈에게, 그 놈이 죽지 않고 살아 여기에서 한 달 있으면 처자와 반나절을 만날 수 있고, 그 놈이 두 달 여기 있으면 처자와 하루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야 그 놈이 날 위해 애를 쓰거든. 알겠느냐? 구양봉, 어째 말이 없느냐?"
"말할 게 있어야지요."
"난 중상을 입었어. 장차 네가 여길 나가게 될 경우 너는 그 못된 다섯 형제 놈들을 모두 죽여 줄 테냐? 내 마귀 같은 사제를 꼭 죽여 버릴 테냐? 어디 대답해 봐라."
구양봉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그럴 수 있다고 대답을 하면 장차 그 여섯을 꼭 죽여야 하는데, 나 같은 무공을 갖고야 그들을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않으면 또 사부님이 화를 낼 텐데 그러면 사부님의 몸에 얼마나 해로운가.'
구양봉이 대답을 하지 않자 신독행은 버럭 성을 내었다.
"그러기 싫단 말이지? 싫으면 좋다. 어서 여기를 나가!"
구양봉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부가 중상을 입어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어떻게 혼자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가, 어서 가란 말이야. 난 너 따위들은 보기 싫다. 너 같은 인간들은 좋은 놈이 하나도 없어. 너도 나쁜 놈이야. 나를 속여 절세신공이나 얻어 볼까 해서 지키고 앉아 있기만 하는 놈, 네 놈의 심보를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구양봉은 사부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 옆으로 약간 비켜 앉았다.
'다섯 제자들에게 참혹하게 중상을 입은 판국에 속이 좋을 리 없지. 그런 와중에 좋은 말이 나오길 기대하는 게 무리지.'
그런데 신독행은 구양봉이 비켜 앉자 자기가 싫어서인 줄 알고 더욱 성이 나서 소리쳤다.
"구양봉 이 놈, 너도 그놈들과 같은 놈이다. 너도 날 속이려고만 해!"
신독행은 또 왈칵 피를 토하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부님, 고정하시고 좀 쉬세요. 이렇게 성을 내시면 몸에 해롭다니까요?"
신독행이 냉소를 머금으며 악이 받쳐 소리쳤다.
"뭐? 사부님? 상처가 어떻다고? 네깟 놈이, 네가 어떤 놈인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나한테 그런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환심을 사려 들어?"
그는 돌연 구양봉을 덮쳤다. 중상을 입었지만 손엔 그래도 강한 힘이 남아 있었다. 그는 구양봉의 목을 움켜쥐고 조이기 시작했다..
"사부님,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세요……."
구양봉은 대항해 볼 수도 있었으나 차마 사부와 싸울 수가 없어 애원을 하다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그가 깨어나 보니 사부는 자기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기분은 좀 맑아진 듯했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
"넌 악인이 되려면 멀었어. 넌 내 제자가 될 자격이 부족하다. 네가 악인이었다면 날 죽였을 게다."
신독행이 구양봉의 목을 조일 때 구양봉이 이미 갖고 있는 정도의 합마공만 썼어도 신독행은 당장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구양봉은 마음이 약한 탓으로 도리어 신독행에게 목 졸려 죽을 뻔한 것이다. 이 점은 구양봉이나 신독행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신독행은 탄식을 했다. 변경에서 겨우 찾아내어 데려왔다는 구양봉이 악인이 아니고 우유부단한 서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이런 인간인 줄 애당초 알았다면 벌써 없애 치웠을 텐데……."
신독행은 몇 번이고 푸념하면서 구양봉을 노려보았다.
"난 합마공을 가르쳐 줄 수 없다. 너 같은 위인은 합마공을 완전히 익혀서 고수가 될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강호에서 남의 손에 죽기나 할 것이니 그러면 내 합마공의 가치만 떨어뜨리는 꼴이 되지. 이렇듯 내 명성이나 더럽힐 짓을 내가 뭣 땜에 하겠느냐?"
구양봉은 말이 없었다.
'나더러 자기를 죽이지 않았다고 야단인데,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어쨌든 사부가 아닌가? 사부를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이건 생각도 못할 일이다.'
"구양봉, 세상에는 간악도 큰 간악이 있고 작은 간악이 있는 법, 너는 작은 간악에 속하는 소인배다. 마음이 착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가령 조금 전의 그런 일이 강호에서 생겼다면 너 같은 위인은 아무런 대책 없이 벌써 죽었을 게다. 대단한 기공을 가졌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큰 간악을 가진 자만이 큰일을 하고 큰 영웅이 되는 법이야. 알겠느냐?"
구양봉은 그의 말을 되새겼다. 가령 방금 자기가 사부의 손에 죽었다면 값없는 원귀밖에 더 되었겠는가. 아무런 큰일도 못해 보고 여기서 초개처럼 죽임을 당했다면 그처럼 덧없는 인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는 사부님의 가르침이 옳은지 어떤지 단정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공감을 느꼈다.
신독행은 또 말했다.
"인간이란 좋은 일을 하기는 쉬우나 나쁜 일을 하기는 쉽지 않느니라. 나쁜 일에는 대저 세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그 나쁜 일이 자기와 남에게 모두 좋은 점이 없는 것이지. 이런 나쁜 일을 하는 인간은 따라 배울 바가 못 된다. 이런 인간을 보면 죽여 버려. 공연히 천하 대악인의 명성만 더럽히지 않게 말이야. 두 번째 부류는 나쁜 일을 한 것이 남에게는 조금도 좋은 점이 없지만 자기
한테는 좋은 점이 있는 것인데, 이것도 소인지견(小人之見)에 불과하기에 나, 이 늙은 독물은 좋아하지 않는다. 세 번째 부류는 그들이 해놓은 나쁜 일이 자기에게도 좋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좋은 점이 아주 많은 것이지. 나쁜 일을 한 것이 자기에게는 큰 위업이 되고 또 많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 된다면 왜 이런 일을 안 하겠느냐? 네 사숙이 말하던 그 측천무후를 봐라. 자기는 황제가
되었고 남에게는 좋은 일을 좀 많이 했느냐? 측천무후가 너처럼 주춤거리기만 했다면 그런 큰일을 시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구양봉은 사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나 남에게 모두 좋은 일이라면 살인을 못할 것이 무엇인가? 세상에 살인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문인은 문필로 사람을 주살하고, 무장은 창검으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판에 흉악하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는가? 사숙도, 다섯 사형들도 모두 악인이며 살인하는 자들이다. 내가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죽일 것이며, 내가 살려면 그들을 죽여야 한다. 그들은 죽어 마땅한
나쁜 놈들이다. 그들이 죽지 않는데 내가 왜 먼저 죽겠는가?
구양봉이 생각에 잠겨 있음을 보고 신독행이 또 입을 열었다.
"바보 같은 녀석, 이젠 머리가 좀 돌아가느냐? 그렇지 않다면 합마공을 더 배울 것 없이 일찌감치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 앞으로 봐라. 네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그 다섯 놈들이 꼭 너를 찾을 거다. 네가 어디로 도망가든지 놈들은 너를 찾아내어 합마공을 알아내고 그 다음엔 너를 죽여 없앨 거야."
"전 합마공을 끝까지 배우지 못했는데요."
구양봉이 침울하게 말했다.
"그런 말은 나한테 할 필요가 없어. 그 놈들한테 가서 해. 그 놈들한테 난 합마공을 채 못 배웠습니다 하면 그 놈들이 아주 잘 믿겠다. 곧이듣겠어."
신독행은 어이없어 코웃음을 쳤다.
구양봉은 신독행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놈들은 구양봉한테서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알아내려고 괴롭힌 끝에 결국 그를 죽일 것이다. 죽이지 않아도 병신을 만들어 죽느니 만도 못하게 만들 것이다. 구양봉은 가슴이 떨렸다. 어찌하면 좋을까? 놈들에게 죽기보다 여기서 천하 무적인 합마공을 익혀 놈들을 죽이는 편이 낫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