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글 최봉실 / 기획 오연호]

재개발 아파트 옆으로 밤골 마을 지붕들이 낮게 드리워져 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고 불리던 대규모 난곡 마을이 철거된 지 6년, 그곳은 지금 아파트 숲으로 변해 있다. 그런데 재개발로 우뚝 올라선 그 아파트 숲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작은 마을이 있다. 15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밤골 마을이다.
옛 신림 10동에 속하는 이곳은 지금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관악구 삼성동 30통 일대. 난곡 아파트들과 관악산 사이를 가르고 있는 호암길을 따라 신림10동 동사무소를 지나쳐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납작하게 깔려 있는 동네가 바로 밤골이다.
주변이 온통 아파트 숲인데 이곳만은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싶게 산골의 아담한 동네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마치 예전의 ‘달동네 난곡’을 축소해 놓은 듯하다. 집 풍경, 사람 풍경이 그렇다. 큰 도로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어느새 서울은 잊혀지고 시골 마을이 아래로 길게 펼쳐진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정성껏 가꿔진 아담하고 단정한 텃밭들이 먼저 인사를 한다. 마을 어귀 집 앞 커다란 아궁이에 장작이 타고 있고 몇몇 주민이 모여 한판 상을 벌이고 있다.

호암선 도로 쪽에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밤골의 텃밭이 먼저 인사를 한다.
숯불에 고기를 굽던 심정임(62)씨는 인사는 안 받고 고기부터 입에 넣어 준다. 다른 이가 먹던 젓가락도 쥐어 주며, ‘우선 이거부터 다 먹어라’며 의자까지 밀어 준다. 막걸리도 한 잔 받으라고 건네기도 하고, 옆에 있던 이웃이 얼른 가서 요구르트 한 줄을 들고 나와 하나 떼어 준다.
심정임씨는 남편 이재영(63)씨와 함께 이곳에 오기 전 강남에서 양잠점을 운영하고 내 집도 장만하면서 살았지만 “이리저리 투자하다 쫄닥 망해 이리로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여한 없는 통쾌한 웃음으로 말한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낙이 있다”고.
그렇게 강남에서 여유있게 살다가 이곳에 와서 살면 종종 힘들어지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는 이구동성으로 큰소리다.
“어휴, 그러면 못 살지. 그저 반추해 보는 정도로는 생각해 보지만, 그런 생각은 안 해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사는 거지. 이렇게 사니까 얼마나 좋아. 이웃끼리 이렇게 늘 모여 밥도 나눠 먹고.”
“정말 이런 데도 있구나 싶었죠. 처음엔 못 살 줄 알았는데, 벌서 10년이나 됐어요. 없어 보니까 없는 사람 심정을 알겠더라구요. 내가 없어 봐야 알지.”
밤골 골목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곳곳에서 남자, 여자,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가리지 않고 몇 사람씩 둘러앉아 김장 준비가 한창이다. 사진 좀 찍자는 말에 사진은 찍지 말고 ‘이거나 드셔보세요’하며 반짝이는 붉은 김치를 돌돌 말아 다짜고짜 입에 집어넣어 준다. 입에서 살살 녹는 김치 맛이 환상이다.
마을 길과 나란히 이어지는 언덕에는 텃밭이 즐비해 있다. 주민들이 하고 있는 김장은 죄다 이곳에서 손수 기른 유기농 배추들이다. 김장하던 주민들이 저쪽에 있는 사람을 부르며, ‘저 사람이 마을 사정을 제일 잘 안다’고 소개시켜 준 정상준(57)씨. 정씨는 90년대 초, 하던 일이 망해서 가족 데리고 방배동에서 빈손으로 이곳으로 왔다.
“주민들이 따사로이 보듬어 주어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된 사람입니다. 독불 장군도 없어요. 서로 돕고 살죠. 그 고마움에 상대적으로 젊은 제가 마을의 교량 역할을 하게 된 거죠. 마을 주민들이 서로 마음이 잘 맞아 모이라면 모이고 흩어지라면 흩어져요. 그렇게 함께 모여 청소도 하고 그러죠 ”
마을이 떨어진 휴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낮게 드리운 마을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그는 마을 주민들을 소개했다.
“거의 자급자족하고 사는 셈이죠. 여기 주민들은 겸손한 사람들이예요. 자기 분수를 알고 욕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같이 좋은 데가 없죠. 사고부터가 달라요. 특별나게 잘 살고 못 살고가 없어요. 3D 업종에 종사하며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 밤골 마을도 달동네 난곡의 아픔을 반복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뉴타운 정책 때문이다. 이곳이 뉴타운 신림2재정비촉진구역으로 지정되어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신림2구역의 전체 700여 가구 가운데 밤골에는 1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서울시는 밤골을 이 뉴타운에 포함시키면서 이곳을 공원녹지화할 계획이다. 그러니까 오순도순 살고 있는 서민 마을을 갈아엎어서 뉴타운을 위한 공원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런 뉴타운 계획에 김삼순(65)할머니는 긴 한숨을 짓는다. 그는 전에 달동네 난곡에서 살았다. 그곳이 재개발 되어 어렵게 이곳으로 와서 방을 마련했는데 다시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굽은 허리와 염증으로 곪은 무릎을 이끌고 폐휴지를 주우러 다니는 김 할머니는 “또 어디로 가냐”며 불안해 한다.
“걱정이예요. 여기도 재개발 한다잖아요. 이런 데도 놔둬야 우리도 사는데, 너무 못할 노릇이야. 설사 임대 아파트를 준다해도 내 수입으로는 임대료 내기도 벅차서 그곳에 못 살아요.”

난곡 재개발에 밀려 이웃 밤골로 온 김삼순(65) 할머니. 인터뷰를 마치고 바쁘다며 바로 일을 나간다.
여느 달동네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도 세입자가 2/3가 넘는다. 50%가 기초수급자며 60%가 노인이다. 독거노인, 한부모 가정, 소년소녀 가장들이 많은 것도 이 달동네의 특징이다.
아래쪽 골목에는 또 한 분의 할머니가 아궁이에서 콩을 볶고 있었다. 구수한 콩 볶는 냄새처럼 반기는 할머니의 미소도 구수하다. 이 할머니도 이곳에서 낳은 작은 아들이 벌써 40살. 할머니처럼 3대째 사는 이들도 제법 된다. 이 곳 주민들의 평균 거주 기간이 35년.
할머니의 남편은 아파트 미화원 일을 한다. 재개발 된다고 하는데 어떠냐고 물었다.
“40년 넘게 살았는데 헤어지니까 안 좋지. 늙어 죽도록 여기 살았으면 좋겠어. 벌이도 조금인데, 아파트에 들어갈 엄두도 안 나고. 이곳이 난방이 안 돼서 석유를 때니까 돈이 많이 드는데 도시 가스만 넣어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해서 그냥 여기 살았으면 해요.”
서울시는 꼭 이 밤골 마을을 갈아엎고 뉴타운을 위한 공원으로 만들어야 하나? 서울시가 뉴타운의 부작용을 점검하기 위해 민간 전문가들로 뉴타운 자문단을 꾸려 그동안의 사업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오세훈 시장이, 달동네 마을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속의 삶도 제대로 들여다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