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검
인간에게 얼굴은 영원한 숙제다. 내 마음대로 내 얼굴을 바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한 번쯤 안 해본 사람은 없으리라. 그런 인간의 소망에서 태어난 기예가 있다. 중국의 얼굴 바꾸기 기예, ‘변검’이 그것이다. 영화 <변검(變臉)>(오천명, 1995)은 그 배우기 힘든 얼굴바꾸기 기예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다. 중국의 4세대 감독 오천명이 미국 등지를 유랑하다 돌아와 9년 만에 만든 영화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장인(匠人) 영화(소설), 예술가 주인공 영화(소설)’에 해당될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천극의 일부인 변검술은 순식간에 얼굴에 가면을 붙이고 떼는 중국의 국보적인 비전(秘傳) 기예다. 가족에게만 전수되는 그 비기(秘技)의 전승을 위해 가족이 없던 변검술의 명인(名人) 변검왕 왕씨(주욱)는 더 늙기 전에 백방으로 남자아이를 구하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끝내 남자아이를 얻지 못하고 속아서 여자아이 구와(주임영)를 사오게 된다. 어느 날 부상을 입은 변검왕은 치료약으로 쓰기 위해 구와에게 상처에 오줌을 누라고 하지만 구와는 안 된다고 울부짖는다. 이 때문에 구와가 여자라는 것이 밝혀지고 갈등이 배태된다. 아이는 기예를 배우려하고(그래서 진짜 가족이 되고자 하고) 양아버지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자신을 속이는 세상을 증오하고)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는다. 결국은 서로의 목숨을 구하는 사건이 이어서 발생하고 마음을 돌린 변검왕은 여자아이에게도 비전의 기예를 가르친다. 영화 이야기의 큰 흐름은 그렇다. 그런 결말까지 오는 사건의 기복들이 때로 콧등을 찡하게 만드는 휴먼드라마다.
변검왕은 각박한 세태의 한 가운데서 번듯한 스폰서 하나 없이 하루벌이 길거리의 떠돌이 광대 생활로 연명한다. 그것을 보고 돈 많은 극단의 소유주가 두둑하게 노임을 주겠다며 자신의 단원이 될 것을 권한다. 그러나 변검왕은 고개를 젓는다. 돈으로 자신의 기예(예술)를 팔고 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다. 그때, 안락한 주거와 기름진 음식을 거절하고 나와서 변검왕이 부르는 노래가 인상적이다. “용이 개천에 내려오면 새우가 놀리고 호랑이가 동네로 내려오면 황구가 짖는다”라는 내용이다. 용이 어찌 새우들과 어울릴 수 있겠는가, 변검은 그런 취급을 받을 기예가 아니었다. 그러나 새우 눈에는 용이 없다. 개천에서는 그저 이상하게 생긴 큰 놈(크고 웃기게 생긴 새우)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새우들을 탓할 수도 없다. 못난 자신을 탓하며 용이 새우들의 곁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 그런 ‘비장(悲壯)’에 ‘개천에서 나서 용을 꿈꾸며 살아온 새우들’은 그냥 꿈뻑 넘어간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학생들의 작가론 발표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한 작가가 작품 활동에서 꼭 그 원인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가족관계라든지, 어릴 때 겪은 역사적(특히 비극적) 사건이라든지, 무엇인가 원인(原因)이 될 만한 것을 꼭 찾아낸다. 물론 그런 식의 선행 연구들이 워낙 많으니까 보고 배운 것이리라. 그럴 때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본디 천재가 하는 일에는 원인(原因)이 없다(물론 작가라고 일괄적으로, 모두 다 천재인 것은 아니지만).” 하늘을 훨훨 나는 용의 생각을 개천을 구르는 우리 새우들이 어떻게 알겠느냐. 모든 것을 자기가 아는 이유나 원인으로 귀속시키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못난 새우짓거리다. 새우들은 새우여서 새우밖에 모른다. 하늘에서 타고 나는 걸 지상의 척도로 재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카프카는 카프카고 이상은 이상이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를 둔 유태계 독일인과 카프카 사이에 무슨 인과 관계가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 어찌 카프카 한 사람뿐이었겠는가? 천재가 하는 일을 무슨 의도나 원인의 산물로 읽는 것처럼 아둔한 일이 없다. 그건 그냥 그런 거다. 새우처럼 살지 말자. 그렇게 이야기한다.
말이 난 김에 한 마디 덧붙인다. 비슷한 케이스로, 황순원 선생의 몇몇 작품을 이니시에이션 스토리로 읽어내는 ‘새우짓거리’가 왕왕 있다. <소나기>, <별>, <왕모래>, <닭제>와 같은 선생의 소년 주인공 소설들이 소년기에서 성년기로 진입하는 통과제의적 주제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작가 황순원은 새우라는 것이다. 한 눈에 다 읽힌다는 거다. 내가 가진 이론(각질 있는 놈은 다 새우다)을 갖다 대니까 꼭 들어맞는다는데 딱히 뭐라고 나무랄 수도 없다.
그러나 황순원은 새우가 아니다. 작가 황순원은 눈에 보이는 얼굴보다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짜 얼굴들을 주로 묘사하고자 했다(그의 소설은 구차한 설명을 피한다). 소설계의 변검이다. 애초부터 그의 소설은 심리소설이다. 그의 소년 주인공 소설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한 얼굴, 무의식 속의 ‘작은 아이’를 투영한 것이다. 그 ‘작은 아이’는 평생을 그렇게 안에서 늙지 않고 살다 간다(그래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 아이들은 이미 애늙은이다). 그런 식으로(소설 안에서) 한 번씩 불려나오지 않으면 몽니도 부리고 노망도 들게 한다. 달래줄 필요가 있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을 <아들-연인>이라고도 부르는 사람도 있다(융심리학). 그 아이들은 일종의 ‘불멸의 정서’다. 그래서 <소나기>도 불멸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그런 이치를 여태 황순원 소설처럼 생생하게 보여준 예가 없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선생은 그 이치를 일찍이 소설로 그렸다. 그래서 그는 당연히 용이다. 개천에 잠시 내려왔다 갔다. 그러나 어쩌랴, 화필을 잡고 있는 새우들이 보기에는 그저 이상하게 생긴 새우, 끽해야 ‘큰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래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아직도 이니시에이션 스토리가 대세인 것을. 여기저기서 새우들의 합창이 너무 기승을 부려 큰일이다.
<오래 전 작성. 오늘 아침 일부 수정> <사진은 페이스북(이명우 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