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sabeth CLEMENT, Chantal DEMONIQUE, Laurence HASEN-LØVE, Pierre KAHN, Pratique de la philosophie de A a Z, Hatier, 1995(1994), pp. 276-278. (P. 384).
대화(les dialogues)
플라톤의 작품들은 대화로 구성되어 있고, 철학의 본질적 요구에 상응하는 문학적 형식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진리는 합리적이고 공통적인 탐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대화 덕분에, 말하자면 묻고 대답하는 방법적 기술 덕분에 도달된다. 플라톤이 말하듯이 사유 자체는 영혼이 영혼 자체와 내적 대화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대화는 인간들 사이의 연관을 이성 위에 근거하는 것이지, 폭력에 근거하여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 담론은 가장 강력한 법칙을 선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의 법칙을 지닌다. 그러나 모든 담론이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진리에 대한 신중한 탐구에 근거하는 철학적 대화를 소피스트의 담론에 대립시켰다. 소피스트들은 아테네 민주정치에서 진리에 주목함이 없이 여론을 지배하는 것만을 가르친 자들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의 생애와 사상에 비추어서 세 가지 단계를 구성하고, 그에 따라 대화편들은 세 가지 그룹으로 구분한다.
1.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영향 하에 있는 젊은 시절의 초기 대화편들이 있다. 이 대화편은 스승에 대한 기억을 소생시키고 그의 사상을 옹호하며, 소크라테스의 검토 방식을 대화 장면으로 삼고 있다. 소크라테스적 방식은 비판적 질문을 던짐으로서 대화자의 편견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2. 성숙기의 대화편이 있다. 중기 대화편들은 아카데미 창설시기에 해당한다. 소크라테스는 중기 대화편들에서 아직도 대화의 인도자이고, 중기 대화편들은 플라톤 학설 즉 "본질에 관한이론"의 중요 지위를 차지한다.
3. 노년기 대화편들은 보다 박식하고 난해하며, 플라톤 사상의 발전에서 폭발적인 시기에 해당한다. 플라톤은 성숙기의 대화편에서 전개했던 철학으로 되돌아가면서도 이를 더욱 깊이 탐구하기도 하고 또는 변형시키기도 한다. 후기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은 이제 중심인물이 아니며, 심지어 플라톤의 마지막 작품 『법률(Les Lois)』에서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존재와 지식(Etre et Savoir)
지식이란 무엇인가?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공언한 것과 또한 개개인만큼이나 진리가 많이 있다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플라톤(Platon)은 진실한 지식의 보편성과 비시간성을 확정하며, 지식은 상황과 개인과 계기에 따라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말한다. 안다는 것, 그것은 인간적 견해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넘어서는 것이며, 사물의 다수성을 보편적 정의(définition)의 단일성(unité)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렇게 탐구된 정의는 그 정의에 해당하는 대상이 있어야 말한다. 만일 아름다움의 정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아름다음을 예시하는 개별자들의 경우와 독립적으로 "아름다움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물 존재 자체는 생성에 종속되는 감각적 경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적 세계는 변화, 다수성, 다양성의 세계이다. 그 세계는 과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견해[doxa]에 의해 알려지며, 견해에서는 그 세계가 똑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프로타고라스가 말하듯이 그 극한에서 지식을 견해로 환원하는 것은 헤라클레이토스(Héraclite)에 의해 옹호된 보편적 운동성의 이론을 함축하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어떤 안정된 실재성도 영속적 실재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지식이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자체와 동일하고 영원하며 변화하지 않는 존재들 즉 이데아들(Idées 그리스어로 eidos 또는 본질들)로 이루어진 다른 세계가 필요하다. 본질은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실재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의미에서 "이념(관념 idée)"이 아니다. 이것은 비물질적인 존재이며,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지식이 될 수 있는 존재이며, 완전한 객관성(대상성 objectivité)을 지닌 존재이다. 이 존재가 충만된 실재인데 반하여 감각적 실재성은 그림자(ombre)에 불과하다.
감각적 실재성에 관하여 말하자면, 실재성이란 그것이 지식이 될 수 있는 본질에 참여하는 만큼만 실재적이다. 플라톤은 이 참여(participation)이론을 통하여 초월적이고 외재적이며 상위적이고 가지적 세계는 감각적 세계의 존재 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모든 사물의 궁극적 토대는 아니다. 본질들 자체는 원리이다. 왜냐하면 그 각각은 자체와 동일하고 본질들은 다수이기 때문이다. 또한 최고의 실재성이란 절대적으로 하나이며 단순하고 비조건적이며, 다른 어떤 사물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물을 규정지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조건적이고 절대적 초월의 원리는 본질을 넘어서 "선(le Bien)" 또는 "선의 일자(Un-Bien)"이다. 인식할 수 있는 대상들은 감각적이든 가지적이든 간에 이 일자를 통해서 대상들의 존재이며 알려질 수 있는 존재로 가능하게 된다.
이성의 변증법과 사랑의 변증법
이 인식은 플라톤에 따르면 정신적 전환처럼 알려졌다. (동굴의 비유 『국가론(Politeia)』제7권 514-517) 그 전환에 의해, 우선 감각적 세계 즉 신체의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며(플라톤은 '철학 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배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혼을 가두고 있는 신체로부터 영혼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적인 세계로 어려운 상승을 하는 것이다. 이 지적인 세계는 진실로 철학적 교육이 요구되며 이 교육은 아카데미의 주요 목표이고 그래서 그 교육은 수학적 지식으로 짜여져 있다.
그 다음에 최상의 지식으로 즉 학문에 이르는 길은 변증법을 거쳐야 한다. 수학자는 "하강"하는 방식에 의해 가설의 토대에 두려워하지 않고, 가설로부터 귀결을 이끌어 낸다. 변증론자는 가설로부터 가설의 원리(본질)로, 가능하다면 "선의 이데아"인 비조건적 토대에 도달할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간다.
변증법은, 모든 담론을 넘어서 선의 일자에 대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관조로 통로를 열어야 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합리적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이 합리적 방식을 사랑의 변증법과 겹쳐 놓는다. 이 후자의 변증법(『향연(Le Banquet)』은, 그 고유한 방식 때문에, 지적 관조에 이르는 이성과 동일한 결과로 미 자체에 이르게 된다.
사랑은, 사랑 받아야 할 대상이 나중에야 우리에게 충족되어지는, 갈망(부족 manque)의 표시이다. 이렇게 사랑은 지식에로 도약을 허용한다. 사랑은 정신적 고양의 원리이며, 이 고양의 과정을 통하여 신체의 아름다움에서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결국에는 모든 아름다음의 절대적 원리인 본질이 드러난다(se dévoi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