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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 천년 동안 뛰어난 문벌과 큰 씨족을 이루어온 문화류씨는 고려 초
대승공 류차달로부터 비롯되었다. 문화류씨는 고려시대의 금석문에 등장하고 있으며,
국사(國史)나 공가문헌(公家文獻)에 처음 등재된 것은 고려사(高麗史)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이다.
고려사 열전(列傳)의 문간공 류공권(文簡公 柳公權)의 항목에서 『공의 6대조 대승(大丞) 차달(車達)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공신이 되었다.』고 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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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의 황해도 문화현(黃海道 文化縣)의 인물편에 『류차달(柳車達)은
고려 태조가 남방(南方)을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공급함으로써 그
공으로 대승에 제수함과 아울러 삼한공신으로 사호(賜號)하였다.』고 하였으며, 그
아들 좌윤 효금(左尹 孝金)이 일찍이 구월산을 유람하다가 대호(大虎)를 만나 그
입속에 걸려있던 비녀를 빼줌으로써 그 음덕(蔭德)으로 자손이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고 산신이 현몽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또한 좌윤공의 5세손
문간공 공권(文簡公 公權) 이하 수대의 사행(事行)이 훌륭히 기록되어 있다.
이후 문화류씨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 우금 천여년 동안 수많은 명경석학(名卿碩學)을 계속 배출하여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 한 명벌(名閥)로서 옛부터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 왔다. 인터넷과 문헌들을 보면 문화류씨와 연안차씨가 조상이 하나라는 류차동원(柳車同源)에 입각한 묘사가 만연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류씨가 중국의 전설의 존재인 황제(黃帝; 성=공손(公孫), 이름=헌원(軒轅))에서 왕씨와 차씨를 거쳐 유래했다고 주장해온 류차동원설은 그 출처를 추적해보면 조선시대 중기에 비로소 조작되어 세상에 나온 것에 불과하다. 문화류씨는 그 자출(自出: 근원)이 신라말~고려초에 황해도 구월산 아래에서 류씨 가문을 처음 일으키신 시조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이다. 대승공은 아들이 류효금(柳孝金) 한 분뿐이다. 앞으로 관련 자료들이 모두 이 엄연한 사실에 입각해서 수정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문화류씨는 그 자출(自出: 근원)이 신라말~고려초에 황해도 구월산 아래에서 류씨 가문을 처음 일으키신 시조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이다. 대승공은 아들이 류효금(柳孝金) 한 분뿐이다. 앞으로 관련 자료들이 모두 이 엄연한 사실에 입각해서 수정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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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문화류씨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글성씨 표기이다. 성씨의 한글
표기는 그동안 사회적 비중이 높지 않아 간과되다가 1960년대에 들어 한글전용정책이
강화되면서 중요하게 되었다. 이때 문화류씨 문중은 전적으로 '류'를 쓰기로
결의했고, 정부의 적극적 협조도 뒤따랐다. 그러나 그 후 한글맞춤법의 혼란으로 인해
柳씨의 한글 표기의 혼란이 야기되었고 대개 법적으로도 '류'를 쓰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이에 문화류씨 문중은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입법, 사법, 행정
기관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헌법소원도 제출했다. 그 결과 2007년에는 대법원의 결정을
통해 법적으로 류씨 표기, 나아가서는 두음법칙에 저촉되어 왔던 여타 성씨들의
표기까지도 허용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매스컴과 사람들에 의해 "문화류씨 가문의
승리"라고까지 일컬어진 획기적인 변화였다. 이제 당면한 과제는 현재의 모든
柳씨들뿐만 아니라 柳씨 선조들의 한글 성씨표기를 '류'로 바꾸는 것이다. 柳씨들의
전폭적 참여는 물론이지만 사회의 적극적 협조도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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