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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장猛將의 눈빛보다
덕장德將의 가슴으로,
단원들의 음악을 이끌어 내는
골수 휴머니스트
이동신
경북도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 대담_이영진(음악평론가. 음악저널 편집위원)
지금은 과거만 남아 있는 마산시향의 전 상임지휘자였던 이동신. 그는 공립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매우 이례적으로 학부 때부터 지휘 공부에 매달려 결국은 지휘로 연주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독종
이다. 대개 오스트리아나 유럽권 또는 미국에서 지휘를 공부한 여느 지휘자와 달리, 이동신은 무슨
연유에서 인지 일찌감치 페레스트로이카 직후 교류의 물꼬가 트인 92년, 동토凍土의 레닌그라드음
악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무렵만 해도 쉽지 않은 행보였지만, 그는 삼년 겨울을 혹한과 싸우며 버
텼고, 불혹의 나이에 부산시향 부지휘자 그리고 이어지는 마산시향 상임지휘자를 열정으로 마무리
하고, 이젠 고향 대구로 돌아와 경북도민의 음악 눈높이를 높이는 일에 혼신을 다하고 있다.
한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 부설 루빈시타인 국립가극장 부지휘자로 활동하며 익힌 러시아적 스
케일과, 미시간 주립대학교 소속 오케스트라 부지휘자로 활약하며 배운 미국식 합리성을 그의 음악세
계에 접목해 나가며 이동신 지휘자는 경북도립교향악단의 멀지 않은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이영진 창단 17년 째 접어든 경북도향의 제5대 상임지휘자로 지난 10월 1 일 이동신 지휘자께서 취임하였습
니다. 경북 출신으로 향토의 대표적 오 케스트라를 맡은 소감과 앞으로 어떤 정서와 스타일로 경북도향을 나갈
것인지?
이동신 네, 일단 한편으로는 기쁘구요,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거운데요. 경 북도향은 280만 경북도민을 위해 존
재하는 오케스트라입니다. 그러다보 니 보통 시립교향악단처럼 어떤 자치단체에 속해 있다거나 정해진 예술 회
관과 같은 공연시설이 있지 않기 때문에 전방위적으로 공연활동을 해 야 하는 어려움이 있구요. 또 여러 지역을 대상으로 공연하다 보니까 지역별로 관객들의 수준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요……… 아무튼 이런 요소들이 사
실상 일반적인 공립 오케스트라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어려 운 현상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려운 점은 공연장이 수시로 바뀌다보니까 그 공연장 의 음향에 매번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
든지, 또 시설 환경의 다른 점, 관 객층이 다른 점, 그것 때문에 프로그램을 항시 실정에 맞게 짜야한다는 점이
난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들이고, 단원들이 현실에 적응해야 하기 때
문에 지휘자로서 어깨가 매우 무겁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을 탓하며 연주를 소홀히 할 수 없기 때 문에 저나
단원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경북도민의 문화적 욕구충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두 번 째로 제가 생각하는 지휘자의 역할을 말씀드릴까요? 과거 저희들 보다 한 세기 쯤 앞선 시대의 지휘자들
은, 물론 국내 지휘자들을 말씀 드리는 게 아니고, 토스카니니나 카라얀과 같은 시대의 지휘자들……… 그 분들
의 카리스마 있고 앞에서 끌어가는 그런 모습의 지휘자보다는, 요즘은 단원들과 함께 협력하는 아주 민주적인
지휘자들이 대세인데요. 말하자면, 저도 단원들의 음악 협력자 또는 조력자로서의 지휘자이고 싶 습니다. 그러
니까 그 분들의 음악을 최대한 이끌어내도록 앞에서 리드하 는 지휘자가 아니라, 뒤에서 도와주는 지휘자가 되
고 싶은 게 저의 지 휘자론 입니다. 말하자면 단원들이 가장 편안하게 음악을 연주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
는 지휘자, 그런 지휘자가 되는 게 제 바램 입니 다.
이영진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오케스트라를 제외하고 대개의 자치 단체 공 립오케스트라의 인적 구성은 그 지
역 출신 음대생들이 주축이 돼 있습 니다. 이런 현상은 긍정적 측면이 있는가 하면 간혹 음악적 한계를 극 복하
지 못하는 부정적 측면과, 아울러 단원 화합 차원에서도 역기능으로 작동되기도 합니다. 새로 취임한 지휘자로
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
이동신 보통 어느 지역이던 오케스트라가 생길 때 지자체에서 마음먹고 오 케스트라를 하나 창단 해야겠다 해
서 생기는 경우 보다는 예전부터 그 지역의 전공자들 중심으로 활동해오던 그룹이 있었고, 그 그룹이 점차 발전
해 가면서 시향으로 전환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활동하다가 생겨난 오케스트라이다 보니 자연 히 외부사람들이 발 들여 놓기가 쉽지 않았던 건 사실이구요.
하지만 근래에는 부산시향만 하더라도 출신 대학도 다양해지고 외부 연 주자들에게도 많이 개방된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방색이 많 이 옅어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수도권에 거주 하시는 연주 자들이 공개 오디션을 하고 문이 열려있는데도 불구하고 지역적으로 먼 곳까지 오는 경우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습
니다. 우선 교통문제가 제 일 크겠구요, 따라서 경제적으로 그 만한 보상이 따르지 못하는데 있겠 죠. 거기다가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연주활동 하시던 분들이 다른 지방으 로 오시게 되면 그들 나름대로 활동해 오던 음악그룹이 있을 텐데 그분 들과도 떨어져야함은 물론, 음악적 눈높이를 맞출 수 없는 문제도 발생 할 것입니다.
결국은 그 분들이 지방에 와서 음악적 환경에 적응하자면 여러 가지 통 과의례 내지 과정이 있는 데 그것 또한
극복하기가 나름대로 쉽지 않겠 지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지방 출신들이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적응 하기
역시 쉽지 않은데 어떻게 보면 더 어렵다고 보는 편이 정확한 표 현일 겁니다. 아무튼 저희 나름대로 서울권의
연주자들을 지방 오케스트 라에 영입하려 해도 말씀드린 이런 여건으로 인해 사실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구
요. 지방대학 출신 역시 수도권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기가 수월하지 않은 현실에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구
성 여건은 지금 상황에 선 당장 해법이 없을 듯 생각됩니다.
이영진 이선생님은 현역 국내 공립 오케스트라 지휘자로는 드물게 러시아 에 유학하고 미국에서 박사 후 과정
을 밟고 온 경우인데 특별히 상트 페테르브르크 국립음악원 지휘과의 교육과정은 어떻게 편성돼 있고, (미 시간
주립대) 음악교육과 비교해서 말씀한다면?
이동신 네. 제가 계명대학을 다닐 때 물론 작곡과로 들어갔지만 지휘 전공 이 있었기 때문에 2학년부터는 지휘
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학부에서 3년간 지휘를 배웠습니다. 우종억 선생님께 지휘의 기초
과정을 3년 배우고 러시아로 갔는데요. 그 때가 92년 말이 었으니 까 지금 상황하고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교육방법이라든 가 그 밖에 여러 가지 여건이 많이 바뀌었겠지만, 제가 유학 갔을 때는 러시아가 개방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 전부터 내려오던 사회주의 교육방식이 상당히 남아 있던 때였습니다. 정치적인 것은 좀 바뀌었겠지만 모든 것은 과거 그대로의 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 런 제도적 혜택을 굉장
히 많이 본 사람입니다.
특히, 제가 유학했던 레닌그라드 음악원은 학부와 대학원, 말하자면 학 사와 석사과정이 모두 통합된 시스템이
었습니다. 그러니까 5년 과정을 마치고 1년의 예비과정을 마쳐야 졸업이 되는 셈이었죠. 그런데 저는 한국에서 학부 4년을 마친 것을 일부 인정받아 3년을 공부했습니다. 한 국과의 중요한 차이는 클래스 수업이라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일대 일 수업인데 제일 학생이 많았던 때가 다섯 명을 놓고 공부했던 경우입니다. 말하자면 집중적인 개인 교습을 받는 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 개개인의 수준과 실력을 선생님이 세밀히 파악하고 있었지 요. 예를 들면 화성학이라든가 대위법, 음악사 그리고 관현악법 등 학 생의 수준을 다 알고 있으니까 맞
춤식 교육이 가능했던 겁니다.
이 학생에게는 이 수준의 내용을, 저 학생에게는 또 다른 수준의 내용 을 지도하는 거였지요. 이게 가능했던 게
학생 수보다 교수의 수가 더 많았기 때문에 가능 했다고 봅니다. 아마 그때 당시만 해도 교수님들의 급여가 굉장히 적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불과 몇 백 달러였다고 합 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 음악원은 그 당시는 학점제가 아니라 뭐라고 할까요. 지휘과면 지휘과, 피아노면 피아노과를 졸업하기 위해 한국에서는 선택 과 필수가 있지만 음악원은 그 과를 졸업하기 위해 수강해야하는 모든 과목을
다 공부해야 했습니다. 물론 지휘과면 지휘과에 해당하는 과목을 이수하려면 모든 과목의 시험을 다 치러야했죠. 그런 과정이 다 끝나야 이른바 졸업시험을 보는데 그 시험이 얼마나 엄격했나하면 시험 감독을 다른 음악원 교
수님들이 와서 하시는 겁니다. 지휘과 같은 경우, 국가고 시와 같은 시험을 세 과목 치룹니다. 일반 오케스트라
지휘 한번, 오페 라 지휘 한번, 관현악법 시험 한번을 치르게 됩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의 경제사정이 많이 좋지 않아서 모든 분야의 인건비가 굉장히
쌌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제가 다녔던 음악원에는 지휘과를 위한 일반 오케스트라가 있었습니다. 그 사 람들
은 학생들이 아니라 일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었는데 아침 9시에 출근해서 1시 쯤 퇴근하는 정식 음악원 직원
들인 셈이지요. 지휘과에는 여러분의 교수님이 계셨는데요. 저의 선생님은 이 오케스트라를 매주 금 요일 오전
9시부터 1시까지 지휘 수업에 활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매주 오케스트라 실습을 하는 겁니다. 물론 대편성의 오
케스트라는 아니었지 만 어지간한 곡은 다 소화해 낼 수 있는 편성의 오케스트라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러
시아에 유학하여 누린 가장 큰 혜택은 바로 오케스 트라를 많이 경험해 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국내 같았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고, 아마 다른 나라에 가서 공부했어도 그 정도로 경험하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유학은 미시간 주립대학에 연구원으로 갔었습니다. 마산시향 상임으 로 있을 때 일 년 간 휴직을 하고 다녀
왔지요. 미시간 주립대에 지금은 은퇴하셨는데 그레고리안이라는 교수님이 계셨어요. 이 분이 펀드 운영 을 아
주 잘하셔서 대학 자체에 전공자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갖고 계 셨지요. 수준이 국내 공립오케스트라 수준 정
도 되는 꽤 인지도 높은 악단입니다. 물론 시립교향악단 같은 오케스트라도 있었지만 미시간주립 대학 내에 몇
개의 오케스트라가 별도로 있었습니다. 아주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에서 취미 활동반 수준의 오케스트라까지 네 개의 오케스트 라가 있었는데 나름대로 다 특색이 있고, 특히 그레고리안 교수님이 운 영하시는 메인 오케스트
라는 그 중에서도 수준도 제일 높았지만 재정 면이라든가 시스템 면에서도 단연 우위를 차지했어요.
저는 그 교수님과 함께 공부하고 부지휘자로 생활하면서 러시아에서 배 울 수 없었던 미국식 합리주의 또는 자
본주의 체제에서의 경영능력, 오 케스트라의 효율적 운영, 이런 부분에서 아주 많은 것을 배웠고, 큰 깨 달음을
얻고 왔습니다. 미국의 오케스트라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 는 건 아니겠지만 제가 공부했던 미시간의 오
케스트라는 리허설 횟수로 급여가 책정됐기 때문에 청중의 눈높이에 맞은 프로그램 개발에 많은 신경을 쓰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국의 생활은 러시 아 유학 때와는 또 다른 음악 세계를 경험케 했던 소중한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영진 직업 지휘자로서 추구하는 이선생님의 궁극적인 음악세계는 어떤 것이며, 오케스트라 지휘자라서 가장 역점을 두는 음악적 입장과, 평소 클래식의 대중화 또는 클래식의 보편화에 대해서 간직한 견해는?
이동신 사실 직업지휘자로서 궁극적인 음악세계 운운하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직은 시기적으로 아니라고 봅니
다. 아직 오십도 안 된 나이에 음악세 계가 어떻다, 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좀 그렇고, 연륜이 좀 더 쌓인 후에 말
씀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직업 지휘자로서가 아니라 그냥 음악을 전공한 사람으로, 또 지휘를 공부
한 사람으로 그런 입장에서 말 씀드린다면, 세 가지 정도를 정리해서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우선, 음표에 대한 충실함 그리고 경외심입니다. 지휘 하시는 모든 분들 이 그렇겠지만 지휘자로서 갖추어야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바로 이것 이 아닐까 생각하구요. 작곡가도 한 사람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인간적
인 이해가 있어야 하겠다는 점. 말씀드리자면, 그 작곡가가 살던 시대의 시대적 배경, 사회적 상황, 또 작곡가에
게 영향을 줬던 어떤 인 물이나 사건들, 이런 것을 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어 떤 작곡가가 살았던 시대의 문학과 미술사조 따위도 많이 연구하는 편 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인문학에 대해서 참 많은 관심을 가지 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이해를 통해서 작곡가의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작곡가와의 무언의 소통 또는 시간적 간격을 좁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봅니다. 아울러 좀 외람된 바
람이지만 이런 작은 저의 노력이 작곡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의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지휘하시는 모든 분들의 생각이 저와 같지는 않겠지 만 기본적인 생각은 같다고 보는데요. 저는 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를 통 해 구현하고자 하는 가장 주된 요소를 음색과 밸런스에 두고 있습니다. 오케스
트라 총보를 보면, 현대에 와선 다이나믹의 양극화가 세밀화 되고 분명해 졌지만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각 파
트의 다이나믹이 거의 동일 하게 획일적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지휘자는 각 악기의 특성과 음
량을 잘 조율하고 콘트롤해서 최상의 배합을 만들어 내야 합 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음량을 잘 조율하는 것이 밸런스이고 최상의 배합이 톤 컬러라고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클래식의 대중화에 대한 저의 생각을 물으셨는데, 사실 요즘 지 휘하시는 분들이 관객의 취향이나 또 눈
높이를 겨냥해서 클래식 대중화 를 위한 노력을 많이 하고 계시기 때문에 저라고 딱히 나는 이런 생각 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습니다.
다만, 클래식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고 있는 오케스트라가 너무 경계를 자주 넘어 가거나 많이 넘어가는 것은 삼
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견해 는 가지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많은 오케스트라가 있습니다. 저희와 같 은 공립 오
케스트라가 있고 또 민간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반주에 잘 조 화된 오케스트라도 있고, 또 팝이나 대중음악에 최
적화된 오케스트라도 있습니다. 따라서 각자 자기들에게 맡겨진 영역에서 남의 영역을 크게 넘지 않고 자기 역
할을 충실히 해나간다면 음악 팬들이 확충될 것이고, 그 결과 클래식의 보편화도 언젠가 이루어질 거라고 저는
전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