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자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체험한 후 그리스도의 현존의식을 매일 체험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이제는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 내가 아닌지를 체험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로운 매일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번장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자아가 육체 가운데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신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구속의 진정한 의미를 (즉 죄사함과 구원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존재가 새롭게 태어났다는 의미를)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 거짓자아가 주체가 된 신앙생활을 해왔다. 2부 7장 서두에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전반부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헬, 데: 그리고, 지금) 이제는 내가(헬 에고)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거듭남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연합함으로 하나되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신성과 원복이 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동일한 거짓자아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 전의 나와 동일한 내가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는 거짓자아가 아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주체가 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 후반부에서 말하는 것이다.
[갈 2:20] ... 이제(헬, 뉜 : 지금)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킹제임스흠정역) 사는 것이라
이 구절의 "이제"라는 말은 지금 처해 있는 현재의 상황으로서 지금의 존재, 현재의 시간, 현재의 사건이라는 뜻이다. 이를 구원론적으로 표현하면, 법정적으로는 영혼몸이 구원을 얻었지만 현실적으로 영만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혼과 몸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다. "이제" 다음 이어지는 "내가"는 과거의 거짓자아인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영 안에 있는 나, 에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즉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 우리 육체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 아들의 믿음으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는 삶을 말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내 안에서 계신 그리스도)라는 신비
우리는 자신이 지금 그리스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하지만, 거짓자아로 그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거짓자아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거짓자아인 내가 진정한 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죽음이다. 그 죽음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살고자 하는 자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역설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나라 복음의 비밀이자 신비이며, 이것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체험의 대상이다. 그것은 거짓자아로는 알 수 없는 내(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몸(생각, 감정, 신체) 을 통해서 나타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의 영 안에 있는 그분의 생명을 우리 몸이 경험하고, 우리의 몸을 통해서 그분이 나타나는 것이다.
[골 3:3-4]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이 말씀은 미래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차원의 관점으로 보면 현제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거짓자아가 죽었고,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내 존재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가 나타날 때 비로소 내 몸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의미이다. 거짓자아의 부재를 통해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아마 지금까지 이 책의 흐름을 잘 이해하며 따라온 독자들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거짓자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에 대해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개면적으로는 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죽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을 것이다. 자신 안에서 이런 질문이 올라온다면 지금까지의 여정이 헛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죽고 싶어지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자아가 스스로 죽고 싶어 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마 16:24-25]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목숨(헬, 프쉬케)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목숨(헬, 프쉬케)을 잃으면 찾으리라
앞서 6장에서 자세히 살펴본 것처럼, 이 구절의 죽는다는 의미는 목숨을 잃는다거나 혹은 자기 육체를 쳐서 복종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죽는다는 의미는 혼(헬, 프쉬케)과 관련되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마 16:25). 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실재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며 어떤 힘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타락한 혼이 그 생각과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 만들어진 거짓자아가 내가 아님을 알고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몸이 죽기 전에 거짓자아의 죽음을 미리 경험하라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의 몸이 제기능을 못할 때 결국 우리의 영혼은 몸으로부터 분리된다. 더 이상 생각, 감정, 신체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우리는 성령과 말씀의 도우심으로 거짓자아로부터 깨어남으로, 즉 언젠가 죽기 전에 매 순간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죽고 난 다음에 누리는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서 먼저 현재적 하나님 통치의 삶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다. 한마디로 거짓자아가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할 때', 즉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지 않고 죽을 때", 비로소 혼이 몸의 종노릇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영 안에 거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거듭났다면 이제 우리의 혼은 하나님의 영 안에 거하고 있다 따라서 자아의식체인 혼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스스로 만든 정신세계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거짓자아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결국, 물질과 소유와 관계에 대한 개념으로써 보이는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나는 존재하지만, 거짓자아는 결코 나를 증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존재는 개념이 아니라 생명을 나타내는 영혼이기 때문이며, 진정한 나는 영적 세계의 신비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벽을 넘어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 그래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나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기 전에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럴 때 불가사의한 그리스도의 신비가 스스로 나타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몸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거짓자아가 없어지면 그리스도 의식이 드러남으로 지금 감각되는 모든 형상을 - 내 사고방식대로가 아니라 -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허용하게 된다. 좋다 또는 싫다, 옳다 또는 다르다, 선하다 또는 악하다는 거짓자아의 이원론적인 해석과 판단이 없어지는 것이다.
출판사 : 규장 지은이 : 손기철
첫댓글
주님께서 하십니다!!
주님께 영광!!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경험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고
나의 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아멘
거짓자아가 없어지면 그리스도 의식이 드러남으로 지금 감각되는 모든 형상을 - 내 사고방식대로가 아니라 -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허용하게 된다. 좋다 또는 싫다, 옳다 또는 다르다, 선하다 또는 악하다는 거짓자아의 이원론적인 해석과 판단이 없어지는 것이다.
아멘 주님께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