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후기로 넘어오며
여인들의 정절개념은 어떠했을까.
조선시대와 닮은꼴이 나타니기 시작한다.
고려후기의 이야기지만
그 당시의 기록이 아닌
조선중기의 유학자의 기록으로
보여지는 것이지만
열부이씨의 행적은
기존의 남편은 잃은 고려여인의
모습과는 사뭇다른 열부의 모습이다
열부이씨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 언제 누가 썼나
고려말기의 이야기이나
조선 숙종, 영조때의 유학자인
도암 이제의 도암선생집 권25 잡저에
「열부이씨전」이 기록되어 있고
동 내용은 현 전라도 순창의 옛 이름인
옥천의 여러사항을 1760년에 기록한
옥천군지에도 인용되어 있다.
이재의 본관은 흔치않은 우봉이다.
유학자의 글에 등장하는 열부이씨가
확인할 길 없으나 우봉이씨
조상의 자랑스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건 아닐까?
※ 도암 이재는 누구인가?
_ 출생은 1680(숙종 6)년이며
사망은 1746(영조 22)이다
_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이다
_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반대한
대표적 인물이다
_ 서화에 능했으며, 예학에도 밝았다
_ 저서로는 〈도암집〉·
〈근사심원〉·〈오선생휘언〉·
〈검신록 〉·〈존양록 〉·
〈사례편람 〉·〈주자어류초절 〉
등이 있다.
* 내용에서 유추되는 의미는
고려시대 여인의 정절개념의
변화모습이다.
여러번 부모는 재혼을 권하는
고려시대의 전통개념에 따르는데
열부이씨는 한사코 따르지 않고
멀리 도망치듯 지방의 시댁마을에서
자녀를 낳고 일가를 이룬 이야기이다.
불교에서 신진사대부의 시대로
넘어가는 고려후기의 여인내의
정절개념이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이다.
*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고려말기 상당한 가문의 딸이었을
이씨가 마찬가지로 상당한 가문과
혼인하였으나 남편과 시부를 잃고
거듭되는 친정부모의 재혼설득에도
양씨의 대를 이어야 하는 것과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
사고에서 유복자인 아들을 데리고
천리길을 걸어 남원까지 내려가 산다
열부 이씨전은 18세기 유학자에 의해
집필된 글이다. 때문에 성리학적
정열(貞烈)관념에서 열부의 행위를
서술한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감안하고 보아도
열부 이씨의 행적은
삼종지도와 종법적(宗法的)사고 외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순창에는 현재도 그녀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그녀는 순창의 남원 양씨가
있게한 입향조(入鄕祖)로서
남원과 순창의 각종 민간설화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그녀가 남원으로 내려올 때
가져온 시아버지와 남편의 홍패는
보물(남원 양씨 종중문서 일괄)로
지정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기록된 실 내용은
열부 이씨는
고려 직제학 양수생의 처이다.
수생이 죽었는데
이씨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부모는 그녀가 일찍 홀로된 것을
가엾게 여겨 재혼시키고자 하였다.
그때에 이씨는 임신 중이었는데
울면서 부모에게
"다행히 아들을 낳으면
양씨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으니
해산을 한 뒤에 시집을 가도 늦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아들을 낳자 부모는 다시 강요하였다.
이씨는 또 울면서 아뢰기를
"아이가 아직 젖이 떨어지지
아니하였는데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면 아이가 자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늘이 양씨의 뒤를 잇게 하였는데
내가 차마 그 뒤를 끊겠습니까?
바라건대 아이가 품안에서 벗어날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였다.
아이가 자라서 능히 밥을 먹고
말을 하게 되니 이씨는 의연히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며
죽음으로써 다시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들어주지 않으므로
이씨는 자결을 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의리상 불가하였다.
이에 노비 몇 명을 데리고
남편의 옛집인 남원의 별업(別業)으로
도망하여 왔다.
천리 길을 굴러 넘어지며 걸어
발은 유혈이 낭자하였다.
남원의 서쪽 교룡산 아래에서 살다가
얼마 후에 칠치지란(왜구의 침입)을
피해 비홍산(飛鴻山)에 올랐다.
그곳에서 순창의 구악(岳)을
바라보고 산기(氣)가 좋다며
바로 가서 집을 짓고 살았다.
양씨의 자손은 그로부터
그곳에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
아이는 이미 성장하매 사냥을 즐기고
학업에 힘쓰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이씨가 밥을 먹지 않고
이불을 둘러쓰고 누워 있으므로
아이가 밖에서 돌아와 어머니에게
어디 아프신지 물었다.
이씨는 말하기를
“아픈 것이 아니다.
홀로된 사람이 오직 너에게 의지하여
네가 책을 읽고 몸을 닦아서
부조의 서업(業)을 떨어뜨리지
아니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는데,
지금 네가 하는 일이 이러하니
바람을 이룰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나는 죽고자 한다” 하였다.
아이는 깨닫고
그날로 사냥 도구를 불사르고
이웃에 사는 김주서를 따라서 배워
드디어 큰 재목이 되었으니
함평 현감 휘 사보(思輔)가 곧 그이다.
이씨는 늙어서 전성지양을 누렸으며
죽어서는 순창의 동쪽 20리 아래에
장(葬)하였다.
본조에서 그 정열(貞烈)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기리어
그 장지(葬地)에 봉석(石)을 하였으니,
지금도 완연하다.
이 일은 『옥천지』에 실렸으며,
정려를 내린 때는 세조조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