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세계 문화유산 조선왕릉, 죽어서도 500년 이상을 떨어져 있는
정순왕후 사릉 이야기입니다.
위치는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에 있습니다.
해설사는 남양주 시청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해설시간은 10:30/13:30/15:00시입니다.
왕릉 조성시에는 주변의 일반묘는 사방 십리밖으로 이장되어야 하나 바로 옆에 해주 정씨들의 묘가 옆에 있습니다.
해주 정씨들의 묘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숙종의 명으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습니다.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입니다.
정순왕후 송씨는 군부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처음에는 대군부인의 예로 묘소를 조성하였습니다. 그 후 1698년에 정순왕후로 복위되어 묘소를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습니다.
해주 정씨들의 묘입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설치하였습니다.
정자각은 다른 왕릉에 비해 아담한 모습이고,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향로와 어로는 중간에 끊어져 있습니다.
홍살문입니다.
정자각입니다.
비각입니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석양과 석호를 하나씩 줄였으며, 무석인을 생략하였습니다. 문석인과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습니다.
사릉에는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습니다.
정순왕후 송씨는 1521년에 군부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묘소는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 정씨의 선산에 조성하여 복위 전까지 해주 정씨 집안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1698년에 정순왕후로 복위되어 신주를 종묘에 모셨고,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하였습니다.
경혜공주와 정종의 아들인 정미수는 정순왕후를 보살피다 정순왕후보다 9년 전 죽게됩니다. 후손이 없어 7촌 조카인 정승휴가 후사를 이어 보살폈다고 전해집니다.
시호는 숙종 때에 복위되어 받은 것으로 정순이라는 시호를 받은 분이 또 있습니다. 단종비는 정순(定順)왕후 송씨이고,
영조비는 정순(貞純)왕후 김씨입니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쌍릉인 원릉은 동구릉에 있습니다.
정순왕후 송씨는 본관이 여산인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1440년에 전북 정읍 태인(현 정읍시)에서 태어났습니다.
1454년(단종 2)에 타고난 성품과 검소의 미덕을 인정받아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다음 해인 1455년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이 되자 의덕왕대비로 책봉되었습니다.
1457년에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나면서 사육신을 비롯한 단종 측근세력들이 제거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고, 정순왕후는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현재의 동대문 밖 (청룡사에 있는 비구니 처소)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뒤쪽 산봉우리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비통한 마음으로 단종을 그리워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후 1521년(중종 16)에 82세로 세상을 떠났고, 1698년에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습니다.
단종은 1457년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도 복위사건으로 인해 영월로 유배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으며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 번 치고 가슴을 한 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전합니다.
그 뒤부터 이 봉우리는 왕후가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하여 동망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한경지략』에 의하면 영도교 부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금남의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왕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 때 마다 왕후에게 채소를 가져다주다가 궁에서 말리자 왕후가 거처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장을 열어 주변을 혼잡하게 하고, 계속해서 몰래 왕후에게 채소를 전해주려는 여인들의 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된 후 확인해본 결과, 실제 정업원은 동대문 밖에 아니라 궁궐 내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조선 영조 47년, 지금의 자리인 동대문 밖 연미동 청룡사를 영조가 과거 정업원 터라고 보고 '정업원구기'라고 친필로 써 정순왕후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기 때문인데, 이는 잘못 전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정업원터 비각입니다.
주변에는 야인이 된 정순왕후가 매일 바위산에 올라 울면서 단종의 넋을 기린 장소라는 동망봉도 함께 있습니다.
정업원은 여승방으로 원래 창덕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성안에 있는 것인데, 성 밖에 있었다는 전설에 따라 이곳에 비를 세우고 비각도 짓게 되었습니다. 이는 정순왕후 송씨가 동대문 밖인 이곳에서 지냈던 사실과 정업원의 주지로 있었던 일이 얽혀서 잘못 전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영조 47년에 세운 비로, 비문 일부와 비각 현판의 글은 영조가 손수 쓴 것입니다.
비각 현판에는 전봉후암어천만년,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
비석에는 정업원구기세신묘9월6일음체서, 정업원 옛터 신묘년9월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
서쪽 편 바위에 동망봉이라는 영조 어필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채석장으로 변하여 어필이 없어졌다고 하며, 이곳에서 채취한 돌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는데 쓰였다고 합니다.
동망각은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었는데 원래 있던 자리에 거대한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단장하였습니다.
단종이 영월로 귀양갈 때 왕비 정순왕후가 이 다리까지 배웅을 나와 이별하였고, 단종이 이곳을 건너가 영원히 이별하였다고 하여 영도교(永渡橋)라고 합니다. 일설에는 단종 부부가 근처 청룡사 우화루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고 하는데, 귀양길에 절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다리를 부수어 궁궐의 석재로 써서
없어졌으나 2005년 복개되었던 청계천을 다시 살려내면서 새로 설치한
다리입니다. 영도교위에는 그 옆 풍물시장에서부터 뻗쳐 온 노점상들로
인하여 늘 북적이는데, 다리를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 560여 년 전 이곳
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헤어져야만 했던 단종 부부의 슬픈 사연을 알고
계시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