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준 높은 의학 전문성 인정받아 구료 매진
전염병 우려해 구료소 4곳 설치하고 탄선 스님 불러 들여 300여 스님과 동활인원 관할하며 의료·구휼 등 활동 전담 도성 축조 이후에도 왕명 받아 흥복사에서 빈민구제 지속
불교제중원(佛敎濟衆院) 표지석.
1923년 불교계 최초의 현대식 병원으로 세워진 불교제중원은 조선시대 스님들의 구료활동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이 개국되고 열하루가 지난 날 문무백관의 관제가 정비되었다(‘태조실록’ 1권, 1년 7월28일). 이 가운데에 혜민국(惠民局)과 대비원(大悲院)이라는 조직의 이름이 보인다.
태조 6년(1397)에는 제생원(濟生院)이 신설되었다(‘태조실록’ 12권, 6년 8월23일). 대비원은 태종 14년(1414) 활인원(活人院)으로 개명되었다
(‘태종실록’ 28권, 14년 9월6일).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혜민(惠民)] 불보살과 같은 자비를 실현하 며[대비(大悲)] 생명을 구제하고[제생(濟生)] 사람을 살린다는[활인(活人)] 뜻으로 이름 붙여진 이 기구들은 모두 의료활동과 관련이 있는 기관이다.
혜민국과 제생원은 각각 백성들의 치료와 약재의 공급을 담당한 곳으로 명실상부한 국립의료원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대비원과 그 후신인 활인원은 의료뿐 아니라 구휼과 시신 매장에 이르기까지 보다 폭넓은 업무를 담당한 대민 구호기관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활인원은 “서울 안에 병들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모두 이곳에 모아 놓고, 죽·밥·국·약을 주며, 아울러 옷·이불·자리를 주어 편하도록 보호해 주고, 만일 죽는 이가 있으면 잘 묻어 준다”고 소개되어 있다(‘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도 한성부).
‘매골승(埋骨僧)’ 편에서 매골스님들이 활동했던 행정기관으로 관곽(棺槨) 등 예장(禮葬) 물품의 제작소인 귀후소(歸厚所)와 함께 활인원이 등장하였던 것은 활인원 자체에 이러한 설립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활인원은 한양의 동소문 밖과 서소문 밖 두 곳에 설치되었다.
또 그 기능은 상당히 전문화되어 동서활인원의 구료 업무를 제생원과 혜민국에서 각각 분담하였으며, 급여를 받는 녹관(祿官)이 업무 담당자로 임관하여 매일 완치된 인원과 그렇지 못한 인원 그리고 사망한 인원의 숫자를 헤아려 월말에 예조를 통해 임금에게 공문으로 보고하였다.(‘세종실록’ 3권, 1년 2월14일.)
세종 3년(1421) 12월 서활인원의 제조(提調) 한상덕(韓尙德)이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였다. “내년 봄에 성을 쌓을 군사가 많이 모이면 반드시 전염병[역려(疫癘)]이 돌 것입니다.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초기에 도성을 쌓으실 때 전염병이 크게 일어났는데, 화엄종 승려 탄선(坦宣)이 그것[여질(癘疾)]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구휼하였습니다. 지금 탄선이 경상도 신령(新寧)에 있습니다. 역마(驛馬)를 이용하여 (그를 서울로) 불러 (전염병을) 구호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세종실록’ 14권, 3년 12월21일.)
세종은 이 말을 옳게 여겨 “도성의 동쪽과 서쪽에 구료소(救療所) 네 곳을 설치하고, 혜민국 제조 한상덕은 의원 60명을, 대사(大師) 탄선은 승려 300명을 거느리고[大師坦宣率僧徒三百名] (도성을 쌓는) 군인 중 병 들고 다친 사람을 구료하도록 명하였다.”(‘세종실록’ 15권, 4년 1월15일.)
조선 전기의 스님들이 다리를 만들고(8. 스님의 교량 제작) 기와를 굽고(9. 기와 굽는 스님들) 연고 없는 시신을 묻어주는(10. 매골승) 등 다양한 사회 활동에 종사하였던 것을 앞선 글에서 소개했었다.
특히 해선(海宣) 스님은 태종과 세종 대에 별와요(別瓦窯)의 설치를 건의하고 그 재원 마련과 경영을 도맡으며 기와 제작과 관련 사업에서 특장점과 전문성을 발휘했음을 많은 분이 기억할 것이다. 그 해선 스님이 여러 스님들을 인솔하여 별와요에서 기와를 구웠던 것과 같은 시기에, 탄선 스님은 질병 퇴치와 상해 치료에 두각을 나타내며 구료사업에 매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탄선 스님은 일찍이 태조 때부터 전염병 치료 방면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며 중앙에서 활약한 경력이 있었으나, 세종 3년 그의 차출이 거론될 당시에는 그저 화엄종 승려로만 지칭되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활인원에서 활동할 때에는 대사(大師)로 불리는 모습이다. 이를 단순한 표현상의 차이로 볼 수도 있지만, 스님이 세종 4년 활인원에 임명되었을 때 그 책무를 인정받아 대사라는 높은 법계로 승격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사실 이는 별와요의 해선 스님에게서도 보이는 양상인데,
해선 스님 역시 태종 당시에는 별도의 법계가 명시되지 않았었지만 (‘태종실록’ 11권, 6년 1월28일) 세종 때에는 도대사(都大師)로 지칭되었던 것이다 (‘세종실록’ 26권, 6년 12월7일). 이로 보아 나라의 부름을 받아 전문 분야에서 공로를 인정받은 스님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법계가 제수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활인원의 구료활동을 위해 탄선 스님의 휘하에 300명의 스님이 배속되었던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들이 본디 탄선 스님을 따르던 무리였는지 아니면 나라에서 별도로 차출한 인원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최소한 의료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전문성을 지닌 인력이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탄선 스님을 도운 300명의 스님이 혜민국 제조 한상덕을 도운 60명의 의원과 대비되며 기술된 것은 그같은 추정에 힘을 싣는다. 허흥식은 고려시대의 사찰이 피접(避接) 또는 종생(終生)의 장소로 이용되었던 사례에 주목하며 그와 관련하여 의승(醫僧)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지적한 바 있는데(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97-중판, 334쪽),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고려시대 불교계의 수준 높은 의학적 성취가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활인원에서 활약한 300명의 스님을 배출한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초 서활인원의 제조 자격으로 탄선 스님을 천거했던 한상덕이 도성 축성이 시작되자 혜민국 제조로 이름을 올린 것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동활인원과 서활인원의 구료 업무를 각각 제생원과 혜민국에서 분담했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혜민국 소속의 한상덕이 휘하의 의원들과 서활인원에서 활동하는 동안, 탄선 스님과 300명의 스님들은 동활인원을 관할하며 이곳의 업무를 전담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탄선 스님의 활동은 도성 축조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같은 해 가을 굶주린 백성이 서울로 몰려들어 연달아 저자[市]에서 걸식하는 일이 발생하자 원각사의 전신인 흥복사에 (아마도 임시로) 구료소가 설치되었는데, 탄선 스님은 또다시 왕명을 받아 이곳에서의 빈민구제 활동을 관장하게 되었다. 이때는 특히 죽을 쑤어 주린 자들을 먹이는 것이 주된 업무였는데, 이 조처로 생명을 보전하고 살아난 자가 많았다고 한다.(‘세종실록’ 17권, 4년 9월10일.) 이 기사에는 함께 활동한 스님들의 이야기가 실리지는 않았으나, 장소가 장소인 만큼 흥복사의 스님들이 노동력의 큰 축을 담당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이는 또한 조선시대의 많은 임시 구료소가 사찰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을 노정하는 예이기도 하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nirvana1010@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