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주주의의 위기와 도산 안창호의 마을공화국
현대사회에서 돈과 정보는 갈수록 극소수에게 집중되고 주권자인 국민은 일자리를 잃고 힘없고 가난한 삶으로 내몰리고 있다. 불안정한 국민을 정치적 야심가와 독재자들이 선동하고 조종함으로써 민주주의는 혼란과 위기를 맞는 것 같다. 대의정치만으로는 국민의 주권, 존엄, 행복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지고 있다. 주권재민과 민주공화의 이념은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정치의 결합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 민주공화국은 국민이 정치와 삶의 주인과 주체가 되는 마을공화국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 자치와 협동의 마을 공화국을 이루어야 한다.
주권재민과 민주공화의 이념을 추구하는 민주 시대의 지도자는 주권자인 국민 위에 군림하는 통치자도 아니고 국민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영도자도 아니며 무지몽매한 국민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계몽주의 지식인도 아니다. 민주 시대의 지도자는 국민이 주권자로서 자치와 협동의 공동체적 삶을 살도록 섬기며 이끄는 지도자다.
도산 안창호는 1905년 미국에서 한인 동포들과 함께 ‘서로 보호하고 단합하는’ 공립(共立)협회를 조직하였다. 도산은 민(民)이 ‘서로 보호하고 단합하는’ 것이 문명부강의 뿌리와 씨라고 갈파하였다. 이로써 도산은 약육강식과 부국강병의 국가주의적 문명관과 국가관을 극복하고 주권재민과 민주공화의 이념과 철학을 확립하였다. 민주 정신과 이념을 체득한 도산은 평생 민주공화의 공동체를 추구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활동할 때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할 때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온 다음에도 민주공화의 공동체적 삶을 마을공화국(모범촌, 이상촌)의 형태로 실현하려고 애를 썼다. 그가 주도한 ‘흥사단입단문답’에는 전국의 마을마다 자치와 협동, 교육과 문화의 이상촌을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그 이상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
도산은 독립운동과 흥사단 운동을 통해서 서로 보호하고 단합하는 공동체적 삶을 한결같이 추구했다. 이러한 삶과 활동의 과정에서 형성된 도산의 철학은 그대로 마을 공화국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한민족을 깨워 일으켜 서로 보호하고 단합하는 나라를 이루려 했던 도산은 한민족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여 마을공화국을 이루고 민주공화의 나라를 세우려 했다. 한민족의 장점과 단점은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잘 나타나 있다. 형용사와 부사가 발달하고 객어(客語, 상대)가 문장을 주도하는 한국어는 소통과 교감, 배려와 존중의 언어다. 한국어의 이런 특징은 한국인이 정이 깊고 풍부하며 관계를 중시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한국어에는 1인칭 주어 ‘나’가 생략되거나 ‘우리’로 뭉뚱그려지며 3인칭이 없다. 이것은 삶과 행동과 생각의 주체인 자아 ‘나’가 확립되기 어렵고 제삼자의 자리에서 객관적이고 공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가 확립되지 못하고 객관적이고 공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기 어려우면 당파와 진영의 감정과 논리에 빠져들기 쉽다. 도산은 한민족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극복하고 보완하는 방식으로 민이 서로 보호하고 단합하며 자치와 협동의 공동체 생활을 하는 마을 공화국의 철학을 정립하였다.
2 마을공화국의 철학
도산이 형성한 마을공화국의 철학은 어떤 것인가? 그는 주권자인 국민의 주체적 자아를 확립하는 ‘나’철학을 확립하였으며, 공동체 구성원의 행동원칙으로서 무실역행(務實力行), 생활원리로서 애기애타(愛己愛他), 생활정신으로서 대공정신을 제시했다. ‘나’철학과 무실역행은 주체적이고 실천적인 자아의 확립을 위한 것이다.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애기애타의 원리는 정이 깊고 풍부한 한민족의 소통과 교감, 배려와 존중을 위한 능력과 정서를 함양하고 높이는 것이다. 대공정신은 진영과 당파의 논리와 감정을 넘어서 전체의 자리에서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정신이다.
1) ‘나’ 철학: 건전인격의 형성
도산에 따르면 국민은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서 나라의 일에 대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도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결국 그 책임을 국민이 져야 한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그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산은 모든 일이 ‘나’에게서 시작되고 ‘나’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구체적인 어떤 이의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나’가 나라와 마을의 책임적인 주체로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려면 덕력·체력·지력을 길러서 건전한 인격을 확립해야 한다. 자치와 협동의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이끌어가려면 자치와 협동을 할 수 있는 덕성과 역량을 길러야 한다. 자치와 협동의 덕성과 역량은 덕력과 체력과 지력을 갖춘 자아의 건전한 인격에서 나온다.
도산은 건전한 인격을 가지기 위하여 자아와 인격의 끊임없는 수양과 혁신을 추구하였다. 도산에 따르면 건전한 인격을 바탕으로 조직과 단체의 단결을 이룰 수 있다. 조직과 단체의 단결을 바탕으로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어 건전한 민주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 건전한 인격이 마을공화국의 기본토대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하여 도산은 날마다 ‘몸을 고치고 집(가정)을 고치는’ 일에 힘쓴다고 하였다.
2) 행동원칙 무실역행
도산은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고 놀고먹으면서 공허한 담론과 주장을 일삼는 양반 지배층의 허위의식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는 거짓이 나라를 망쳤다면서 거짓을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하였다. 거짓과 불신이 지배하는 사회는 망할 수밖에 없다. 진실하고 정직하게 힘써 일하고 행동할 때 정의롭고 힘차고 풍성한 사회가 될 수 있다. 도산은 거짓과 불성실을 가장 미워하였다. 그는 꿈에서라도 성실을 잃었으면 통회(痛悔)하라고 하였다. 도산은 정직과 진실을 가슴에 모시어 들이자고 하였다.
정직과 진실은 공동체적 삶을 세우는 기둥이다. 도산이 마을공화국 주민의 행동원칙으로 제시한 무실역행에서 무실(務實)은 내용과 실질에 힘쓴다는 말이다. 인간관계와 일, 삶과 행동의 껍질과 형식이 아니라 속 내용과 알맹이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표면과 형태보다는 정신과 뜻에 충실한 것을 나타낸다. 무실은 공허한 관념과 주장이 아니라 과학적 인과관계에 충실한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다. 무실은 진실하고 정직한 것이며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것이다.
무실역행은 진실한 행동을 힘껏 하는 것이다. 마을주민이 저마다 진실한 행동을 힘껏 하면 마을공동체의 삶은 갈수록 힘차고 풍성해지며 성숙해질 것이다. 무실역행하는 사람이 많으면 서로 믿고 사랑하는 관계를 이루고 자치와 협동의 삶을 살 수 있다. 덕력·체력·지력을 길러서 건전한 인격을 이룬 사람은 무실역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건전한 인격과 무실역행은 마을공동체 생활의 기본토대이고 기둥이다.
3) 생활원리 애기애타(爱己爱他)
애기애타는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남을 사랑하고 존중하라는 말이다. 도산이 주장한 애기애타는 자치와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마을공화국의 생활원리다. 자치와 협동의 삶을 살려면 국민은 먼저 주권자인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이라야 주권자 구실을 할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애기(愛己)는 주권자로서의 자기를 존중하고 바로 세우는 민주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생활원리다. 나를 주인과 주체로서 사랑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남을 주인과 주체로서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다.
애기애타(爱己爱他)의 사랑은 대등하고 자유로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친구와 동지의 사랑이다. 이것은 나와 남(타인)을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존중하는 사랑이다. 주체로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살리고 크게 길러주는 것이고 서로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애기애타에서 애타도 남의 주체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므로 ‘애기’라고 할 수 있다. 애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자신의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며 애타는 동지와 친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일 뿐 아니라 나라와 세계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고 자연환경과 우주 전체를 사랑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애기는 사적 영역을 나타내고 애타는 공적 영역을 포함한다.
나와 남을 주체로 사랑하고 실현하는 애기애타는 민주혁명과 과학혁명을 이룬 근현대 정신과 철학의 원리다. 민주혁명과 과학혁명을 이룬 근현대의 시민은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민주시민은 저마다 제 삶의 주체로서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서 서로 대등하고 자유로운 친구와 동지의 관계를 이루며 서로 사랑하고 협동해야 한다. 도산은 자기를 주체로 여겼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주체로 존중하고 사랑했으며 사람뿐 아니라 일과 물건과 환경도 주체로 존중하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닦아세웠다.
4) 생활정신 대공정신(大公精神)
주권자인 마을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과 행복을 실현하면서 민주공화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지녀야 할 마을공화국의 정신은 대공정신이다. 대공정신은 개인과 당파, 이념과 진영의 차이와 경계를 넘어서 자치와 협동의 공동체적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정신이다. 주권재민과 민주공화의 이념과 정신을 체득한 도산은 먼저 공과 사를 함께 존중하고 실현하는 공사병립(公私竝立)의 원칙을 확립하였다. 공사병립은 공을 위해 사를 희생하지 않고 사를 위해 공을 희생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공 속에서 사를 보고 사 속에서 공을 보는 것이다. 공과 사를 함께 존중하고 실현함으로써 공과 사가 서로 힘이 되고 서로 실현하고 완성하게 하는 것이다.
도산은 개인의 삶과 정신을 살리고 높임으로써 공의 영역을 열어가고 확대하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개인의 덕력·체력·지력을 길러 건전한 인격을 확립하고 건전한 인격을 바탕으로 조직과 단체의 공고한 단결을 이루고 조직과 단체의 공고한 단결을 바탕으로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려고 하였다. 또한 도산은 건전한 민주국가를 세움으로써 세계의 번영과 평화를 이루려고 하였다. 마을공화국은 마을의 작은 공동체지만 국가를 넘어서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지향한다. 도산은 정치·경제·교육의 평등, 민족과 민족의 평등을 바탕으로 세계의 번영과 평화를 지향하는 세계대공(世界大公)을 말하였다. 도산이 확립한 공사병립, 활사개공, 세계대공의 공공(公共)철학은 민(民)의 주권, 존엄, 행복을 실현하는 마을공화국의 철학이면서 민주공화의 나라와 세계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철학이 될 수 있다. ('행정 포커스' 2021년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