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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호 목사 (강의 2) _ 오재호 목사02 관계회복의 축복과 성령/ 2023 영남합회 장막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잠자리가 바뀌어서 불편하지 않으셨는지요? 제가 이렇게 집회를 가다 보면 집회를 준비하시는 분들은 강사에게는 제일 좋은 것을 줍니다.
어떤 집회를 갔는데 바닷가가 보이는 좋은 호텔을 잡아주는 교회도 있었고요.
또 그렇지 못한 교회도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잠옷 반해서 이렇게 잠을 자기도 했는데 저는 그때마다 좀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곳에 묵으면서 말씀을 전하고 다니셨을까? 어제 제가 드린 말씀의 핵심은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된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증인이 된다고 말씀을 드렸고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되지 아니하고는 우리의 마음속에 새 마음이 생겨날 수 없다라고 말씀을 좀 드렸습니다.
불편하시고 힘든 상황이 있으시겠지만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한번 자꾸자꾸 생각해 보시면 우리의 마음속에 없는 마음이 없는 생각이 생겨나게 됩니다.
오늘 저는 두 번째 시간으로 어제는 거듭남의 비밀 이게 왜 거듭남의 비밀이라고 말씀드렸는가 하면 그분을 자꾸 쳐다보면 우리 속에서 신기한 게 생겨나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말씀을 좀 드렸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관계 회복의 축복과 성령이라고 하는 주제로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영상을 잠깐 하나만 짧은 것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프리카 사막의 초원의 한 사파리를 여행하는 여행객들이 영상을 찍은 것입니다.
아프리카 초원에 있는 사슴은 우리가 흔히 보는 사슴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뿔이 훨씬 길어서 그 순해 보이는 사슴들이 잘 싸웁니다.
사슴 두 마리가 서로 뿔을 맞대어서 싸우고 있을 때 저쪽에서 사자 한 마리가 옵니다.
보지를 못했지요
결국 사자에 의해서 한 마리 사슴은 죽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우리 또 가족들이 서로 다투면 누가 제일 기뻐할까요? 누가 제일 슬퍼할까요? 여러분 자녀가 다툴 때 제일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사람은 부모님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관계가 껄끄럽고 다툴 때 교회가 분쟁이 있을 때 우리 하나님이 제일 안타까워하시지요.
그리고 사단은 제일 기뻐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틈을 타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됩니다.
성령의 임재가 언제 임하는가?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이 될 때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물론 성령이 임하시면 망가진 관계가 회복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애를 쓸 때 성령이 임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그들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누가 크냐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거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저 멀찌 귀에서 따라오고 뒤에서 누가 크냐고 쟁론 다투고 싸우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가버나움 이제 집에 들어가셔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참 우리 예수님 표현이 참 아름다워요.
길거리에서 뭐 디스커션 했냐는 것입니다.
근데 뭐 했어요? 싸웠다는 것입니다.
늘 관심사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 준비할 때 사도행전 1장 14절은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하는데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크냐라고 다투던 제자들이 서로 마음을 합하여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사도행전 37페이지에 있는 불화와 최상권을 잡으려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인 교재를 통하여 모두 친밀해졌대 내가 더 이상 높아지려고 하는 욕망을 버렸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여기 교회정은 8권에 있는 말씀 함께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은
제자들이 완전한 연합을 이룬 후 그들이 더 이상 최고의 자리를 위하여 다투지 않게 되었을 때였음을 주목하라.
성령이 언제 임했는가 하면 더 이상 높아지려고 하지 않고 최고의 자리를 위하여 내가 앉을까? 너가 앉으면 안 돼 다투지 않을 때 그렇게 연합을 이룰 때 성령께서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 충만한 제자가 되어야 증인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이제 관계 회복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관계 회복을 통해서 어떻게 성령을 받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볼 터인데요.
어제도 말씀드린 것처럼 먼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말씀을 좀 읽겠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와 이르되, 주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7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이르노니 일곱번뿐 아니라 7번을 70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옴에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단 아이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함에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내가 빌기에 내가 내 빚을 전부 탐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내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 아니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함께 읽겠습니다. 35절 시작 너희가 각각
잘 아시는 우리 1만 달란트 탕감 받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수능을 준비하는 고등학생 3학년 학생이 당당하게 선생님에게 나와서 선생님 그 대학을 가려면 수능 점수를 몇 점을 받아야 합니까라고 당당하게 물었다면 공부 잘하는 학생일까요 못하는 학생일까요?
그 점수를 몇 점을 받아야 그 대학을 갈 수 있습니까라고 힘이 없이 물으면 공부를 못할 학생이 가능성이 높지만 당당하게 나와서 점수를 묻는 학생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입니다.
여러분 여기 예수님이 예수님께 나온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라고 하는 이 베드로의 표현이 당당한 표현입니까 쭈뼛쭈뼛한 표현입니까? 굉장히 당당한 표현이에요.
몇 번쯤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용서를 잘하는 사람의 태도예요.
용서를 못하는 사람의 태도예요.
용서를 잘하는 사람이 이런 질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몇 번쯤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용서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저 웃으십니다.
7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 7번까지 우리 용서할 수 있어요? 쉽지 않아요.
그죠? 근데 예수님의 대답이 뭐예요
여러분 유대인 랍비들은 당시에 세 번 정도 용서해 주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통상적인 그 용서의 두 배를 하고 한 번을 더 할 거라고 말을 했기 때문에 적어도 베드로의 기대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대답은 뭐라고 생각했을까요? 베드로 너 정말 대단하다.
칭찬받을 줄 알았습니다. 근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뭐예요
여러분 그러면서 예수님이 한 이야기가 이제 1만 달란트 탕감의 빛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예수님 제자들은 그 당시에 이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이 돼 있었지만 말은 살면서는 아람어를 썼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죄라는 단어하고
빚이라는 단어는 아람어로 단어가 호바라는 단어인데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 이야기하고 뒷이야기는 같은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6장 12절에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태복음 6장 12절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여러분 그 헬라어 원문에는
죄라는 단어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원어는 어떻게 돼 있는가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에게 빚을 사해주옵시고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런데 그 말씀을 유대인들은 아무 어려움 없이 그게 죄 용서에 관한 말씀인 것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죄라는 단어와 빛이라는 단어는 호바라고 하는 단어로 아람으로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 예수님이 빚탕감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빗이야기가 아니고
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제자들은 다 알았습니다.
여러분 너무나 잘 아시는 이야기죠 만 달란트 얼마쯤 될까요? 1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의 현재 가치를 조금 이해하는 것이 이 비율을 이해하는 데 조금 쉽습니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데나리온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나오는 한 하루 일당이었습니다.
6천일 일하고 버는 돈이지. 그래서 여러분 요즘 일당이 자꾸 올라가는데 싸게 잡겠습니다.
10만 원을 잡으면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는 6억 원입니다.
작은 돈이에요? 큰 돈이에요? 굉장히 큰 돈이죠 그럼 만 달란트는요
동그라미 4개를 붙여야 됩니다. 그러니까 6만억입니다.
6만 억이라는 용어는 없지요 육조입니다.
이게 만약에 하루 일당을 20만 원으로 잡으면 12조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조단위에요 조단위라는 돈을 개인이 갚을 수 있어요? 불가능한 것이죠.
이 사람이 공금을 횡령했는지 어쨌든 임금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10대 나리오는 말 그대로 100일 일하고 버는 돈이지.
일당을 10만 원으로 잡으면 천만 원입니다.
적은 돈은 아니지. 그러나 이 1만 달란트와 10데나리온의 가치를 비교를 하면 6조대 천만 원입니다.
너무 감이 머니까 우리 숫자를 3개 떼겠습니다.
6조에서 3개를 떼면 60억입니다.
천만 원에서 숫자 3개를 떼면 만 원입니다.
잘 생각하셔요 여러분 60억 빚을 줬습니다.
스트레스일까요? 아닐까요? 여러분 빚져 보셨습니까? 여러분 제가 목회를 하면서 빚진 분들 여러분들을 만났어요.
얼굴 모습을 보면 늘 우울합니다. 힘들어하고 여러분 채무자의 삶은 절대로 기쁠 수가 없어요.
채권자가 오라고 하면 가야 되고 온갖 모욕적인 말을 하면 다 들어야 되고 그 빚 때문에 채무자의 삶은 여러분 그 사람이 갚을 수가 없는데 60억이라는 돈을 갚을 수 없는데 주인이 임금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다 탕감을 시켜줬습니다.
기쁠까요? 별로 안 기쁘신 것 같아요.
그렇게 60억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나가다가 자기가 만 원 빌려준 사람 만났어요.
60억 탕감받고 나오면서 많은 빚진 사람 목을 틀어쥐고 갚아.
여러분 이 스토리가 가능한 이야기예요 불가능한 이야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60억을 탕감받고 나갔는데 나한테 많은 빚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 목을 틀어쥐고 갚으라 그러겠어요 됐다 그러겠어요
근데 왜 이 비유에서는 목을 틀어쥐고 갚아라 그랬을까요?
여기 1만 달란트 탕감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죄의 용서가 무한히 크다는 의미이고요.
백데나리온의 탕감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에 대한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에 비해서 지극히 작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잘 아십니다. 여기 실물 교우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지은 죄를 저희 형제가 그들에게 지은 죄와 비교한다면 1만 달란트대 백데나리온 즉 거의 100만 대 1이나 되는 아까 저희는 60만 대 1로 잡았습니다.
저희는 하지만 되는데도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 한 가지 정말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 본문에 1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의 기쁨이 있어요 없어요? 여러분 정말로 이 사람이 임금이 자기가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준 것을 믿었을까요?
여러분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까? 믿으십니까? 그게 막 자다가도 기쁘세요 그게 너무 감격이 되셔요.
여러분 그러면 그게 정말 기쁘고 정말 감사가 되면
내가 어떤 죄를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는지 감격이 되고 기쁘면 우리는 절대로 우리한테 잘못한 사람을 그렇게 대할 수가 없어요.
근데 우리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니까 십자가를 믿으니까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은 뭐 해요? 알아요? 근데 그게 아는데 나하고 잘못한 관계에 있는 사람한테는 아무 효과가 없이 나타난다 이 말입니다.
이 사람하고 똑같아요.
여러분 정말 우리가 믿는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7세기에 이 네덜란드 화가였던 렘브란트 유럽 미술사에서 참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별명이 빛의 화가예요.
빛을 잘 이제 이 그림에 넣는데 이 세개의 십자가라고 하는 이 그림은 아닙니다.
쇠판에다가 철판에다가 화학약품을 부어가지고 부식을 시킵니다.
그럼 이렇게 화학약품이 막 끓어오르면 부식이 생기면 거기에 못이나 송곳 같은 것으로 이렇게 긁어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날카로운 어떤 그런 표현들을 잘 할 수 있는데 여기 세계의 십자가라고 하는 제목으로 애칭 기법으로 이 판화를 만드는데
여러분 여기 노란 동그란 원 안에 있는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렘브란트 자이에요.
여러분 렘브란트는 17세기 사람이에요.
근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에이디 1세기잖아요.
거의 16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있는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골고다 언덕에 그 자리에 자기도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그려놓은 거예요. 무슨 의미일까요? 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저 죽음에 자기도 그 자리에 있었고, 내 죽음이 한 죄의 행위가
거기에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저주하고 욕을 하던 그 사람들의 무리 속에 자기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내 죗값을 치르기 위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그림을 만들 때 자기도 집어넣은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한 책임이 정말 그 유대인들, 그 종교 지도자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을까요?
그건 분명한 사실이고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용서에 오늘 여러분의 저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여기에는 담겨져 있는 것이지 그 용서를 깨닫는 것이, 그 용서를 감격하는 것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회사에 출근을 하다가 엘리베이터에서 교복을 입은 한 고등학생을 만났습니다.
고등학생을 만나서 생면부지 처음 보는 학생이었습니다.
지갑을 꺼내가지고 1만 원짜리 하나를 꺼내서 줬습니다.
그러면서 학교 가서 친구들하고 맛있는 거 사 먹어 그랬습니다.
고등학생이 멀뚱멀뚱해졌습니다. 낫은 처음 보는 사람이 돈 많은 을 주니까 어떻게 했을는지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직장인이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개인 블로그에다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오늘 회사에 출근하다가
엘리베이터에서 한 학생을 만나서 만 원을 줬다.
정말 이 일을 예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대.
내가 오늘 이렇게 한 것은 쭉 써요.
왜 그렇게 했는가 하면 자기가 고등학생일 때 학교를 가는데 원 신사분이, 양복을 입고 출근을 하는 신사분이 자기를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뭔 볼 일이 있나 싶어서 갔더니
지갑을 열고 1만 원짜리를 하나를 꺼내서 주면서 오늘 학교 가서 친구들하고 맛있는 거 사 먹어 그랬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이지 황당하기도 하고 그 만 원을 받아가지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한테 야 오늘 학교 오는데 이런 일이 있어서 이거 만은 받았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지.
그래서 매점에 가가지고 친구들하고 그날 신나게 먹었던 기억이 있었어요.
근데 그게 잘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두고두고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나도 꼭 이거 한번 해봐야 되겠다 그러고 나서 한 거예요.
여러분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 젊은이가 이 신사가
회사에 출근하면서 그렇게 지갑을 꺼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잘 모르는 그 고등학생에게 1만 원짜리 하나 주는 게 쉬워요 어려워요? 쉽지 않죠 근데 자기가 옛날에 그 누군가로부터 만 원을 받은 경험이 있어요.
그 있는 사람이 이 경험을 하기가 쉬워요 어려워요? 어렵지 않죠
그 만 원을 준 그날의 기억이 감동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감동적으로 계속 영향을 주고 있는 한 이 만 원을 주는 것은 쉽지 어렵지 않다는 거죠.
여러분 이게 뭔가 하면 그 사람하고 고등학생하고 이 신사하고는 아무 상관없지만 자기가 살면서 어떤 모르는 존재와 경험을 했는지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학생을 대하는 태도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뭘 이야기하는가 하면 오늘 우리한테 잘못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과 나하고만의 관계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 저는 살고 목회를 하면서 몇 번 특별한 경험을 좀 한 적이 있습니다.
소백산 유스호스텔에서 제가 이제 학원에서 목회를 할 때
주니어 캠프 미팅을 할 때였습니다. 어제 제가 운전을 하고 내려오는데 이 이정표에 소백산이라고 하는 이정표가 보일 때 저는 또 그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그때 했던 소백산에서의 경험 캠프는 3박 4일 동안 했습니다.
그런데 약 한 준비를 4~5개월 동안 열심히 준비를 했고요.
어쩌다 보니까 이제 제가 대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학생이 약 한 30한 50명이 참석을 하였고 주니어 선생님들하고 외국인 선교사들하고 합쳐서 한 200명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500명이 넘는 캠프였습니다.
이틀 먼저 캠프장에 들어왔고 총 5박 6일을 머물렀습니다.
그 총 5박 6일 동안 잠은 10시간을 자지를 못했습니다.
밥은 한 서너 끼밖에 먹지 못했습니다.
이제 너무 신경이 쓰이고 할 일이 많으니까
굉장히 피곤했습니다. 이제 캠프가 마치는 마지막 날 새벽이 되었습니다.
눈이 일찍이 떠졌고 한 장소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근데 너무 피곤하고 어깨도 아프고 온 만신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워서 기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옆에 벤치가 있어가지고 그냥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랬더니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지나갔습니다.
이 캠프를 위해서 준비했던 여러 시간들 그러면서 잠시 순간적으로 이 캠프 대장을 맡아가지고
가족들하고 시간도 잘 못 보내고 내가 할 일도 잘 못하고 이렇게 정신없이 살았을까 순간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근데 이건 아주 잠시 시간이 지나면서 이 캠프를 하면서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가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참 많았어요. 그중에 하나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배우는 시간을 가지고
또 교사들이 얼마나 그 아이 하나하나를 챙기면서 헌신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었고 또 목회자들을 함께 만나서 함께 일을 하면서 서로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그때까지 학원 목회를 할 때에는 학원은 굉장히 바빴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생들 성경 공부 가르치고 그러면
그 학원 교회 안에서만 정신이 없었지 다른 목회자가 어떻게 지냈는지 잘 대화하고 만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 저 목회자 저렇게 일하고 헌신하고 알게 되고 고맙고 굉장히 받은 축복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내가 뭔가를 이 캠프 대장을 하면서 잃어버린 것이 있으면 그 잃어버린 것만큼 잃어버린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누군가가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갑자기 예수님 생각이 나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잃어버렸지 무슨 대접을 받았지 무슨 결과로 내가 생명을 얻고
여러분 이것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꼬리를 물고 제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그걸 평소에 모르는 거 아니잖아요 근데 그날 계속 그 마음속에 그 예수님의 희생하시는 장면들이 머릿속에 쭉 지나가면서 이제 눈에는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왜 그런 경험이 있었는지 저는 잘 몰라요.
그날
한참을 그 벤치에 앉아서 그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생각이 나서 울었습니다.
아마 남들이 보면 꼭 미친 놈 같았을 것입니다.
여기 이렇게 닦고 콧물의 눈물에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이제 폐회식을 할 시간이 되어서 이제 강당으로 가려고 일어섰는데
여러분 그때까지 제 온 몸을 내리누르고 있던 무거운 어깨, 팔다리 쑤시고 있는 것들이 정말 기틀처럼 가벼워진 것입니다.
전혀 제가 만졌어요. 어깨도 만지고 다리도 만지고 팔도 만지고 이거 왜 이러지 여러분 정말로 걸어가는데 몸이 너무너무 가벼운 거예요.
저는 그날 새벽에 있었던 경험을 잊지를 못합니다.
여러분 평소에 제가 알고 있는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제가
폐회식을 하는데 뭐 아무 준비된 말씀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새벽에 있었던 경험을 잠깐 이야기해 줬습니다.
우리 선생님들, 우리 목사님들, 우리 외국에서 오신 선교사님들 여러분들 이렇게 희생하고 시간을 잃어버리고 돈을 잃어버리고 이런 거 이런 거 잃어버려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분들이 잃어버린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어떤 것들이 얻게 되었는지 그것들을 쭉 이야기하면서 여러분 그게 바로 예수님 닮은 모습입니다.
우리가 조금 잃어버렸는데 누군가는 많이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그때 그 경험을 하면서 처음에는 제가
https://youtu.be/X5NbSvgWleQ
잃어버린 것이 약간 억울했는데 시간도 제 무엇도 근데 그 예수님의 희생으로 죄가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이후에는 무슨 생각까지 들었는가 하면 아 내가 좀 더 많이 잃어버렸더라면
지금보다 좀 더 많이 잃었으면 누군가는 더 많이 얻게 되었을 것인데 그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이건 제정신이 아니죠 제 생각이 아니죠.
예수님이 주신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잃어버리셨고 그것이 정말 나에게 생명을 주시게 된 계기였다는 사실이 우리는 그저 이렇게 교회를 다니니까 문덕문덕 이해를 하는데
인정을 하는데 여러분 그게 정말로 나한테 힘들게 하고 서운하게 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힘이 되어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죠.
여러분 1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은 전혀 기쁨이 없었습니다.
전혀 감사도 없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요.
아까 돈 단위에 환산을 해서 60억을 내가 탕감을 받고 돌아간다면 기쁨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여러분 자다가도 기쁨이 있지 않겠어요? 내가 60억을 갚지 않아도 된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나한테 만 원을 빚진 그 사람을 목을 틀어쥐고 갚으라 그러겠습니까? 됐다 내가 지금 얼마만큼 탕감을 받았는지 아느냐 많은 신경도 쓰지 말고 가라 그냥 가라.
여러분 그렇게 되어야 정상 아니에요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받았다라고 확신한다면
내가 정말로 다른 사람이 나한테 섭섭하게 한 말이 못 잊혀져서 잠이 안 올 수 있겠느냐 이 말이에요.
여러분 아이러니하지 않아요? 여기 한 분의 간증을 좀 읽어드리겠습니다.
저와 아버지의 관계는 늘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제가 유년기와 청년기를 지나면서 끊임없이 기도했던 것은 저와 아버지의 관계가 호전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6~7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제 마음속에 있는 공허함을 채워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제로 공부를 위해 기도하던 중에 뭘 위해서 기도하던 중에 성령을 주제로 공부를 위해 기도하던 중에 아내와 저는 믿음의 산 경험을 많이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족을 위해 기도할 때 저는 특별히 아버지를 위한 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저는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특별한 힘을 얻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제게 잘못하여 마음에 쌓였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그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저와 아버지는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더 영적인 신자가 되었고 자신의 신앙 경험을 친구들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저희는 아직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참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령을 받기 위해 매일 기도하기 시작한 이후로 저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놀라운 삶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물론 인간적인 노력도 했겠지만 성령을 주제로 공부를 하고 기도하고 초점을 예수님께 맞추기 시작할 때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 사람과의 관계는 그 사람과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훨씬 더 큰 근원에 대한 해답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여기 마더 테레스가 테레사가 그레도라고 하는 영어로는 애니웨이라고 하는 글을 썼는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논리적이지 않으며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도 용서하십시오.
당신이 친절하면 사람들은 이기적이라고, 꿍꿍이 속에 있을 거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래도 친절하십시오. 당신이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실된 적을 만날 것입니다.
그래도 성공하십시오.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이 속일 것입니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십시오.
당신이 여러 해 공들여 만든 것을 누군가가 하룻밤에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래도 만드십시오. 당신이 평정과 행복을 찾으면 사람들이 질투할 줄 모릅니다.
그래도 행복하십시오. 오늘 당신이 좋은 일을 하면 사람들이 종종 내일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십시오.
당신이 제일 좋은 것을 주어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제일 좋은 것을 주십시오. 당신은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일이지 당신과 사람 사이의 일이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 무정하고 사랑 없는 사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일 쉽지 않아요.
근데 그게 그 사람하고 나하고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결국 그 사람에 대한 일도 하나님하고 나하고의 관계고
뭔가 알아주지 못하고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속일 때 내가 계속 그 사람한테 정직하게 할 수 있는 것도 그 사람하고 나하고의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하고 나하고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사람한테 어떻게 했느냐는 결국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어떠했느냐가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지 한 가지 질문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남을 용서해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실까요? 함께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35절 시작
이제 ox 퀴즈를 하겠습니다. 답을 하셔야 아무도 안 들지 마시고 ox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
5 손 들어보시오 확실하게 표현하셔요.
손 드셔요. 손 내리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신다.
x라고 하시는 분 손 들어 보세요.
손 내리시고요. 조금 아까보다 조금 많습니다.
손 안 대신 분은 뭐예요?
색깔을 확실하게 하셔요. 그래야 자기가 잘못하는지 잘 알고 있는지를 알아요.
여러분 이 마태복음 18장 35절에 의하면 o예요 x예요 오죠 이 마태복음 18장 35절을 그대로 읽으면 o예요.
여기 봐봐요.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랬잖아요.
그럼 엑스라고 손 왜 드셨어요
여러분 제가 이 답을 x라고 그러면 질문을 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이 질문이 오거라. 그러면 제가 이 질문을 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한 가지 더 질문을 드리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 안 해준다라고 만약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읍시다.
그럼 하나님 수준이 어때요?
우리가 다른 사람 용서 안 해주는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 안 해주면 하나님 수준이 굉장히 높아요.
우리랑 비슷해요. 하나님 그런 분이에요.
이사야서 보면 내 생각은 너희 생각하고 뭐해 너희 생각이 땅이면 내 생각은 하늘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수준이 아니에요.
그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너 저 사람 용서해 주지 않냐 그럼 나 너 용서 못해준다.
그럴까요? 그런 것처럼 보여요. 이 구절은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잊어요.
왜?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되니까. 여러분 보셔야 이게 무슨 뜻인지 여기 실물 교훈 251페이지 굉장히 중요한 표현입니다.
제가 파란 글자를 읽을 테니까 빨간 글자를 읽으셔요.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냈는데 우리가 남을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받는 게 아니라 남을 용서한 것처럼 용서받는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서 우리가 과연 그 사랑을 내 것으로 삼았는지의 여부를 증거하게 된다.
여러분 봐봐요.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 용서할 건지 용서 안 하는지 그 태도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내 것으로 삼았는지의 여부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 말은 뭔가 하면 내가 저 사람 용서 못하고 있어요.
그럼 내가 그 용서를 내 것으로 삼았어요 못 삼았어요? 못 삼았다는 걸 드러내는 거지
용서를 못 받았기 때문에 확신을 못하는 거예요.
용서를 했는데도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여러분 이 차이예요. 용서를 안 했기 때문에 용서를 못 받은 게 아니에요.
용서를 이미 해줬는데도 그걸 내 용서로 뭐 해? 못 받아들이는 거지.
못 받아들이니까 용서를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거지.
여러분 봐봐요. 용서를 못해서 못 받는 거 하고 용서를 해줬는데 못 받는 거 하고는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못하는 것이 용서를 못 받는 증거가 아니고 용서를 그것 때문에 못 받는 게 아니고
용서를 받은 그것이 내 것으로 생생하게 감격과 기쁨으로 안 되니까 용서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 말은 이미 용서했는데도 내 것으로 생생하게 못 삼으니까 그건 용서 안 된 거나 똑같다 이 말입니다.
용서를 안 해줘서 못 받은 게 아니고 용서를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내 것으로 못 만드니까 못 삼으니까 용서 못 받은 거나 진배 없다 이 말이죠.
제 말 이해됩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때문에 용서해 주는 게 아니에요.
이미 그분은 용서를 다 하셨어요. 그게 십자가예요.
여러분 그게 정말로 생생한 감동이 되느냐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은 1만 달란트 탕감 받고 나갔다니깐요.
근데 기쁨이 있다 없다 그러니까 나한테 작게 빚진 자도 목을 틀어쥐고 갚으라는 거지.
우리하고 똑같다 이 말입니다. 우리 여러분 여기 제가 질문했을 때 우리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다 용서받았습니까? 그러면 다 아멘해요.
근데 돌아가서는 섭섭한 사람한테 계속 섭섭하다니깐요.
그거는 내 것으로 삼은 거예요 못 삼은 거예요
이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전에 진짜 예수님하고 나와의 관계가 회복이 돼야 돼.
그래서 여러분 정말로 그 사랑이 그 용서가 안 믿겨지면 오늘 이분 찾아가야 돼.
찾아가서 예수님 정말로 제 죄가 용서받았습니까? 묻고 확인하고 자꾸 그분 쳐다보셔야 돼.
또 쳐다보고 이해 안 되면 또 쳐다보고 또 묻고
여러분 여기 보시오. 치료봉사 476페이지.
그대가 마땅히 받을 만큼 평가를 받지 못하고 그대의 노력이 인정받지 못하고 그대의 사업이 너무 어렵다는 등의 생각을 결코 갖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참으신 것을 생각하고 불평하는 생각을 일치해 버려라.
빨간 글자 같이 읽습니다. 시작. 우리는
여러분 교회에서 수석 집사님으로 열심히 교회 일을 딱 했는데 아무도 안 알아줘.
담임 목사님까지 몰라 기분이 어때요? 섭섭하죠?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그때 그때 예수님 바라보라는 거죠.
여러분 이게 거듭나는 거예요. 거듭나는 것은 한 번 끝나는 게 아니에요.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 계속 그분 쳐다보면 없는 생각이 생긴다니깐요.
여러분 그게 새 마음이에요. 그걸 계속 유지하는 것이 거듭남의 상태를 유지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받을 대접을 못 받는다라고 생각할 때 예수님 한번 쳐다보셔봐요.
여러분 예수님은 받을 대접을 받았어요.
여러분 봐봐요. 여러분이 요 직급의 요 대접을 직급에 요 직급 대접을 받아야 편안한데 내가 이 수준인데 요 대접 받아서
굉장히 불편하잖아요. 근데 저렇게 높은 분이 나보다 더 비천한 대접을 받아 내가 그걸 쳐다봐요.
그럼 어떤 느낌이 들까? 내가 뭐라고 나보다 저렇게 높고 저렇게 고매하고 고상한 분이 에게 이런 대접을 받네.
여러분 그분을 자꾸 쳐다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내가 받는 이 대접이 이상하지 않아요
여러분 이게 예수님 바라볼 때 내 마음에서 새로운 생김이에요.
이게 새 마음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기쁠 때도 예수님 쳐다봐야 돼 슬플 때도 예수님 쳐다봐야 돼.
내 마음에 분노가 돼서요. 여러분 제가 살다 보면 섭섭한 일 생길까요? 저도 생겨요.
여러분 그때 저는 옛날에는 막 그 사람들하고 아온다옹했어요.
왜 이렇게 대접하냐 세상에서는 사람들하고는 잘 안 그랬습니다.
주로 집에서 그랬지.
근데 지금은 이제 제가 정신을 차려습니다.
지금은 그런 상황이 생기면 그거 놔두고 저는 제 혼자 방에 갑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시대의 소망 펴요.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대접을 받으셨는지 그거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거 한참 읽고 생각 한참 하고 나오면 그 내 생각이 그렇게 확 올라오던 생각이 사라져버려요.
여러분 이게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이에요.
오늘 첫 번째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나한테 어떤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베푸셨는지가 생생하게 확인이 돼야 돼.
여러분 이게 그냥 본다고 확인이 안 돼요.
이 고도의 말씀이 어떻게 한 번 딱 보고 가슴에 팍 안 됩니다.
자꾸 생각해야 돼.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그때 반드시 우리의 마음속에 그분이 주시는 새 마음이 생겨나요.
여러분 이게 성령 받는 비결입니다. 사랑이 먼저지 순종이 먼저인지 이런 사랑이 생겨나서 말씀을 계명을 순종하면 제일 좋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그랬습니다.
맞죠?
제일 좋은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우리 모든 신앙의 수준이 이렇게 돼야 됩니다.
예수님 사랑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게 아니고 뭐야? 지켜지는 삶을 사는 게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안 될 때 어떡하겠어요 요한복음 15장 10절도 함께 읽습니다.
시작.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14장 15절에 의하면 예수님 사랑하는 게 먼저죠 계명 순종하는 것보다 맞아요.
요한복음 15장 10절에 의하면 뭐가 먼저예요? 계명을 지키는 게 먼저예요.
예수님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하나님의 사랑에 거한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 예수님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겠다.
이거는 계명을 순종하는 게 먼저예요.
우리 어머니가 왜 자꾸 브로컬리를 먹으라 그랬는지 왜 운동을 하라 그랬는지 여러분 그거 하기 싫은데 순종하다 보면 거기에 그런 축복이 의미가 있구나 깨닫게 되는 것처럼 순종하면 계명 속에 어떤 사랑이 녹아 있는지를 알게 되는 거죠.
이건 두 번째입니다.
여러분 보시. 마태복음 27장 32절에 보면 구렌의 시몬이 예수님 보러 왔다가 예수님이 늘 십자가로 골고다로 올라가면서 쓰러지고 쓰러지고 하는 것을 보고 로마 군병들이 십자가를 지고 데리고 갑니다.
이때 구현의 사람 시모는 십자가를 지고 싶었어요 안 지고 싶었어요? 억지로 졌습니다.
이게 이제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다라고 하는 것이 이제 그 법이었습니다.
여기 시대 소망에 보면 갈보리까지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이 시몬에게는 큰 축복이 되었다.
그는 그때 이후로 그 같은 섭리를 항상 감사히 여겼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그다음 단어가 뭐예요? 자신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고 그다음 뭐예요 여러분 왜 억지로 졌는데 그다음부터는 자본에서 지게 됐을까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마지막 현장까지 따라간 사람은 별로 안 돼요.
요한 시몬
백부장 여러분 그 십자가까지 따라간 사람은 예수님의 그 숨 가쁜 소리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어 달리셔서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그 기도 소리 아버지께 모든 자기의 것들을 다 맡기면서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그분의 모습 십자가까지 안 따라갔으면 못 본 것들을 보았다 이 말입니다.
억지로 갔어요. 시모는 억지로 갔기 때문에 남들이 못 보는 예수님을 본 거예요.
거기서 저분이 누구다 그걸 알게 된 거죠.
그러면서 그다음부터 십자가를 져야 될 상황이 생기면 자원에서 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사랑해서 계명을 지켜지는 삶을 사는 게 제일 좋아요.
그럼 그렇게 안 될 때 어떡하겠냐는 거지.
그래도 순종해야 돼
그래도 순종해야 돼. 이게 억지 순종이에요.
올바른 건 아닙니다. 하지만 억지 순종을 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그 마음을 알아요.
제가 남아공에 선교사를 모집하는 일을 3년을 하러 갔습니다.
제가 케타운에서 하나님 식기에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하고 저 뒤에서 인사를 하는데 한 흑인 여성이 뚱뚱한 여성이 다리를 쩔뚝쩔뚝거리면서 와요.
저하고 인사를 하고
그냥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냥 울어요.
당황했습니다. 인사하고 나서 우니까 뭔 사연이 있나 보다.
한참 지난 다음에 저에게 뭐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목사님 보시다시피 제가 다리가 굉장히 아픕니다.
무릎이 아픕니다. 오늘 아침 눈을 떴는데 정말로 교회에 오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억지로 교회에 왔습니다.
근데 한국에서 온 목사님이 설교를 하대요.
그러면서 그 이어지는 말 오늘 제가 가지고 있는 아픔이 있었고 문제가 있었는데 하나님은 목사님을 통해 제게 답을 주셨습니다.
이게 그게 그분의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다리가 너무 아파서 교회 오기 싫었어요.
그럴 때 있잖아요. 안식일 아침에 여러분 그때 어떻게 하셔요? 방송 보지 뭐 그래도 돼요 근데 이 사람은 그때는 방송에 있을 시절도 아니니까
억지로 왔는데 그 억지로 온 여인의 마음을 예수님 아셨을까요? 아셨겠죠 그래서 그녀에게 답을 준 거죠.
부족한 저를 통해서 여러분 그 여인이 다음 주 안식일에 교회 오기가 조금 더 쉬웠을까요? 그죠? 여러분 이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을 경험할 때 인간관계에 대한 해답은 분명히 생깁니다.
근데 그렇게 되지 않을 때라도 뭐예요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합니다.
그때 성령이 임해요. 그때 하나님이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족과의 관계를 제가 시간 나는 대로 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제가 이 말씀하기는 참 좋아합니다. 그럼 여기 베드로전서 3장 7절 남자분들 여기 계신 남편들 다 읽겠습니다.
시작.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오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의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계신 모든 남편들 대답하셔요. 성경은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표현합니다.
맞죠? 그럼 남편은 무슨 그릇일까요? 여러분 지금 제가 묻는 질문은 신학적인 질문이 아니고 국어입니다.
국어 성경은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표현합니다.
그럼 남편은 무슨 그릇이에요?
왜 답이 이렇게 달라요 무슨 그릇? 연약한 그릇 안에는 무슨 그릇? 더 연약한 그릇 굉장히 당황스럽네요.
남편은 무슨 그릇? 연약한 그릇 그럼 성경이 말하는 부부의 정의가 뭐예요? 연약한 그릇인 남편과 더 연약한 그릇인 아내가 함께 사는 게 부부예요.
저는 여기 계신 남편들 본인 연약한 그릇 맞아요 그럼 왜 안 연약한 척하셔요 왜 강한 척하셔요 여러분 여러분의 아내들이 남편을 보니까 연약한 거 맞아요 연약한 남편들에게 성경은 뭐라고 말을 하는가 하면 당신들의 아내들은 더 연약한 그릇이니까 뭐 하게 여겨라?
귀하게 여겨라. 여러분 제가 이거 종이컵인데 만약에 사기 컵이나 크리스탈 컵 같은 거 떨어뜨리면 어떻게 돼요? 끼지죠 함부로 떨어뜨리지 않도록 보호하는 게 귀하게 여기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은 여성을 만들 때 남자와 좀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훨씬 더 감성적이죠 눈물도 많고 올림픽 해봐요.
남자 경기하고 여자 경기하면 기록이 다르지.
여자들은 체력도 약합니다. 근데 정서도 훨씬 달라요.
그래서 여자들의 정서는 남자들하고 다릅니다.
근데 여러분 애교도 있고 따뜻하고 친절하고 부드럽고 그 여성을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근데 여러분 그 여성성이 계속 살아있는 것은 그 누가 해야 될 몫인가 하면 남자들이 해야 돼요.
남자들이 그 여성성을 묵사발을 만들어버리면 왜 사라지거든요.
여러분 기억하세요 엄마는 강해야 됩니다.
엄마는 자녀를 키워야 되는 모성애가 있는 강한 존재지만 여자는 강하면 안 돼요.
여자는 할머니가 되어도 부드럽고 따뜻하고 친절하고 애교가 있어야 돼.
아니 진짜 근데 그걸 파괴시키는 제1 원인은 남편입니다.
그래놓고 자기에게서 그래서 아내를 그것을 잘 못 가꾸어 놓고 그런 것들이 필요하니까 바깥에 눈을 돌리는 거지.
여보 오빠 뭐 이렇게 하는데
여러분 잊지 마세요. 우리 모든 남편들은 아내들을 어떻게 여기라? 귀하게 여기라 귀하게 여기 여러분 이게 예수님의 모습이에요.
예수님이 교회를 이렇게 귀하게 여기시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이 에베소서 5장에 말하는 부부 관계잖아요.
여기 남편들 함께 읽겠습니다. 재림 신도의 가정 215페이지 시작.
그리스도께서는 권위를 지혜와 모든 친절과 온화함으로 행사하셨되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의 능력을 행사하되 교회에 큰 머리 되신 분을 모방하도록 하라.
하나님이 가장에게 권위를 줬어요. 여러분 가장 사장 원장 권위가 있잖아.
그 권위를 어떻게 쓰라는 거죠? 지혜롭게 친절하게 온화하게 그래서 예수님이 그 권위를 어떻게 썼는지 자꾸 모방하라는 것입니다.
흉내내라는 것이죠. 남편들 또 읽습니다.
시작.
존경이 사라지고 나면 사랑은 더 이상 오래가지 않는데 그대에게 탄원하노니 지금 돌아서서 겸손히 그대의 아내에게 잘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라.
우리 여 집사님도 이거 말씀을 읽고 이런 말씀이 있구나 이래야지 여기다가 아멘.
이렇게 하면 이제 아내들에게 하는 말씀도 분명히 있거든요.
이제 그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혹시 우리 남편들이
지금까지 살면서 아내를 귀하게 못 여겼으면 사과하셔야 돼요.
여러분 그래야 관계가 회복이 돼요. 여러분 성령을 받으려면 여기 성령을 받으려면 너희가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여러분 내 마음의 관계가 깨어지고 내 마음속에 죄가 있으면 이 마음 성전에
거룩한 성령이 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깨끗함을 우리는 만들어야 돼.
여러분 우물이 신선하고 아주 맑은 우물물이 있는데 그 우물물을 많이 길어 오려면 뭘 준비해야 됩니까? 두레박하고 물통 깨끗한 크고 깨끗한 잘 비워진 물통을 갖고 가야 채워올 거 아닙니까? 내 마음을 그렇게 둬야 된다.
아내들에게 말씀합니다. 아내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절 시작.
여기서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는 남편은 예수님 안 믿는 남편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아내의 말로 말미암지 않고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오늘 안 믿는 남편들을 구원하는 것을 하나님은 믿는 아내를 통하여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늘 아래에 가면
믿는 남편을 통해서 안 믿는 아내를 구원한 이야기도 분명히 많을 거지만 그것보다 훨씬 많이 믿는 아내의 삶을 통하여 안 믿는 남편을 구원한 이야기는 훨씬 더 많을 겁니다.
근데 그게 쉽지 않아요. 그죠? 안 믿는 남편 구원하기가 근데 그게 아내에게 달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보면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와 같이는 앞에 뭔 예가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절이기 때문에 2장 끝부분 마지막 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이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이렇게 나옵니다.
무슨 이야기하다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 욕 들었어요 그때 어떻게 했어요? 같이 욕했어요.
아버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다 아버지께 맡긴 거죠. 그런 이야기를 쭉 하다가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아까 우리 여기 여집사님들 다 아멘 하신 분들 여기 왜 아멘 안 하셔요? 남편들아 아내들을 귀하게 여기라 아멘 그랬는데 왜 여기서는 아멘 안 하셔요?
한 가지 질문드리겠습니다. 남편들이 아내를 귀하게 여기는 게 어려울까요? 아내들이 이렇게 예수님처럼 남편에게 대하는 게 어려울까요? 둘 다 어려워요.
제정신으로는 안 됩니다. 거듭난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해요.
제가 한 분에게 간증을 들었습니다.
장로교회에 약 10년을 출석하던 분이었습니다.
이름만 신자였습니다. 남편이 늘 미웠습니다.
남편은 친구와 이런 술이 우선이었습니다.
자신과 아이는 뒷전이었는데 자주 이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몸이 아팠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유방암이라 그래요.
많이 화가 났습니다. 이게 누구 때문인 것 같아요?
남편 때문인 것 같아 그렇게 치료를 하다가 우리 재림교회와 연결이 됐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성경을 깊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성경을 읽으면서 깊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자꾸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자기가 병이 생긴 게 남편 때문이 아니고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자꾸 읽으면 읽을수록 그게 깨달아져 그게 누가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거 성령이 가르쳐주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을 열심히 보다가 내 죄가 생각나면 이걸 성령이 깨닫게 해준 거예요.
그동안 남편을 미워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편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 성경을 내게 너무 찔렸어요. 하러 남편이 퇴근하고 왔습니다.
여보 이야기 좀 합시다. 남편이 퇴근하고 왔는데 여보
내가 그동안 당신 정말 미워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정말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남편이 갑자기 황당했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여러분 상대방이 그렇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 듣고 있는 사람이 그래 당신 잘못이야 그래 여러분 상대방이 자기 잘못을 돌아보면 또 상대방은 자기를 돌아봐요.
아니야 여보 내가 잘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여러분 그러면서 이렇게 막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이 돼요.
근데 이번엔 계속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읽다가 베드로전서 3장 1절까지 온 거예요.
아내들아 이와 같이 남편들에게 순종하라.
와 이거 한번 해봐야 되겠다. 여러분 그렇게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그 안 믿는 남편을
그랬더니 그녀가 간증을 하는데 놀라운 마음이 생겨났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남편이 사랑스러워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신혼 때도 그런 게 없었대. 남편이 정말 사랑스러워 보이더래요.
여러분 이게 자기 생각일까요? 이게 예수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기가 예수님 없이 남편 그렇게 미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자기를 미워하고 증오한 게 아니라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며 그렇게 나를 측근하게 사랑의 눈빛으로 보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의 마음이 치유가 됩니다.
그러면서 그녀의 간증 마지막 부분에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이렇게 행복하구나.
여러분 성경에 화목되는 이야기 여러분 화목은 둘 다 하나님을 만나거나 한 사람만 하나님을 만나면 제대로 만나면 화목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성경에 봐봐요. 야곱하고 에서하고 화해하는데 에서는 아무 생각 없어요.
근데 야곱이 야복광에서 씨름하면서 하나님 만난 간격으로 나갈 때 하나님이 역사합니다.
요셉하고 그 형제들이 화해할 때 형제들은 별 생각 없었지만 요셉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담겨 있을 때 화해가 되지.
그래서 여러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대 소망 296페이지 시작
그리스도는 위대한 중심이심으로 그들이 그 중심에 접근하는 데 비례하여 서로 가까워질 것이되 누가 누구에게 맞추면 자존심 상하지만 예수님에게 서로 서로 향하면 가까워진다는 거죠.
그러니까 혼자 그렇게 해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쌍방이 그렇게 하면 더 가까워지죠.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누군가 예수님을 만난 마음이 생겨나야 이렇게 살아온 것이 잘못된 삶이구나.
그것을 깨닫고
귀하게 여기지 못했고 예수님 대하듯이 남편을 대하지 못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야 그걸 회복하려고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여러분 시간이 지났지만 제가 그냥 부모들과 자녀들을 잃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뭐 하게 여기지 말라.
노였게 만들지 말라. 그대는 가혹하고 지나치며 존재적이다.
그대가 초조해하고 꾸짖고 깎아내리고 함으로 그들은 그대에게 애정을 주지 않는데 그대는 그들에게 정당한 권리가 없는 듯 그대의 기분에 의해 손으로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기계라도 되는 듯이 그들을 대하였다.
그대는 그들을 노엽게 하였고 그들을 자주 좌절시켰다.
여러분 부모가 자기 영향력 아래에 있는 자식이라고 해서 얼마나 함부로 대했는지 모릅니다.
저도 그런 때 있었어요.
제가 그걸 깨닫고 나서 제 아들들한테 다 사과했습니다.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일이 있어야 돼.
자녀들에게 내 부모를 공경하라. 자녀들은 유아 시절부터 그들을 돌봐주고 병들었을 때 간호해 준 부모들에게 은혜를 입고 있음을 느껴야 한대.
그들은 부모들이 그들 때문에 많은 걱정을 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대.
언제 깨달을까요? 자기가 시집 장가 가서 자기 같은 아들 낳아보면 딸 낳아보면 이해합니다.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서 면제되는 인생의 기간이란 없다.
마지막 부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어떻게 부모를 행복하게 해줄 것인가 하는 것이 그들의 생애에서 주요한 연구 과제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 제가요 많은 부모님들 만나보면 우리 자식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까 고민하는 부모님 많이 봤어요.
특별히 우리 요즘 30~40대
근데 그들이 우리 이제 마지막 여생을 살고 있는 우리 부모님들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줘야 될까 그거 고민하는 사람 거의 못 봤어요.
이게 하나님 메시지예요. 여러분 제가 다큐멘터리 하나를 봤는데 2010년도에 여주에 있는 소망 교도소가 개소를 합니다.
이게 한국에서 최초로 민간인 교도소예요.
다 국가가 지정하는 관리하는 교도소인데 이거는 민간인 교도소에 처음 오픈을 했어요.
그러니까 여기 이제
전국에서 모범수들을 모아서 이제 여기에 운영을 하는데 전국 교도소에서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러니까 왔는데 모범수들이지만 이제 처음 여기에 교도소에서 생활하니까 이 실권을 잡기 위해서 뭐야 파블끼리 온 사람들끼리 막 싸우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교도소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이 교도관들이 통제가 안 돼.
그러다가 누가 한 제안으로 이 어머니라고 하는 단어를 붓글씨로 써가지고 액자를 만들어 가지고 강당에도 걸고 식당에도 붙이고 복도에도 붙이고 어머니라는 단어 하나를 계속 교도소 안에 전체에다가 여러 수십 군데 다 붙였어요.
그랬더니 이 싸우던 제소자들이 달라진 거예요.
싸우다가 저 단어 하나만 딱 보면 어떻게 돼 어머니
다 누구 생각났을까요? 자기 어머니 아들 하나 낳았는데 아들이 지금 여기에 들어와 있고 우리 어머니 지금 눈물 흘리고 그 단어 하나 보면서 숙연해지고 싸우던 거 다 그만둬 버렸어요.
어떻게 교화를 시키기 위해서 교도관들이 애를 써도 안 되는데 어머니라는 액자 몇 개 갖다 붙이고 나니까
이 교도소에 온 그 수감생들이 마음이 다 푸근해지고 온화해지고 그렇게 돼버렸다는 거 여러분 그게 어머니라고 하는 이름에 나타나 있지만 어머니의 삶에 나타나 있는 희생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거죠.
모든 사람이 그런 은혜 덕분으로 살아왔다는 것이죠.
여러분 제가 시간이 없어서 이 뒷부분은 못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두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거를 해야 오늘 우리 증인의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거 읽고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삼육학교 한 선생님의 간증입니다. 말씀을 볼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나의 인생과 내 속에 숨은 죄들을 이 말씀 속에 다 기록해 놓은 것 같았습니다.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곤 했습니다.
나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잘못 살아온 것들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내 남편, 내 아이만 원망하고 살았는데 그들의 잘못이 아닌 내가 더 큰 잘못이었고 죄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얼마나 평안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제 삶에 엉킨 실타래들을 주님이 하나하나 풀어주셨고 세상에 얽매여 있는 것들을 끊고 버리는 일들이 제가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전에 먹고 입고 즐겁게 여기던 것, 좋아 보이던 것, 해보고 싶었던 것들, 나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들이 얼마나 가치 없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누가 시키고 가르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다음 말이 뭐
제게 그런 마음들을 주셨던 것이 미리 새 마음이지요.
미웠던 남편이 얼마나 고맙고 친정 아버지를 미워했던 마음이 불쌍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도할 줄 모르던 제게 순간마다 기도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게 해주시고 그다음 날 성경의 내용도 모르고 예수님이라는 것도 얘기할 줄도 몰랐던 제게 오직 말씀과 예수님 이야기만 하고 싶어졌습니다.
이게 뭐예요? 증인이 된 거지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고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을 경험하면서 새 마음을 경험했을 때 예수님 이야기가 막 나오더라는 거지.
나를 이렇게 만드신 예수님 이야기가
여러분 결국은 성령이 충만할 때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증인은 경험한 사람이에요. 뭔가 할 말이 있어야 되는데 경험하지 않고 뭔 말을 하겠습니까? 오늘 다시 한 번 꼭 기억하실 것은 오늘 성령은 우리의 망가지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길 원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먼저 1차적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여러분 돌아보시고 그게 이해가 안 되거나 예수님 앞에 가셔요.
가셔서 묻고 또 쳐다보고 또 묻고 예수님 도대체 나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당신은 예수님이 저에게 베푸신 그 용서와 사랑은 도대체 얼마나 실질적인 것입니까? 묻고 확인하고 바라보고 감동받고 감격하고 가족과의 관계에서 그 사랑으로 대하면 제일 좋고요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자녀들과
부모님들과 배우자들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애쓰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그토록 성령을 주시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심을 인해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여서 새 마음이 되지 못하여서 이 마음 성전에 성령을 채우기 어렵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저희가 예수님이 용서하셨다라고 말은 하고 믿는데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생생한 감독과 감동과 감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자꾸 서운해하며 미워합니다.
이런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이 이루신 그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와 용서가 우리에게 어떻게 베풀어졌고, 은혜로 주어졌는지 생생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감동받을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의 배우자들에게, 자녀들에게, 부모님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잘못했다라고 용서해달라고 용기 있게 말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회복된 관계 속에 성령 임하게 도와주시고, 그렇게 만드신 예수님을 우리의 입술을 들어 증거할 수 있는 증인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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