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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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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
도망칠 거라면, 도망치는 것에만 전념해야 한다.
도망칠 때의 쾌적함이나 도망쳐 도착할 곳에서의 체면을 따지거나, 하물며 도망치는 것 자체를 머뭇거려서야 성공할 가망은 없다. 부끄러움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도망치고 또 도망쳐야 한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루이 16세도 앙투아네트도 ‘도망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던 게 아닐까. 아무래도 현실감을 결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과거에 집착하여 새롭게 출발할 수 없는 이는, 과거와 함께 결정화 될 수 밖에 없다.
p.51-52
루이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의지박약이었던데다, 간헐적이긴 하지만 오래도록 우울증이 있었던 인물로 이미 수도 없이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왔다. ... 아니, (아무것도 하지않고 머무르는 쪽을)선택한 것이라면 그나마 낫다.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게 된 것 뿐이었다. 누군가가 피난을 권하면 반대의견을 묻고 누군가가 “왕의 체통에 도망이라니요”라고 주장하면 이번에는 그의 대한 반대의견을 묻는 식으로, 끝없이 양쪽 의견의 부족한 부분을 두고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 된다며 따지느라 시간을 헛되이 보낸다.
p.74
여태까지 부박했던 그녀의 정신은 사지를 헤쳐나오면서 이처럼 단련되었던 것이다. 긍지 높은 합스부르크가의 피와, 부르봉 왕비로서의 자각이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그녀의 내면에서 결합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이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 ‘불행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p.100
신하가 애써 일을 성공시키고 나면 신하를 내친다 – 역대 모든 왕들이 해오던 방식이다. 루이 14세는 장군들로부터 승리의 명예를 아무렇지도 않게 낚아챘고, 루이 15세는 자신을 위해 헌신한 신하의 아내를 차지했다. 그들에게 다른 인간은 자신들을 받들어 모시기 위해서만 존재했다. 세계는 왕 자신을 중심으로 돌기 때문에 왕권신수인 것이다. 필요할 때는 곁에 두고 필요 없어지면 내친다. 거리낄 게 뭐 있겠는가.
p.106
(정략 결혼에도 사랑과 애정이 생겨난다는)경험을 통해, 루이 16세가 왕비를 소중하게 여길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그럼에도 유치하게 질투를 드러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 설마 이런 중요한 때에 이런 식으로 왕이 울분을 풀어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p.110-111
군중의 대부분은 파리의 굶주린 여자들이었지만 그 사이에 섞여서 모두를 선동하던 이들은 과격한 반왕정파 무리였다. 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꾸며댔던 그들은 일찌감치 앙투아네트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암약해 왔다. ... 그들은 모든 걸 왕비의 탓으로 돌렸다. 국고가 텅 비게 된 것은 사치스러운 왕비의 탓, 궁정의 풍기가 문란한 것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상대한다는 색정광인 왕비의 탓, 국제관계가 악화된 것도 모국 오스트리아를 편드는 왕비의 탓이었다. 후사가 좀처럼 태어나지 않는 것은 물론 왕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까지, 왕비가 좋지 못한 의견을 불어 넣어 왕을 어지럽히기 때문이었다. 왕비는 무죄라고 증명된 ‘목걸이 사건’도 실은 보석광인 왕비가 꾸민 일로, 실물은 아직 그녀가 갖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모든 재액은 전부, 그 ‘머리 빈’ ‘오스트리아의 암캐’ 앙투아네트에게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p.118-119
하지만 왜 외국의 군대가 나의 국민을 공격하도록 한단 말인가. 몽메디야 말로 최종 목적지 였다. 파리는 왕권을 부정하는 미친 군중이 장악하고 있기에 빠져나온 것일 뿐, 망명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국경 안쪽인 몽메디에 머물면서, 거기서 왕당파 국민을 향해 호소할 것이다. 그러면 질서는 저절로 회복될 것이다. 루이는 그렇게 확신했다.
p.129
라파예트는 이제까지 국민의회에서 왕가의 망명은 절대 없을거라고 보증해왔다. 엄중하게 감시하기도 했지만 루이에게 그럴 마음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망명할 생각이었다면 여태까지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국부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그러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프랑스에 머물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대귀족의 신분으로 시민 측의 국민방위대 지휘관이 되었던 라파예트는 스스로가 왕의 사고 패턴을 훤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자신감이 오히려 그를 방심하게 만들었다.
p.129-130
허나 ‘두 대륙의 영웅’이라는 별명을 가진 서른세 살의 지휘관은 행동력이 발군이었다. 그는 싫어하는 루이가 대형 베를린 마차 안에서 “라파예트 후작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라며 빈정거리는 동안에, 라파예트는 파리 시장 바이와 몇몇 의원들과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는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렸다. 자신의 권한 밖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이 책임을 지기로 하고 추적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약 2천 6백만이었는데 그중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을 합쳐도 25만에서 40만이었다. 연구자에 따라 숫자가 달리지긴 하지만 대체로 인구의 2~3%에 불과했다. 거기에 평민 계급으로 대두한 부유한 부르주아 층을 더해도 기껏해야 7,8%정도, 놀랍게도 이 한 줌밖에 안되는 특권층이 그 아래 90%의 사람들이 내놓는 땀의 결실을 독점하고 있었다. 성직자 계급 안에서도 꼭대기는 부유한 귀족 출신의 성직자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상급귀족은 자신들의 영역 안쪽에서만 혼인관계를 맺고 공직을 독점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률을 만들어 세금을 피해갔다.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는 구조다. 그들은 노동을 경멸했고, 국고가 텅텅 비건 말건 기득권을 버리지 않으려 했다. 단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으려 했다.
p.141-142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자가용 제트기를 타고 세계 곳곳에 마련해둔 저택을 돌아다니는 미국의 IT기업 사장과 최빈국의 난민 정도라고 하면 실감 할 수 있으려나. 사장과 난민이 얼굴을 맞댈 기회는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 파리와 베르사유에서는 대귀족과 빈민이 서로를 쳐다보며 지나다녔다. 전자는 후자를 들개 보듯이 보았고, 후자는 전자를 향해 굶주림에서 나온 증오의 시선을 쏘아보냈다. 혁명은 소빙하기에 의한 흉작에서 유발된 면도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이런 엄청난 격차에 내포되어 있었다. ‘귀족의 칭호는 선조의 도둑질과 만행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루소의 말, 또 “귀족, 재산, 훈장, 지위, 이것저것 보물을 챙기시는데, 귀하는 애초에 무엇을 하시었소? 수고라고는 태어났다는 것뿐, 겨우 그것뿐이지 않습니까?” 라는 피가로의 대사에 민중은 깊이 공감하여 분노를 불태웠다.
p.155-156
루이는 또 20분간 쉬자고 하고는, 용변을 보기 위해 왕태자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 역할을 맏았던 무스티에의 말에 따르면, 이번에 마차에서 내린 것은 남성들이 ‘여성들을 쉬도록’ 해주기 위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도중에 얼마든지 마차를 멈추고 쉴 수도 있었을 텐데 부러 사람들의 눈이 많은 역참에서 왕이 얼굴을 보일 필요가 있었을까. 게다가 왕태자는 소녀의 행색이었다. 완전히 해이해져서 위험할 정도로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발각되지 않자 자신이 생긴 루이는 더욱 대담하게 굴었다.
p.159
대형 베를린 마차는, 반쯤은 생 클루 궁으로 피서 여행을 하는 기분이 된 여섯 사람을 태우고 ‘오후 1시 49분‘에 역참 상트리스에 도착했다. 뒤에 모두 알게 되었지만 여기서 운이 갈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까지는 페르센이 가져다준 행운의 여분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여기서부터는 운 나쁜 루이16세가 조금씩 브레이크를 걸었던 것이다.
p.179
그들은 슈아죌이 생각한 대로 귀족의 습격을 두려워했다. 국경 너머의 망명귀족이 아니라 자신들을 다스리던 예전 영주의 습격이 두려웠다. 혁명이 본격화되면서 그들은 영주의 저택과 부속교회 따위를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했고, 관리인과 하인들을 죽였고, 이미 세금도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 점 때문에 언젠가 영주가 베르사유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복수하러 올 거라는 생각이 신경이 곤두서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p.181
이처럼 짓밟히고 이처럼 참혹하게 다뤄진 최하층의 사람들은 혁명을 통해 스스로 일어서는 방법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자신들이 극빈한 생활이 왕이나 궁정과 관계된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고, 상류계급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들과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고, 체격도 태도도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라고 믿었지만, 혁명파가 발행한, 그림이 들어간 신문과 팸플릿이 그런 착각을 바로잡아주었다. 말하자면, 왕이 지상의 신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허위이며, 지금의 왕은 돼지처럼 먹기만 할 뿐 무능하며 왕비는 씀씀이가 헤프며 음란하고, 이들이 밭에서 난 것들을 빼앗아가니까 농민이 빈곤하고, 이들이 없어진다면 얼마든지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p.186-187
왜 발로리에게 용기병들이 기다리고 있을 역참까지 먼저 달려가라고 하지 않았을까? 발로리 혼자 달려갔다더라면 꽤 빨리 생트 므누와 클레르몽에 도착했을 테고, 그랬다면 어느 쪽이든 지휘관에게 왕이 근처에 있다고 알릴 수 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 생각을 못했다. 경기병들이 사라진 이 상황에 충격을 받은데다 다음 역참에서는 어떻게 될지에만 정신이 쏠려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특히 루이는 융통성이 부족해서 일단 한사람에게 어떤 일을 시키도록 정하면 다른 일을 맡길 생각을 못 했다. 발로리의 일은 어디까지나 마차의 앞쪽을 달리는 것이었다.
p.217
페르센과 함께 계획 전체를 공들여 다듬어 실행한 부이예 후작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그것은 루이의 믿기 어려운 독단이었다. 실전을 경험해본 적 없는 루이는 일단 파리를 빠져나가자 서둘러 페르센을 떨쳐버렸고, 역참에서는 방심하여 신분을 드러내버렸고, 전혀 서두르지 않은 탓에 다섯 시간이나 늦게 약속 지점에 도착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p.267
도망칠 기회는 적잖이 있었던 것이다.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기기만 했더라면.
p.268-269
그런데 루이는 머리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형 베를린 마차를 두고 갈 결심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마차 자체도 상당히 값이 나가는 것인데다 대례복과 금은보석, 애써 긁어모은 거금이 가득 실려 있었다. 애초에 튈르리 궁전에서 탈출하는 날을 연기시킨 이유 중 하나가 왕실 경비가 지급되길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걸 모두 버리고 가자니 아무래도 아까웠다. 아까울 뿐만 아니라 무일푼은 곤란한 노릇이다. 어딜 가든지 수중에 돈이 없으면 괴로울 것이다. 2년 동안 연금생활을 하면서 루이는 재량껏 쓸 수 있는 돈이 늘 부족해서,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황실에게까지 몆차례나 자금 원조를 부탁했다. 카리스마가 있는 왕이라면 설령 달랑 맨몸으로 망명하더라도 얼마든지 자기편을 모아 다시 궐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는 자신에게 카리스마가 부족함을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측근들이 눈앞에서 썰물처럼 망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절감했다.
p.271
결국 신하의 입장에서는 왕의 명령을 따르는 쪽이 편한 것이다. 책임을지지 않아도 되니까. 부이예 장군같은 역전의 용사라면 몰라도 경험이 적은 그들에게 생사가 달린 국면에서의 판단 같은 건 도저히 무리였다.
p.279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던 루이는 애석하게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두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양, 온갖 위험을 생각해내어 하나씩 열거했다. ... 듣고 있는 동안, 이 계획은 도저히 성공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루이의 비관주의는 흡혈귀처럼 의욕이라는 의욕, 반론이라는 반론을 죄다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토록 기운 넘치는 라데조차, 마침내 풀이 죽어 머리를 숙였다.
새벽에 가까운, 가장 어둡고 음산한 시각에, 패기 없는 국왕에 대한 환멸과 경멸로 사람들은 질식할 지경이었다. 앙투아네트의 눈에 루이는 정말로 고독하고 지친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 지쳤다기보다 왕이라는 지위 자체에 지쳐 있다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남편에 대한 공감이 생겨났다. 거만한 태도를 높이 사는 궁정에서 거만할 수 없는, 즉 우스꽝스러운 인간으로 간주되는 것은 무엇보다 치욕스러운 노릇인데, 루이는 이미 자타공인 부르봉 왕조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왕이었다.
p.280-281
빈민 무리에게 떠밀려 베르사유에서 쫒겨나 왕으로서 힘도 쓰지 못했고, 신앙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데다 지금은 이처럼 연금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재차 탈출에 실패하여 자코뱅파의 무뢰배에게 들볶이며 다시 여기로 끌려오기라도 한다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수치스러울 것이다. 그렇게 될 바에는 오히려 파리에 연행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루이의 침울한 마음이 그녀에게도 전해졌다. ... 이 사람은 왕 같은 것이 되기보다 학자나 성직자가 되는 편이 훨씬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도...
p.296
하지만 만약 여기서 베를린 마차로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해도 혁명의 격류를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왕 일가가 몽메디에 무사히 닿았더라도 절대왕정으로의 복귀는 매우 어려웠을 테고, 결국엔 망명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국왕 살해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왕가는 단두대로 끌려가는 대신에 망명지에서 천수를 다했을 것이다. 혹은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루이 18세가 아니라 자신이 다시 왕좌에 복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뒤로 혁명이 다시 일어나 부르봉 왕조가 쫒겨난 것은 역사가 가르쳐준 대로다. 그리고 그 경우,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은 역사의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p.299-300
투르젤의 말에 따르면 왕비는 가세가 기운 부르봉 왕가로 영문도 모른 채 들어와 희생양으로 선택된 가련한 여성이었다. 옷과 치장에 빠졌던 것도, 보석을 좋아한 것도, 가장무도회도, 도박도, 마음에 든 사람을 중요한 것도, 다른 왕비와 애첩 모두 해오던 것이지만 유독 그녀만 공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시샘이 섞인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애정과 관심을 받지 못한 데서 온 원한이 이유였다. 그러나 아직 젊은 왕비는 주변의 그런 미묘한 심리를 알아차릴 능력이 없었다. 추종자들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식견이 없었음을 탓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자면 왕비뿐 아니라 실제로 정치를 담당하고 있던 신하들이야말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오히려 왕비는 오랫동안 누적된 치명적인 재정 적자를 알지 못했다.
이윽오 왕비가 적으로 가득찬 궁정을 싫어하게 되고 프티 트리아농에서 휴식을 구하게 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위압적으로 화려한 베르사유 궁에 비해 프티 트리아농은 무척이나 여성적인 낙원이었다. 사생활이 없는 숨 막힌 공간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장소였다. (고티에 다고티, 1777년) 그러다가 점차 매일같이 그곳에서 지내게 된 것은, 국고의 누적된 적자를 누구도 어쩌지 못할 거라는 압박감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정취를 인공적으로 꾸민 프티 트리아농에서 꿈처럼 아름다운 나날을 보냈던 것은 틀림없이 현실도피였다. 왕이 점점 더 사냥에 몰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생 클루 궁을 구입한 것도 그저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무렵 병약했던 왕태자 루이 조제프의 요양에 공기 좋은 피서지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권고 때문이었지만, 이 또한 왕비의 사치라고 고의적으로 왜곡되어 회자되었다. 루이 조제프는 바스티유 요새가 함락되기 한 달 전인 1789년 6월에 세상을 떠났고, 그보다 두 해 전에는 둘째 딸이 요절하여 두 명의 아이를 잃었는데도 사람들은 그녀를 거의 동정하지 않았다.
p.301-302
그보다 조금 전에 화가 비제 르브됭이, 국모로서의 왕비를 세상에 보여주고자 왕비와 아이들을 함께 그린 근사한 초상화를 완성했다. 왕후의 색인 붉은색으로 차려입은, 여성으로서 한창 때인 왕비가 어린 루이 샤를을 무릎에 앉히고, 곁에는 귀여운 마리 테레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싹 붙어 있고, 루이 조제프가 요람을 가리킨다. 하지만 요람은 텅 빈 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둘째 딸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것이다. 이 그림은 왕비의 슬픔을 대변했지만 결국 대중에게 공개되지는 않았다. 왕비에 대한 반감이 너무 커서 작품이 파손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린 비제 르브됭은 혁명이 일어나자 곧 망명했다.
p.303
국고의 적자는 태양왕 루이 14세 때부터 오래도록 누적되어 온 것으로, 루이 16세가 죄다 가져온 것도 아니고 루이 16세가 단번에 해결할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혁명파는 왕비를 ‘적자 부인’이라 부르며 모든 허물을 왕비 한 사람에게 떠념겨서는 자신들의 명분으로 삼으려 했다. 투르젤은 납득할 수 없었다. 미국 독립전쟁을 원조하여 막대한 경비를 지출하는 등, 나라의 경제를 휘청거리게 한 장본인들은 벌써 죽었거나 재산을 챙겨 망명했기 때문이다.
p.304
루이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이로부터 1년 반 뒤, 루이가 처형을 앞두고 기록했던 유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짐의 아내에게는, 내 탓에 그녀에게 닥친 불행과, 함께 지낸 동안 내가 그녀에게 주었을 슬픔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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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예전에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의 대한 성찰'을 읽은 적이 있었다. 저서에서 버크는 혁명 당시 프랑스 국민의 복수심에 사로잡힌 잔혹한 파괴가 도리어 혁명정신을 망가뜨렸다고 한탄을 했다. 실제로도 민주적으로 이뤄졌던 미국 독립혁명이나 왕의 폭정에 맞선 영국의 의회혁명들과 달리 지나친 과격성을 띈 탓에 국정이 불안해졌고 그것이 곧 나폴레옹이라는 독재자를 부르지 않았던가.
우리가 알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제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그녀는 한평생 대귀족 가문의 공주로 살았기에 철이 없고 세상 물정을 몰랐을지언정 사치와 향락에 빠져 프랑스 재정을 파탄에 빠트린 여인은 아니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 프랑스 국민들이 그렇다고 믿었던 왕비의 모습은 반왕당파들의 꾸준한 선동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뿐인가. 친자와 간통을 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죄목을 덮어씌워 기요틴에서 잔인하게 처형시키고, 처형전 일국의 왕비를 머리를 삭발시키고 짐수레에 태워 파리 시내를 돌렸다. 그리고 이용가치가 없어진 황태자 루이 샤를은 독방에 가두고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방치했다.
민주주의 혹은 민주국가는 철저한 이성적 타협에 의해 만들어진다. 프랑스 혁명이 낳은 그 감정왜곡에 의한 폭력성은 2015년 대한민국 광화문 광장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다. 경찰차를 부수고 죄없는 경찰들을 린치하고 태극기를 불태우며 그들은 하나같이 '민주주의'를 외친다. 300년전 혁명이란 이름 아래 귀족들과 왕당파를 무자비하게 강간하고 학살했던 파리 시민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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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p-322p / 297p / 594m
총 누적: 5,746m
첫댓글 아 오빠 덕분에 책 한권읽었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