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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위소(羅緯素) 연보
나위소(羅緯素, 1583년 선조 16년 11월 1일~1667년 현종 8년 7월 29일; 향년 85세)
조선 시대 중기 문신
조선 시대 호남의 대표적인 부호(富豪)
조선 시대 사대부 문학의 절정기를 구가한 국문학의 시조 시인
강호가계∙어부가계 연시조 「강호구가」(江湖九歌) 9수의 작가
어부가계 시조의 대표적인 시조 시인
17세기 나주의 문인
호조정랑•성균관직강•광주목사•원주목사•경주부윤•승정원좌승지(정3품) 등을 역임한 조선 중기 관료
증좌참찬(의정부 정2품)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초(史草) 「겸춘추일기일사」(兼春秋日記一事)의 저자
정개청(鄭介淸)의 문인
본관 나주(羅州)
나주 나(羅) 씨 직장공파(금암공파) 15세손
조부 금호(錦湖) 나사침(羅士沈)의 손자
부 금암(錦巖) 나덕준(羅德峻)의 셋째 아들
휘 위소(緯素)
자 계빈(季彬)
호 송암(松岩)
고조부 사림파 나일손(羅逸孫)
증조부 진원현감 나질(羅晊)
증조모 강진 최 씨 금남(錦南) 최부(崔溥; 1454년~1504년)의 여식
조부 이산현감•증좌찬성 금호(錦湖) 나사침(羅士忱; 1526년~1596년; 금남(錦南) 최박(崔溥)의 외손)
부 사포서별좌•보은현감•증 좌승지•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금암(錦巖) 나덕준
(羅德峻; 1553년~1604년; 향년 52세, 자 대지(大之))
모 장수 황 씨 익성공 황희의 6세손 증판결사 황호(黃顥)의 여식
(1551년~1594년; 향년 44세)
계모 문화 유 씨(출생 연도 미상~1605년 몰)
6대조 나자강(羅自康)의 3자(10세손)
나계조(羅繼祖)
나승조(羅承祖)
나봉조(羅奉祖)
5대조 나계조(羅繼祖)의 2자(11세손)
나일손(羅逸孫)
나길손(羅吉孫)
고조부 나일손의 4자(12세손)
한림 나창(羅昶)
나고(羅暠)
나질(羅咥)
나서(羅曙)
증조부 나질의 4자(13세손)
나사선(羅士愃)
나사순(羅士恂)
조부 나사침(羅士忱)
나사척(羅士惕; 이성현감 경력의 청백리)
조부 금호 나사침의 6자(14세손)
백부 소포(嘯浦) 진사•의금부도사 나덕명(羅德明; 1551년~1611년; 큰아들,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
부 금암(錦巖) 보은현감 나덕준(羅德俊; 1553년~1604년; 둘째 아들, 이율곡과 교유, 정개청(鄭介淸)의 문인, 기축옥사로 부령(富寧) 유배)
숙부 나덕윤(羅德潤)
숙부 증사옹원참봉 나덕현(羅德顯; 정개청의 문인, 기축옥사로 철원 유배)
숙부 나덕신(羅德愼)
숙부 춘신사 나덕헌(羅德憲;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
부 나덕준의 6자 2녀(15세손)
1자 나찬소(羅纘素)
2자 나계소(羅繼素)
3자 본인 나위소(羅緯素; 셋째 아들)
4자 나치소(羅致素)
5자 나경소(羅經素)
6자 나함소(羅緘素)
1녀 김잡(金磼)의 처
2녀 이광헌(李光憲)의 처
동항(同行)
남간(南磵) 참봉•별제•별좌•시인 나해봉(羅海鳳; 1584년~1638년; 부호군 나덕양(羅德讓)의 아들, 충렬공 나덕헌(羅德憲)의 조카, 강항(姜沆)의 문인, 의인(義人), 의병장)
송도(松島) 진사∙침랑 나해륜(羅海崙; 1583년~1659년; 한림 나창의 증손, 병자호란의 의병장)
처 양성(陽城) 이(李) 씨 부사 이정(李瀞)의 여식(1667년 사망, 향년 76세)
자(나위소의 3자)(16세손)
1자 태인현감•호조정랑•영국원종공신 나염(羅袡; 1611년 3월 15일~1661년 5월 18일; 자 자상(子尙), 중시 생원, 통훈대부 호조정랑, 태인•은율현감, 병자호란의 일등공신)
2자 선공감첨정 나반(羅襻)
3자 의금부도사 나진(羅袗)
여식
1녀 생원 김만수의 처
2녀 사인(士人) 이만종의 처
3녀 현감 정기수(鄭岐壽; 1622년~1701년)의 처
첫째 아들 나염의 2자(17세손)
1자 태인현감•통훈대부 용인현감•사섬시직장 나두삼(羅斗三, 1635년~1690년; 자 백수(白叟), 진사)
2자 생원•효릉참봉•통훈대부 동몽교관 나두장(羅斗章; 자 천서(天瑞))
첫째 아들 나염의 2녀
1녀 이강의 처
2녀 참봉 이로의 처
둘째 아들 나반의 3녀
1녀 정덕상의 처
2녀 군수 목창우의 처
3녀 권의의 처
셋째 아들 나진의 4자
1자 나두춘(羅斗春)
2자 나두하(羅斗夏)
3자 나두추(羅斗秋)
4자 낙헌(樂軒) 나두동(羅斗冬; 1728년 이인좌의 난 연루, 수운정 중수에 기여한 나문(羅門)의 효손)
셋째 아들 나진의 4녀
1녀 교관 윤상적의 처
2녀 진사 이만식의 처
3녀 이용징의 처
4녀 고가빈의 처
증손(나두삼의 2자)(18세손)
나만상(羅晩相, 1654년~몰 연도 미상; 자 국노(國老), 중시 생원)
나만적(羅晩迪; 숙부 나두장의 양자)
증손(나두춘의 3자)(18세손)
1자 나만치(羅晩致; 호남 제일의 갑부)
2자 나만서(羅晩瑞)
3자 나만규(羅晩揆)
증손 나두동의 1자(18세손)
나의조(羅義肇)
고손 나만상의 1자(19세손)
나숭대(羅崇大)
고손 나만적의 3자(19세손)
1자 나숭훈(羅崇訓)
2자 나숭의(羅崇誼)
3자 나숭열(羅崇說)
고손 나만치의 1자(19세손)
나숭엽(羅崇燁)
고손 나만서의 1자(19세손)
나숭곤(羅崇坤)
고손 나만규의 1자(19세손)
나숭대(羅崇垈)
고손 나의조의 1자(19세손)
나상탁(羅尙濯)
후손 나만수의 2자 4녀
1자 나성
2자 나취
후손 나만종의 2자
1자 나징선
2자 나징헌
후손 나기수의 1자 4녀
1자 진사 나중원
그 외 다수의 후손
1583년 선조 16년 11월 1일 전남 나주(羅州) 호남 부호의 집안에서 출생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에서 나위소의 아버지 보은현감 나덕준(羅德俊)과 아버지의 형제 나덕명(羅德明)과 사헌부감찰 나덕윤(羅德潤)이 연루되어 유배
1590년 기축옥사로 아버지 3형제의 스승 곡성현감•증 집의 정개청(鄭介淸; 1529년~1590년)이 경원(慶源)으로 유배 가는 도중 노환으로 사망
1593년 백부 나덕명 경성(鏡城) 유배 해제
1594년 선조 27년 12세 모친상
1605년 23세 부친상, 계모상
1610년 28세 양성 이(李) 씨 부사 이정(李瀞)의 여식과 혼인
1616년 광해군 8년 병진 증광시 생원 2등 21위 합격, 국자생원
1620년 수의부위, 적순부위, 진용교위 승훈랑
1621년 조산대부, 봉정대부, 통훈대부 제수
1623년 인조 1년 41세 계해 개시 문과 병과 8위 급제. 권지부정자, 통덕랑 참봉, 창부봉사, 교서관부정자, 직장 겸 교서관저작, 형조좌랑
1624년 인조 2년 42세 검찰사 조존성의 종사관, 형조좌랑, 옥과현감, 형조좌랑
1627년 인조 5년 옥과현감 재직 중 정묘호란 발발. 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무기와 군량 조달. 정랑 겸 기주관
1629년 인조 7년 47세 공조좌랑, 호조좌랑, 호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 호조 업무 일지 「겸춘추일기일사」(兼春秋日記一事) 기록. 낙향
1630년 인조 8년 48세 호조정랑 겸 기주관, 성균관직강, 성균관사예, 임천군수
1631년 인조 9년 49세 임천군수
1632년 인조 10년 50세 낙향
1634년 인조 12년 52세 성균관전적, 예조정랑, 봉상사검정, 태상시첨정, 상의사도정. 윤 8월 21일 부모례에 따라 나라에서 섭통례 나위소에게 아마 1필을 하사했으며, 여러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다(『인조실록』 30권).
1635년 인조 13년 53세 상의원정, 사도사정
1636년 인조 14년 54세 겨울에 풍기군수 역임.
1640년 인조 18년 58세 낙향
1641년 인조 19년 6월 7일~1644년 11월 2일 59세 원주목사 봉직
1644년 인조 22년 62세 낙향. 성균관사예, 판교 겸 편수관, 태상시정, 봉상사정 역임. 11월 2일 강원도 어사 김시번(金始蕃)의 계에 의거, 원주목사에서 파직 처분(『인조실록』 45권).
1645년 인조 23년 63세 성균관사예, 승문원판교, 춘추관편수관, 봉상사정 역임. 음력 9월 9일 신임 자산군수 나위소의 면직을 청하는 비변사의 계에서 자산군의 군사적 중요성은 감사가 직접 감영을 방비해야 하고, 무장 출신이 직접 군수를 맡아야 함에도, 일개 서생(書生)이 이런 군사적 요충지를 맡기에는 맞지 않다고 면직을 청해 윤허.
1646년 인조 24세 64세 이성현감, 은진현감, 연산현감 역임. 유탁(柳濯)을 토벌한 공으로 전사, 원종일등공신 임명. 좌승지 증작
1648년 인조 26년 갑인년 4월 17일 광주목사 임명, 4월 20일 통정대부, 밀양부사 역임. 광주목사 나위소를 개차(改差)하라는 사간원의 계에 대해 황집(黃緝)이 부당하다고 반박. 좌위사직
1649년 인조 27년 67세 낙향
1650년 효종 원년 68세 경주부윤 부임 후, 3년 봉직
1651년 효종 2년 69세 나위소가 은퇴를 결심했으며, 셋째 아들 나진(羅袗)이 아버지의 노후생활을 위해 향리에 수운정(岫雲亭) 건립
1652년 효종 3년 70세 연시조 「강호구가」 창작 추정
1653년 효종 4년 71세 경주부윤 3년 봉직 후 나주로 낙향해 나주 삼영리 영산강변 택촌마을 향리의 금호수(錦湖水) 위에 수운정을 짓고 노후를 보냄. 후에 노직 동지중추부사 임명.
1658년 효종 9년 76세 기축옥사(己丑獄事)로 나 씨 문중의 인재사당(因齋祠堂)이 폐쇄되었으나, 고산 윤선도가 이의 부당성을 상소했다.
1660년 현종 원년 4월 23일 「경자(庚子)년 간찰」(가로 31.4cmx세로 28.5cm
) 작성
1661년 현종 2년 79세 가선대부
1667년 현종 8년 7월 29일 서거. 향년 85세
묘역.
고산 윤선도가 만사(輓詞)를 올렸고, 나주 영산강가 영산(榮山) 언덕에서 장례를 치르고 묘역 조성.
1668년 처 양성 이 씨 사망, 향년 76세
1673년 현종 14년 「나위소 신도비」 건립(나주시 삼영동 산 57-1; 우의정 허목(許穆; 1595년~1682년) 비문∙친필)
1695년 나위소의 손자 나두하, 나두추, 나두동 등이 오래된 수운정의 중수를 협의했으며, 증손자 나만상(羅晩相)이 수운정 중수의 책임을 맡았다.
1723년 나위소의 외손 정중원(鄭重元)이 「수운정중수기」(岫雲亭重修記) 작성
1728년 이인좌의 난(무신정변)으로 나위소의 증손 호남 제일의 갑부 나만치(羅晩致) 집안과 영남 제일의 갑부 조세추(曺世樞; 1703년~1728년) 집안이 동시에 화를 입었다.
1976년 박준규 전남대 교수가 「강호구가」를 학계에 소개하고, 논문 「송암의 가계와 생애」 발표(논문), 5월 29일 박준규 저 「송암의 「강호구가」에 대하여」(『제17회한국언어문학회학술대회발표요지』) 발표(논문)
1979년 후손 독립운동가∙국회부의장∙보건사회부장관 나용균(羅溶均; 1896년 2월 25일~1984년 7월 6일; 향년 88세)이 필사본 『송암유집』(松岩遺集)을 발간하고, 김만영의 「수운정서」, 외손 정중원의 「수운정중수기」, 최서벽의 「수운정상량문」, 나두동의 「수운정중창상량문」 등을 수록했다.
1988년 박준규 저 「나주지방의 누정제영조사연구」에서 송암의 수운정제영을 누정 문학으로 논의
1989년 박준규 저 「송암의 수운정제영과 「강호구가」」(『어문논총』 제10∙제11호, 전남대 국어국문학연구회)
1996년 국사편찬위원회 간 한국사료총서 『조선시대사초 II』에 나위소의 「겸춘추일기일사」 수록. 김흥규 저 「16∙17세기 강호시조의 변모와 전가시조의 형성」(『어문논집』 제35집, 민족어문학회, pp. 219~ 221)에서 전가시조로 논의
1997년 박준규 저 「송암의 수운정제영과 「강호구가」」(『고시조 연구』, 국어국문학회 편(서울: 태학사, 국문학연구총서 3)) 발표(논문)
1998년 이상원 저 『17세기 시조 연구』에서 송암을 관료 출신 시조 문인으로 평가
2006년 유수양 저 「송암 나위소와 수운정문학」(『한국시가문화연구』 제18호, 한국시가문화학회, pp. 237~271) 발표(논문). 박준규 저 「송암의 생애와 「강호구가」」(『좌찬성공 송암 나위소선생 신도비명』) 발표(논문)
2010년 유수양 저 「송암 나위소의 문학 연구」(전남대 박사학위논문) 발표(논문)
2023년 2월 15일 나종혁 편 『조선 시조』에 나위소 작 연시조 「강호구가」 9수 수록(전자책)
* 「강호구가」: 남인 출신으로 71세에 은퇴해 고향 전남 나주 영산강변에 정자 수운정을 짓고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교유하며 지은 강호가계∙어부가계 연시조이다. 이 시조는 형식적으로 조선 시대 전기 「도산십이곡」과 「고산구곡가」의 전형적인 연시조 형식을 충실히 취한 조선 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사대부 시조이다. 또한 이 시조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와 동일한 어부가계 시조로 평가한다. 「강호구가」는 나위소의 후손 나용균(羅容均; 1895년~1984년) 소장 『나씨가승』(羅氏家乘)에 수록된 후, 1979년 『송암유집』(松巖遺集)으로 출판되었다.
* 『송암유집』(松巖遺集): 1979년 전남 영암 송암공 종중에서 나용균(羅容均; 1895년~1984년) 소장 필사본 『나씨가승』(羅氏家乘)을 『송암유집』 권1~2로 재발행하고 「강호구가」 시조 9수를 수록했다(나용균 편, 광주 일진인쇄사 인쇄). 『송암유집』에는 나위소의 한시와 시조 그리고 김만영, 이만웅, 이안로, 정철 등의 누정시가 수록되었다. 2권 1책 석인본이며, 나용균, 나도식(羅燾植), 나종완(羅鍾完) 공편이다. 이민수(李玟秀)의 서, 10대손 나평균(羅枰均)의 발이 포함되었다. 『송암유집』 권1에는 시 57수, 부 3편, 책 1편, 서(書) 16편이 수록되었으며, 권2 「부록」에는 수운정운 36수, 만장 28수, 서 68편, 김만영의 「수운정서」, 정중원의 「수운정중수기」·「사실기」, 「수운정상량문」, 허목의 「신도비명」, 시조 「강호구가」 등이 수록되었다. 『송암유집』은 현재 전북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겸춘추일기일사」(兼春秋日記一事):
1629년 인조 7년 10월 27일~12월 11일까지 호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 송암 나위소가 기록한 초록 일기 호조의 업무 일지이다. 나위소의 「겸춘추일기일사」(兼春秋日記一事)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초(史草)로서, 조선 시대 춘추관 사관 출신이 작성한 현존 6대 일기류 사초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부 업무 일지이기도 하다. 필사본 1책 6장이며, 크기는 27x24cm이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호조의 정사를 날짜별로 날씨를 병기해 매일 기록한 조선 정부의 공식 업무 일지이다. 나위소의 「겸춘추일기일사」(兼春秋日記一事)는 1996년 국사편찬위원회 간 한국사료총서 『조선시대사초 II』에 수록되었으며, 호남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수운정(岫雲亭): 1652년 효종 3년 70세 나위소가 경주부윤 은퇴를 결심했으며, 셋째 아들 나진(羅袗)이 아버지의 노후생활을 위해 향리 나주 영산강변에 정자 수운정(岫雲亭)을 건립했다. 소재지는 전남 나주시 영산포 삼영리 택촌마을(원 영산 영산리 영강(榮江); 현 나주시 삼영동 영산강변)이다. 이곳에는 송암 나위소가 71세에 관직을 은퇴한 후, 15년간 말년에 기거했다. 정자 이름은 중국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雲無心而出峀”의 시구에서 착안했다고 한다(신광재 기자, 누정 문학―5. 수운정(岫雲亭) ①」, 『나주투데이』, 2009년 1월 18일자 참조). 수운정의 위치는 나도선(羅燾線) 편찬 『나주군지』(羅州郡誌)에 수운정이 신촌면 영강(榮江)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695년 나위소의 손자 나두하, 나두추, 나두동 등이 오래된 수운정의 중수를 협의했으며, 증손자 나만상(羅晩相)이 수운정 중수의 책임을 맡았다. 1723년 나위소의 외손 정중원(鄭重元)이 「수운정중수기」(岫雲亭重修記)를 완성했다. 1979년 후손 나용균(羅容均; 1895년~1984년) 저 『송암유집』에 김만영의 「수운정서」, 외손 정중원의 「수운정중수기」, 최서벽의 「수운정상량문」, 나두동의 「수운정중창상량문」 등이 수록되었다. 수운정에 대한 나위소의 작품으로는 「수운정인경」 3수, 「수운정인사」 3수, 「강호구가」 9수가 있다.
나위소의 사위 정기수의 아들 참봉∙통덕랑 정중원은 평소에 한문을 잘해서 외할아버지 댁의 글을 쓰는 일을 했으며, 「수운정중수기」를 썼다. 정중원이 어린 시절 6세 때 수운정에서 열린 83세 외할아버지의 연회에 처음 참석했으며, 가족 친지들과 여러 손님들이 즐겁게 풍악을 울리고 노래했으며, 백발의 외할아버지가 노년에도 수운정 건립 이력만은 정확하게 기억했다고 술회했다. 후에 정중원의 차남 정희량(鄭希亮)이 영남에서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었다.
* 「나위소 신도비」(羅緯素 神道碑): 소재지가 전남 나주시 삼영동 산57-1번지이며, 나주 나 씨 경주공 종중 소유이다. 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14호로 2006년 12월 30일 지정되었다. 원 신도비는 17세기 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 신도비는 1716년 숙종 42년 중수되었다. 높이 140cm, 폭 63cm, 두께 22cm의 크기이며, 귀부와 이수가 “수려하고 생동감 있는 조각기법”을 썼다고 평가된다(「나위소 신도비」, 『두산백과』 참조). 신도비의 비문과 비의 글씨는 의정부 우의정 양천 허 씨 미수 허목(許穆; 1595년~1682년)이 썼으며, 송암 나위소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신도비의 소재지는 전남 나주시 삼영동 나주 나 씨 집성촌 나위소 묘역에서 약 50m 부근에 위치한다.
* 송암(松巖): 송암(松巖)은 자호이며, 집 뒤 바위 위에 두 그루의 소나무 쌍송(雙松)이 있어 이를 가리켜 지었다고 한다.
* 나위소 일대기: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해 숙부 나덕윤(羅德潤)으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그러나 12세에 모친상, 23세에 부친상과 계모상을 당하고 가세가 기울어 혼자서 어렵게 학업을 이어갔으며, 35세에 생원시에 합격해서 생원이 되었다. 41세에 문과에 급제해 진사가 되었고, 43세에 검찰사 조존성(趙存性)의 종사관을 하고, 형조좌랑에 올랐다. 옥과현감 재직 중에 정유호란이 발발해, 체찰사 이상국(李相國)을 도와 군량미를 공급했다. 후에 지관정랑 겸 기주관으로 승진했다. 형조좌랑, 공조좌랑, 호조좌랑, 호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 성균관직강, 성균관사예, 성균관전적, 예조정랑, 승문원판교, 동지중추부사, 승정원좌승지 등 중앙 관직 10여 년을 보냈고, 옥천현감, 임천군수, 풍기군수, 밀양부사, 광주목사, 원주목사, 경주부윤 등 20여 년의 지방 관직을 봉직했다. 70세에 지방 관직을 은퇴하고 나주로 낙향해서 영산강가 수운정(岫雲亭)에서 시조와 한시를 지었다. 80세에 가선대부가 되었고, 85세에 사망했다. 정3품 승정원좌승지∙증 정2품 의정부좌참찬.
나위소의 일대기는 의정부 우의정 허목이 신도비에 기술했으며, 외손 정중원은 「사실기」(事實記)에서 외할아버지가 쇠약해져 가족 모두가 부축하고 간병해야 했고, 한밤중에라도 외손을 부르면 대답하고 바로 일어나 공손히 나아가서 외할아버지가 특히 자신을 사랑했고, 외손의 효성에 대해 따로 밭을 상으로 주었다고 회고했다.
* 후손: 1653년 효종 4년 71세 경주부윤 3년 봉직 후 송암 나위소가 나주로 낙향하자, 나라에서 두 아들 나염과 나반의 벼슬자리를 나주 부근으로 옮겨 주고 아버지의 노후를 모시도록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송암은 자신의 평생 벼슬 생활에 만족하며, 자식들까지도 벼슬을 주고 같이 살게 해주어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노직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나위소의 가문이 기축옥사와 이인좌의 난에 직접 연루되기는 했지만, 후손들이 번성했다.
* 약헌(藥軒) 나두동: 나위소의 직계 손자이며 숙종조 인물로서, 나주의 역대 인물 47인의 1인이다. 『사례요람』(四禮要覽), 『가례주해』(家禮註解), 『의례집록』(疑禮輯錄), 『상례보주』(喪禮補注), 『기축록 동사』(己丑錄 東史) 등을 저술했다. 나두동은 「수운정상량문」을 쓰고, 조부 나위소를 기리는 일에 헌신한 나문(羅門)의 효손으로 알려져 있다.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사망했다.
* 나위소 가문의 계보: 나주 나 씨 직장공파 21세손 수익공(나주 나 씨 21세손 나수익) 문중 계보를 기준으로 한 나위소 가문의 약식 계보는 다음과 같다. 나주 나 씨 15세손 셋째 아들 나위소, 16세손 둘째 아들 나반, 17세손 나두계, 18세손 나경희, 19세손 나원주, 20세손 나언종, 21세손 나수익, 22세손 나동철, 나동진, 나동문, 나동화, 23세손 나영집, 나금집, 나봉집, 나문집, 24세손 나도만, 나도천, 나도표, 나도열, 나도순, 나도영, 나도민, 나도금, 나도기, 나도길, 나도수, 나도술, 25세손 나흥균, 나광균, 나용균, 나명균, 나영균, 나현균, 나승균, 나동균, 나남균, 나양균, 나재균, 나종균, 나덕균, 나보균, 나병균, 나정균, 나한근, 나한석, 나팔만, 나동균, 나오균, 나보균, 나대균, 나성균, 나전균 등.
* 나위소의 아버지 나덕준은 3자가 있었고, 1자 나찬소(羅纘素), 2자 나계소(羅繼素), 3자 나위소이다. 나위소는 부 나덕준의 셋째 아들이었다. 나위소의 3자는 1자 나염(羅袡), 2자 나반(羅襻), 3자 나진(羅袗)이 있었다. 나염의 2자는 1자 나두삼(羅斗三), 2자 효릉참봉 나두장(羅斗章)이 있었다. 나진의 4자는 1자 나두춘(羅斗春), 2자 나두하(羅斗夏), 3자 나두추(羅斗秋), 4자 나두동(羅斗冬)이 있었다. 나두삼의 아들 나만상(羅晩相)이 있었고, 나두장의 아들 나만적(羅晩迪)이 있었으며, 나두춘의 3자는 1자 나만치(羅晩致), 2자 나만서(羅晩瑞), 3자 나만규(羅晩揆)가 있었다. 나두동의 아들 나의조(羅義肇)가 있었다. 나만상의 아들 나숭대(羅崇大)가 있었고, 나만적의 3자는 1자 나숭훈(羅崇訓), 2자 나숭의(羅崇誼), 3자 나숭열(羅崇說)이 있었다. 나만치의 아들 나숭엽(羅崇燁)이 있었고, 나만서의 아들 나숭곤(羅崇坤)이 있었으며, 나만규의 아들 나숭대(羅崇垈)가 있었고, 나의조의 아들 나상탁(羅尙濯)이 있었다. 나숭대의 3자에는 1자 나경종(羅慶宗), 2자 나경흥(羅慶興), 3자 나경득(羅慶得, 7세)이 있었다. 나숭훈의 아들 나경원(羅慶遠)이 있었고, 나숭의의 아들 나경헌(羅慶憲)이 있었다. 이들 중 나두동, 나만적, 나만치, 나만서, 나만규, 나숭훈, 나숭의, 나숭열, 나숭엽, 나숭곤, 나숭대, 나경종, 나경흥, 나경득, 나경원, 나경헌 등이 무신 혁명 당시 연루된 피해자들이었다.
* 나위소 가문과 기축옥사(己丑獄事): 나위소의 조부 현감 나사침은 1589년 기축옥사에 연루되었고, 나위소의 아버지 3형제 나덕명(羅德明), 아버지 보은현감 나덕준, 사헌부감찰 나덕윤(羅德潤)도 역시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3형제는 유배가 풀린 후,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했다.
* 나위소 가문과 이인좌의 난: 1728년 이인좌의 난(무신정변)으로 직접 연루된 나위소의 증손 호남 제일의 갑부 나만치(羅晩致; 1679년~1728년) 집안과 난을 기획했던 문경 출신 영남 제일의 갑부 조세추(曺世樞; 1703년~1728년) 집안이 동시에 화를 입었다. 나만치가 처형당했고, 조세추 집안의 조상 묘역이 멸실되었다. 증손 나만치와 현손(5세손, 손자의 손자) 나숭대, 나숭곤 등이 1728년 영조 4년 이인좌의 난에 직접 연루되어 나위소 가문이 붕괴 위기를 맞았다. 나만치의 장인은 예산 출신 강릉부사 조기석(趙祺錫; 1643년~1695년)이었다. 나위소의 신도비문을 쓴 허목은 남인(南人)의 거두였다. 밀양부사∙경주부윤 나위소의 사위는 제천현감 정기수(鄭岐壽)였고, 이들은 모두 남인이었다. 나위소의 외손이자 사위 정기수의 아들 참봉 정중원의 차남 정희량(鄭希亮)이 1728년 이인좌의 난(무신혁명) 당시 경상도 괴수였다.
* 윤선도(尹善道)와의 교유 관계: 나위소는 당대 시인 윤선도, 기정진(奇正鎭), 정온(鄭蘊), 이진문(李振門; 1573년~1630년), 위백규(魏伯珪), 심계택(沈啟澤), 윤두서(尹斗緖), 김상직(金相稷), 정충신(鄭忠信), 정훈 등과 함께 호남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남인의 거두 윤선도와 같은 남인 계열이며, 나위소가 5년 선배로서 송암 나위소와 고산 윤선도는 서로 두터운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나주 나 씨와 해남 윤 씨의 대표적인 호남 갑부 집안이었으며, 1652년경 영산강 수운정 건립과 나위소의 낙향 시기에 나위소와 윤선도가 서로 끊임없이 서신을 주고받으며 직접 만나 회포를 풀기도 하면서 교유했다. 이 시기에 나위소의 「강호구가」와 윤선도의 「어부사시사」가 창작되었다. 두 사람의 서신 왕래는 윤선도의 막내아들 윤직미가 주로 담당했다고 알려져 있고, 윤선도의 아들 윤인미(尹仁美)가 송암에게 보낸 서신도 있다고 한다.
「강호구가」는 전원생활을 주제로 한 나위소의 강호가계∙어부가계 연시조이며, 「어부사시사」는 어부 생활을 주제로 한 윤선도의 어부가계 연시조이다. 두 작품에서 「강호구가」는 「어부사시사」와 창작 연도가 엇비슷한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나위소와 윤선도라는 호남의 대표적인 사대부 부호들의 연시조는 조선 시대 전기 연시조의 전통을 조선 시대 중기까지 전형적으로 이어갔으며, 사실상 조선 시대 사대부 문학의 절정기를 구가한 국문학의 시조 작품이다.
* 나주(羅州) 나(羅) 씨 세보(歷代譜)―1세~5세: 나주(羅州) 나(羅) 씨는 한국 고유의 성씨이다. 금성(錦城) 나(羅) 씨가 라말여초에 시작되었다면, 나주 나 씨는 여말선초에 시작되었다.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에 따르면, 나주 나 씨의 시조(始祖)는 나부(羅富)이며, 고려 시대 정의대부(正義大夫)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역임했다. 정의대부는 정3품이며, 감문위는 고려 6위의 제1위로서 상장군이 감문위 수장이다. 묘역은 1953년 봄 관향(貫鄕, 본관, 선향) 나주 송현동(松峴洞)에 시조묘를 설단(設壇)하고 매년 3월 13일 세일제(歲一祭)를 시행하고 있다. 1977년 가을 묘역을 보수했다. 2008년 시조묘 설단을 나주 보산동으로 이설했다.
1세(世)는 나득규(羅得虯)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2세는 나중윤(羅仲允)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3세는 나송기(羅松奇)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4세는 나수영(羅守永)이며, 고려 시대 진사(進士)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1세~4세의 묘역은 실전되었으며,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고,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5세 나위(羅位)는 고려 시대 호조전서를 제수받았으며, 세칭 금양처사라고 했고, 말년에 나주로 퇴거했다. 전서공파(典書公派)의 시조이며, 후에 2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계(羅桂)는 고려 시대 중서시랑을 역임했으며, 처는 창원 황 씨이고, 후손들은 경기도에 살았다. 시랑공파(侍郎公派)의 시조이며, 후에 4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석(羅碩)은 고려 시대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영동정(令同正) 금성군(錦城君)을 역임했고, 처는 남평(南平) 반(潘) 씨이며, 후손들은 전북에 살았다. 금양군파(錦陽君派)의 시조이며, 9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세(羅世)는 고려 시대 문과 한림 상원사 연안군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고, 전북에 후손들이 살았다. 연안군파(延安郡派)의 시조이며, 5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원(羅源)은 고려 시대 사온서직장 영동정을 역임했고, 묘역이 나주 송현동에 있으며, 후손들이 나주에서 세거했다. 직장공파(直長公派)의 시조이며, 27개 파로 분파했다. 나주 송현동 개발로 2008년 7세 묘역이 있는 나주 보산동으로 5세 묘역 일부가 이장되었다.
4세까지는 묘역이 실전된 실전 선조이며, 5세부터 묘역이 현존하는 현존 선조이다. 당시 나주 나 씨 선조들은 본관이나 관향을 표기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으나 조선 시대 전기 세종 1년 전북 김제 출신 나득강(羅得康, 1378년~1444년)이 과거 시험에 급제하면서 본관을 나주로 기재(나주인)함으로써, “최초의 나주인”이 탄생했다. 판서공 나득강은 세종의 신임을 받아 이조좌랑, 예조정랑, 의금부지사를 역임했고, 이조판서를 제수받았다. 이후부터 전남 나주(羅州)가 나주 나 씨의 관향으로 정착되었고, 조선 시대 후손들은 나주 또는 나주인이라고 출신지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판서공 나득강의 부친은 낙천와(樂天窩) 나중우(羅仲佑)이며, 고려 시대 후기에 예문관지제고, 춘추관편수관, 성균관교관 등을 역임했고, 조선 시대 태조 이성계로부터 우의정을 제수받았다. 나중우와 나득강은 전북 김제를 대표하는 유학자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와 대한민국 시대를 거치며 나주 나 씨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조선 시대 중기 사대부 시조 문학을 대표하며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초 「겸춘추일기일사」(兼春秋日記一事)를 기록한 호조정랑∙승정원좌승지 송암 나위소(羅緯素)는 또한 호남 제일의 부호였다. 전남 나주 출신으로 대대로 이어받은 나위소 가문의 재산은 후손 나만치(羅晩致)에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조선 시대 후기 전북 정읍 출신 백봉(白鳳) 나용균(羅容均, 1895년~1984년)은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정치학의 아버지이다. 일본 와세다대와 영국 런던대에서 정치학을 유학하고 독립운동을 거쳐 제헌의회와 대한민국국회에서 5선 의원을 역임했으며, 장면(張勉) 정부에서 보건사회부장관과 박정희 정부에서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나용균 가문은 전북 정읍 제일의 부호였으며, 일제 강점기 이후에 남은 재산이 삼천석꾼이었다. 대한민국 3개 정부에서 4선 국회의원과 재무부장관, 상공부장관, 경제 부총리, 통일 부총리 등 장관직 5회, 부총리직 3회를 역임한 나웅배(羅雄培)는 또한 서울대교수와 아주대총장 그리고 중앙대특임교수와 목원대초빙교수를 역임한 우리나라 정관학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또한 나웅배는 대전중학교와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경제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석사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경영대학원 경영학박사를 마친 경영학자로서 고도 성장기 한국 경영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나라 경영학의 아버지이다. 나웅배의 동생 나중배는 육군대장으로 예편했으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역임했고, 후에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한국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참고 자료: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
대표작
연시조 「강호구가」(江湖九歌) 시조 9수(어부가계 시조의 대표작)
저서
『송암유집』(松巖遺集)(시조 「강호구가」 9수와 한시 57수 수록)
저작
「겸춘추일기일사」(兼春秋日記一事)
「경자(庚子)년 간찰」
한시 57수(만시 23수 포함), 부(賦) 3편, 책(策) 1편, 서(書) 7편 등 <끝>
* 나종혁 출판예술문화 후원금을 모금합니다. 출판예술인 나종혁의 후원금은 금액에 관계없이 후원이 가능합니다. 후원금 계좌 국민은행 012-21-0653-488 (예금주 나종혁), 우체국 100073-02-217008 (예금주 나종혁). 많은 후원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