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玉山書院) 노거수
손진숙
옥산서원으로 가는 길은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벼가 익어가는 들판이 황금 휘장으로 휘감은 듯했다. 익을수록 고개 숙이는 현자(賢者)의 모습.
초입부터 각종 수목들이 경건하게 객을 맞아들였다. 나무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용틀임하는 모양새의 거대한 느티나무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거목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등허리에 손을 대보기도 했다.
밑둥치에 구멍이 여럿 나 있고 몸통 속은 아예 비었다. 서원을 지키는 초목도 면학에 힘쓰느라 내장이 닳고 녹았는가. 하지만 결코 가볍거나 허술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세월의 무게가 비우고 비운 저 안에 무수히 저장되어 있으리라. 기괴하면서도 신기한 고목에 경외심이 일었다. 팽나무, 벚나무, 산수유, 은행나무... 사이좋게 어울린 학우들 같았다.
입구에 걸린 ‘2020 세계유산축전 玉山書院 韓中國際學術大會’ 현수막. 유서 깊은 곳에 왔다는 자부심에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해 주었다.
옥산서원은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선조 5년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창건하였고, 그다음 해에 선조에게서 ‘옥산’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훼철하지 않아 회재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玉山書院’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보기 드문 해서체다. ‘역락문(亦樂門)’, ‘구인당(求仁堂)’, ‘무변루(無邊樓)’, ‘계정(溪亭)’은 석봉 한호의 글씨이며 처음에 나라에서 내린 ‘옥산서원’과 ‘독락당(獨樂堂)’은 아계 이산해의 글씨다. ‘세심대(洗心臺)’ 바위에 새겨진 글씨와 ‘옥산정사(玉山精舍)’는 조선 명종대의 대학자 퇴계 이황의 글씨라 한다. 퇴계와 아계, 추사, 석봉의 글씨 편액이 곳곳에 걸려 정기를 내뿜고 있다. 이 얼마나 화려한 글씨의 보고(寶庫)이며 소중한 문화유산인가.
강의실인 구인당 앞에 섰다. 유교의 핵심은 ‘인(仁)’이다. 인은 곧 ‘관계학’이 아닐까 싶다. 관계를 잘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학습과 수행이 필요할 것이다.
회재를 이야기할 때 ‘무잠계면 무회재 (無潛溪 無晦齋)’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서자(庶子) 로 태어난 잠계 이전인(李全仁)은 아버지가 평안도 강계로 유배 갈 때 동행하여 모시다가 임종하자 유품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왔다. 퇴계에게 부친의 학문을 알려 이황의 ‘나의 스승’이란 한마디로 큰 스승의 자리에 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경상도 관찰사 박계현에게 서찰을 보내 관료들이 회재의 무고함을 증언하여 신원(伸寃)되었다.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되짚어본다. 사람(人)이 둘(二) 이상일 경우의 도리와 예의에 대해서도 곱씹어본다.
구인당 건너편에 있는 ‘무변루’는 ‘끝이 닿은 데가 없음’을 뜻한다. 학문도 인격도 나이가 들수록 깊어간다는 의미라 한다. 나이가 들어도 깊어지지 못하는 초라하고 쓸쓸한 그림자를 끌고 무변루를 나섰다.
역락문 계단을 밟고 내려서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는 느낌이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이곳 읍내 여중에 다닐 때 해마다 봄, 가을 소풍 중 한 번은 이 옥산서원으로 왔다. 교통이 편리하지 않아 아마도 도보로 왔지 싶다. 사오십 년 전이라 기억조차 아련하다.
여중 2학년 때, 같은 반 숙희는 급우들 선망의 대상이었다. 얼굴이 예쁜 편은 아니었으나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그녀가 좋아서 주변을 맴돌며 웃고, 울고, 떠들고, 장난치고, 질투하고, 경쟁했다. 그해 가을소풍 때 역락문을 나와 계단을 밟다가 숙희가 뒤에서 두 팔로 내 어깨와 목을 감싸듯이 두르고 찍은 사진이 불현듯 생각났다. 서로 맞댄 등과 가슴에는 티 없이 순진한 우정이 흐르고, 앞을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반짝였다.
그제야 세심대(洗心臺)의 절경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돗자리를 층층이 깔아놓은 듯한 너럭바위들. 폭포수 아래 용소 어딘가에 선녀가 벗어놓은 옷자락이 감춰져 있을 것 같았다. 수려한 자연경관에 묻혀 학문에 전념한다면 아무리 심오한 난제인들 어찌 풀지 못했으랴.
자계천(紫溪川) 위에 가로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독락당으로 갈 수 있다. 예전에 불안하고 위태로웠던 것과 달리, 곧고 튼튼한 일자형 목재로 만들어졌다. 자계천을 내려다보니 파란 하늘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 있고 건들바람에 날아 앉는 단풍잎이 무지개 색깔의 엽서처럼 수면 위에 떠 있다.
독락당은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별장이라 한다. ‘어진 선비도 세속의 일을 잊고 자신의 도를 즐긴다.’라는 이름을 가진 독락당에서 조정으로 복귀할 때까지 학문을 닦고 자연을 벗 삼았다. ‘후손이 살고 있는 종택이므로 출입을 금지합니다.’라는 알림판이 있어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오래된 향나무와 조각자나무(천연기념물 제115호)가 독락당 내부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기와를 이은 담장 안 감나무 가지에는 주홍빛 감이 탐스럽게 열렸고, 담장 밖 벽에는 담쟁이덩굴이 오색 가을빛으로 물들었다. 주변에는 배롱나무, 주목나무, 측백나무, 사철나무, 맥문동, 쑥부쟁이... 정겨운 식물들이 구순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건물 옆으로 난 길로 들어섰다. 자계천과 연결된 계곡에서는 굴착기가 ‘경주 독락당 긴급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이 훼손되지나 않을는지 염려스러웠다. 계곡의 물은 어찌나 맑고 푸른지 파래를 풀어놓은 빛깔이었다.
독락당 담장에는 안에서 계곡을 볼 수 있도록 살창을 내었다. 산수(山水)와 절묘하게 통정하려는 지혜에 감탄이 절로 새어나왔다. 마루 한 면을 절벽에 걸쳐 놓고 계곡 쪽의 기둥들을 천연 암반 위에 세운 계정에는 인지헌(仁智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아래 두 짝의 창호문이 닫혀 있었다. 때때로 문을 열고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의 자태를 내다보았을 조선 선비의 모습이 문살에 비치는 듯했다.
인지헌 바로 앞 관어대(觀魚臺)에 학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자계옹(紫溪翁) 살아생전의 모습이 저 학과 같이 고고했으리라.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아쉬움을 간직한 채 돌아섰다. 돌아 나오는 길에 옥산서원 입구에서 용트림하는 노거수를 다시 우러러보았다. 노거수는 고결한 선비 정신을 되새기게 했다.
청랑하게 흐르는 자계천 물소리가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로 변해 자옥산(姿玉山)과 도덕산(道德山)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경주문학』 제66호|2020
[신라문화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