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 붐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여성서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런 흐름을 타고 나온〈스트릿 우먼 파이터〉〈술꾼 도시 여자들〉〈닥터 차정숙〉 등은 새로운 여성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멋지고 당당한 ‘언니들’은 현대물에만 있을까? 우리의 전통에서 이런 ‘언니들’을 찾아볼 수는 없을까?
장르문학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가려진 여성의 삶에 주목해 온 전혜진 작가는, 이 책에서 낡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쉬운 우리 신화와 고전 속 여성 영웅들을 재조명한다. 태초의 여성 신화 〈바리데기〉부터 ‘정상가족’에 도전한 《방한림전》까지, 다양한 우리 고전 속 여성 영웅들은 때론 시대의 제약을 뛰어넘어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때론 가부장제에 저항하며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간다. 이렇듯 멋진 ‘언니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은 다양한 여성서사에 갈증을 느끼는 독자들에게 낯익고도 새로운 여성서사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전혜진
만화와 웹툰, 추리와 스릴러, 사극, SF와 사회파 호러, 논픽션 등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여성의 삶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특히 논픽션 분야에서 가려진 여성의 서사에 주목하는 《여성, 귀신이 되다》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 여성 수학자 29명의 삶을 다룬 《우리가 수학을 사랑한 이유》 등을 썼다. 이 밖에 소설집 《바늘 끝에 사람이》, 장편소설 《280일》과 《아틀란티스 소녀》, 앤솔러지 《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 논픽션 《책숲 작은 집 창가에》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목차
서문-진짜 ‘나’를 찾아 나선 또 다른 영웅들의 계보
1. 바리, ‘여성 잔혹사’를 전복하다: 〈바리데기〉
‘타자화된 별종’을 넘어 운명의 주체로
지배자들도 숨기지 못한 여성 영웅의 원형
바리의 모험과 영웅의 여정
2. ‘버림받은 딸’을 영웅으로 만드는 세 어머니: 《숙향전》
가부장제에 굴복한 친어머니
보호하고 기르는 수양어머니
이끌어주는 여신 어머니
3. 아버지라는 숙명적 비극
‘자식 사랑’으로 포장된 무능: 《심청전》
사악한 계모보다 무서운 무관심한 아버지: 《장화홍련전》 《콩쥐팥쥐전》
아버지에겐 자식보다 가문이 더 중요했다
4. 결혼, 여성을 구속하는 족쇄가 되다
가부장제가 말살한 여성의 인격: 《사씨남정기》
하늘의 선녀라도 시부모의 인정 없이는: 《숙영낭자전》
며느리 되기를 강요당한 여성들의 조선판 SNS: 부요
틀을 깬 미혼모, 여신이 되다: 〈당금애기〉
5. 사랑으로 낡은 세계에 균열을 내다
운명에 도전한 궁녀의 사랑: 《운영전》
계급을 뛰어넘은 사랑의 혁명: 《춘향전》
6. 당나귀 가죽을 벗는 여성들
다시 태어난 소녀의 인생 2회차 모험: 《금방울전》
명예남성이길 거부한 여성 영웅: 《박씨전》
7. ‘유리 천장’을 뚫기 위해 남자가 된 여성들
가부장제의 혼란이 낳은 여성 영웅: 《홍계월전》
나라를 구했지만 가정은 벗어나지 못한 불완전한 혁명: 《이학사전》
혈연을 뛰어넘은 대안가족을 상상하다: 《방한림전》
책 속으로
당대의 사람들에게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를 꿈꾸게 했을, 신분과 성별을 비롯해 자신을 제약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고 시련을 견디며 자신의 진짜 모습들을 찾아가는 여성 인물들의 전통은, 어쩌면 읽고 쓰는 사람들의 눈과 손을 통해 계속 이어져, 지금의 여성 작가들과 여성 독자들이 쓰고 읽으며 만나는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또 다른 영웅들의 계보일지도 모른다고, 이 책에 언급한 옛이야기들을 다시 읽어나가다가 때때로 생각했다._9쪽
한때는 버림받은 딸들이었고, 자라서도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작게는 가문 크게는 국가라는 이름의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때로는 나라를 구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구하며, 때로는 다른 여성을 위험에서 구해내는 이들,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들이자 세계와 불화하는 자들이며 어머니이자 딸이고 자매들인 이들, 사회적 약자이자 타자이며 때로는 모험을 떠날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이들이 바로 옛이야기 속 여성 영웅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상처 입은 어린이나 버림받은 딸, 사회생활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계속되는 차별을 겪으며 소외되었던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한편, 이들의 영웅적인 여정에서 또 다른 용기를 얻는 것이다. …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거나 세상의 끝을 향해 모험을 떠나지 않아도, 이들의 도전과 반란은 타자화된 별종들의 이야기가 아닌, 그 자체로 또 다른 영웅의 이야기이자 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_26쪽
만약 《장화홍련전》에서 아들인 장쇠에게 더 많은 재산을 주기 위해 위의 두 딸을 핍박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이 계모 허씨가 아니라 배 좌수였다면 장화와 홍련은 원귀가 되어 돌아올 수조차 없었다. … 가족 안에서의 학대에 대해 피해자들이 합법적으로 원망하거나 복수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가족이지만 온전한 가족이 아니고 부모이지만 혈연이 아닌 돌출된 존재인 계모뿐이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현실에서 차별이나 학대를 받는 피해자들에게 공감을 사고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죄를 계모에게 부당하게 뒤집어씌운 채, 현실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학대를 못 본 척하기도 했다. 과거는 물론 현대에도, 《장화홍련전》이나 《콩쥐팥쥐전》을 읽는 현대의 독자들, 의붓어머니에게 주인공이 학대당하는 홈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주인공이 겪는 비극과 계모의 악행에만 집중할 뿐, 아버지의 묵인이나 무관심은 쉽게 지나친다._122~123쪽
결국 마지막에 사정옥은 유연수와 재회해 다시 유씨 집안의 부인이 되고, 아들인 인아와 재회하고, 시가와 친정 양쪽의 이름을 드높이지만, 그곳에 사정옥이라는 개인은 없다. 가부장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인인 사정옥의 모든 행동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유연수와 유씨 가문을 위해 맞추어져 있을 뿐, 자기 자신의 자아나 욕망은 아예 말살된 것처럼 보인다. 남성 사대부 작가가 당대의 정치를 비판하려고 썼던 이 소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가부장제가 부덕이라는 이름...
출판사 서평
여성으로 태어나는 순간 시작되는 ‘여성 잔혹사’
영웅의 ‘웅’이 수컷을 뜻하는 말이란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기존의 영웅 이야기는 “강철 같은 근육으로 뒤덮인 이상화된 남성”(20쪽)들의 활약으로 가득한 남성 중심의 서사다. 따라서 전형적인 영웅상에서 탈피한 ‘여성 영웅’의 이야기는 남성 영웅의 이야기와는 시작부터 다르다. “가족과 나라를 위해 외부의 적에 맞서 용감하게 나서는 것이 남성 영웅의 서사였다면 여성의 곤경은 여자로 태어나는 순간 가족 안에서 시작된다.”(여성학자 권김현영)
우리의 여성 주인공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게 되는 ‘여성 잔혹사’에 맞서 생존을 위한 분투를 벌이면서 영웅으로 거듭난다. 따라서 우리 고전 속 여성 영웅의 이야기는 단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특별한 능력을 갖춘 한 여성의 성공담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과 제약에 맞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들, 곧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 영웅들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걸림돌은 아버지라는 ‘숙명적 비극’이다. 여성 영웅의 아버지들은 대개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딸에게 큰 관심이 없기에 딸의 시련을 방관하고,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딸을 버리는 〈바리데기〉처럼 비극의 원인 제공자가 되기도 한다.
《장화홍련전》과 《콩쥐팥쥐전》은 사악한 계모가 전처소생의 딸을 구박하는 이야기로 우리에게 기억되지만, 사실 두 소설에서 딸에게 정말 위협적인 존재는 ‘사악한 계모’가 아니라 ‘무관심한 아버지’다. 소설 속 가부장들은 한정된 재산이나 집안의 기득권을 두고 계모와 전처소생의 딸 사이에 생긴 갈등을, 자신이 신경 쓸 필요 없는 ‘집안일’로만 여겨 방관했다. 두 아버지는 장화가 처녀의 몸으로 임신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누명을 쓰자 딸을 살해하는 것을 묵인하고, 팥쥐가 콩쥐를 살해하고 감사 부인 행세를 하느라 집에 없는데도 딸을 찾지 않는다. 이렇듯 딸의 고난에 무관심했던 아버지들, 그리고 아버지들의 무관심을 용인한 당대 사회가 딸들의 비극을 낳았다.
성장한 여성 주인공들은 이제 결혼이라는 또 다른 장애물을 만난다. 《숙영낭자전》의 주인공은 원래 하늘의 선녀로 지상에 귀양을 왔지만, 시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결혼을 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는다. 그녀는 결혼한 뒤 8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며느리로 인정받지 못해 별당에 머무르고, 여기서 비롯된 오해 때문에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누명을 쓰자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자결한다. 《숙영낭자전》은 “설령 하늘의 선녀라 해도 시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시집살이란 죽기만큼 힘든 것”(161쪽)이라는 당대 여성들의 수난을 보여준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어도 조선의 며느리들이 마주친 현실은 대개 가혹했다. 고단한 시집살이를 소재로 한 부요(부녀자들이 부른 민요)를 보면, 시부모와 시누이를 모시느라 “아홉 솥에 불을 때고 열두 방에 자리 걷”(〈시집살이 노래〉, 경북 경산 지방)는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격려는커녕 사소한 실수 하나에도 불호령...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