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문화산책은 백제고도 공주
출발 2025.09.20.토.07시 시청앞
일정 09시 석장리 구석기 박물관-무녕왕릉-우금치고개-점심-공산성
1.무녕왕릉!!!
갈 때마다 새롭다. 자주 보아도 물리지 않는다. 볼 때마다 설렌다. 충남 공주시 송산리에 있는 백제 제25대 왕인 무녕왕(武寧王, 462~523)릉 얘기다. 무녕왕은 일본 규슈 가카라시마(加唐島)의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해변에 정박 중이던 배 안에서 태어났다는 얘기도 있다. 그는 백제의 동성왕(東城王, ?~501)에 이어 왕위에 오른 뒤 23년 동안 재위하며 백제 부흥의 기반을 닦은 뒤, 아들인 성왕(聖王, ?~554)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무녕왕릉은 1971년에 우연히 발견됐다. 송산리 6호 왕릉의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에, 무덤이 통째로 지하에 있던 왕릉이 발견됐다. 일제에 의해 도굴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있는 채로 발굴된 유일한 백제왕릉이다. 무덤 안에는 무덤의 주인이 ‘백제 사마왕(斯麻王)’임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묘지석(墓誌石)이 있었다. 이 묘지석은 국보 제163호로 지정됐다. 묘지석 외에 무덤을 지키는 석수(石獸)와 무녕왕의 금제관식 등 모두 12개가 국보가 됐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었습니다
천 사백 사십 육 년이나 땅 속 깊이 묻혀 있다가
천 구백 칠십 일 년에 우연히 곡괭이 끝에 걸린 것은
이제 때가 됐으니 세상에 나가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낮은 봉분이 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공주 송산리 여섯 번 째 왕릉 뒤 조그마한 무덤은 아예 왕릉이라는 상상마저 지웠습니다
덩치가 커 일제의 눈에 띄었더라면 무녕왕은 없어졌을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무녕왕이 후세를 위해 남긴 기록은 단군처럼 그날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귀여운 석수(石獸)가 무녕왕의 마음을 밝게 알아
천 사백 사십 육 년 동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두 귀 활짝 열어
무덤의 비밀을 굳게 지켰습니다
키가 팔척이요 눈썹이 그림 같아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던
무녕왕 사마(斯摩)는
죽어서 들어갈 땅을 무단 점거하지 않고 땅값을 후하게 치러
지신도 감동해 그를 따듯하게 보호했습니다
나날이 쪼그라들고 다달이 잊혀 가는
백제가 더 이상 초라해져서는 안될 때
무녕왕은 배수로로 신호를 보내
어둠에서 밝음으로 멋지게 부활했습니다
- 홍찬선, <무녕왕릉> 전문.
무녕왕릉은 발굴 초기에는 발굴 초기부터 상당 기간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하지만 보존을 위해 개방을 하지 않는 대신 왕릉 앞에 무덤모형과 함께 무녕왕릉에서 발굴된 유물 등을 소개하는 기념관을 만들었다. 기념관 입구에 멋진 금송(金松)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금송은 중생대부터 전 세계에서 자랐지만 모두 멸종하고 지금은 일본에 단 1종만 남아 살아있는 화석으로 알려진 소나무다. 금송이 여기에 심어진 이유는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무녕왕의 관이 바로 금송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무녕왕의 관이 금송으로 만들어진 것은 무녕왕 당시 백제와 일본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2.공주 석장리 구석기박물관
석장리 박물관은 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구석기 유물 박물관이다. 공주 지역의 구석기 문화의 역사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이를 발전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2006년 9월에 개관했다. 석장리 박물관은 석장리 출토 유물의 전시와 구석기 문화에 대한 각종 교육과 학술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선사 문화 체험 등 학생들이 고대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실시하고 있다. 선사시대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관, 선사공원,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 체험 공간 등을 갖추고 있다. 전시관은 건축가 이응묵의 작품으로, 외부에는 석기 떼는 구석기인 동상과 석장리 출토 대표석기 5점의 모형, 사냥하는 구석기인 동상과 반구대 암각화 모형, 그리고 석장리를 상징하는 주먹도끼모형이 있다. 내부는 구석기에서 청동기에 이르는 선사문화를 자연, 인류, 생활, 문화, 발굴이라는 5가지 테마로 전시연출한 상설전시와 일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특별 전시 될 기획전시, 영상실, 각종 정보검색과 쉴 수 있는 편의시설인 휴게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3.동학혁명과 우금치고개
1894년에 전봉준과 손병희가 지휘하는 동학농민군이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조선 관군-일본 연합군과 벌인 전투로, 동학군이 참패함으로써 동학 농민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우금치전투는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이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치른 전투이다. 삼례에서 제2차 기포한 전봉준 등 남접과 보은에 집결한 손병희 등 북접이 협력하여, 충청감영 소재지이며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공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부여와 논산 방면에서 협공한다는 작전 계획을 세우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죽창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우세한 화력을 가진 관군과 일본군의 견고한 수비를 돌파하지 못하고 참패하였다. 제2차 동학농민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4.공산성
공주 공산성은 충남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백제 웅진기의 왕성(王城)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 불렀다. 성벽은 현재 동벽 일부가 토성이고 나머지는 석성으로 되어 있는데, 그에 따라 백제 때에는 토성으로 축조하였다가 조선시대 때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웅진기에는 왕성이고, 사비기에는 북방성(北方城)이었으며, 통일신라 때는 웅천주(熊川州)의 치소성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충청 감영(監營)이 충주에서 공주로 옮겨질 때 감영이 성내에 있었고, 인조 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