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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나라의 군주였던 인조는 1636년 음력 12월14일 서울 도성을 버렸다. 그는 한밤중에 송파나루를 건넜다. 그리고 강을
건너 새벽 남문을 통해 성안으로 오르기 위하여 험한 산기슭에 달라 붙었다. 추위와 눈길에 의관을 갖춘 오름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나무꾼 민초, 서흔남이란 총각은 나막신을 거꾸로 신고 왕을 등에 업고 성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왕은 소원을 묻고 곤룡포를 하사하여 고마움을 표시한다.인조반정으로 인조, 그리고 그를 군주로 세운 서인 정권의
실속없는 명분에 휘쌓여 맞게된 병자호란, 그것은 이미 한양도성에 얽힌 풍수지리학적으로 예견된 당파의 결과물이였다.
명조 때의 유명한 풍수지리가 남사고(南師古)는 산의 글자를 풀어 혁명과 당쟁을 예견했었다. 서울의 동쪽에는
낙산(駱山)이 있고 서쪽에는 안산(鞍山)이 있으니 이것은 말과 그 말안장이 같이 있지 않고 서로 대치되어 있는 형극이다.
이로 인해 조정의 신하(임금이 타는 말로 비유함)들이 당파를 지어 동,서로 나뉘는데, 낙(駱)자는 각마가 되므로
동인(東人)은 갈라지고 안(鞍)자는 혁안(革安)이 되므로 서인(西人)은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는다
하였다. 틀림없는 결과 였다. 세자와 신료들도 칼바람을 맞으며 성안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45일간의 사투가
벌어진다. 청나라 20만군은 삼전(三田)에 진을 치고 인조의 숨통을 조였다. 음력 1월22일 강화성이 함락되어 그곳으로
피신했던 왕자들과 빈궁 그리고 수많은 민초들의 죽어 나갔다. 그리고 승전문이라 이름 짓고 승전을 독려하던 북문에서
결사대 200명이 승전을 갈구하며 나섰지만 몰살 당한다. 그리고 군졸들과 장수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인조의 수라상도 극한까지 몰렸다. 한풀 기가 꺽인 인조는 결국 의관을 차려 입고 왕자를 앞세운 후 서문밖으로 나섰다.
낙루는 금새 얼어 붙었다. 아홉번의 머리를 땅에 짖찍고 왕자와 화친을 반대한 신료와 수많은 재물과 백성들을 내주고
그제서야 용서 받고 도성 창경궁으로 다시 돌아 왔다.
고려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함께 홍건적 난을 피해 머물었고, 인조가 피눈물을 흘리며 기거했던 성, 남한산성 그 산성안에
천주를 섬긴다는 이유하나로 참수와, 교수와, 곤장사, 옥사, 백지사를 통하여 죽어나간 순교자 숫자는 무려 300 여명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무명순교자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의 피와 땀으로 십자가의 신비를 드러내신 하느님의 영광의 은총을
겸허하게 바라보고 찬미를 받치고자 야고바 형제,자매들은 길을 나선 것이다. 성으로 가는 길은 하늘이 파랗고 숲은
메말랐다. 그리고 날이 선 기온은 차갑고 매서웠다. 그러나 숲길을 걷는 다는 것은 자연에 자신을 물들이는 것이며
그 걷는 길이 성지와 연결된 길이라면 순례자의 마음은 너그러운 성심으로 물이 들게 된다.
우라나라의 산천의 특색은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東高西低 형이다. 그래 강물은 대부분 강의 원류를 지니고 있는
강원도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른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그런 균형을 깨는 산세를 지니고 있다. 오히려 서쪽이 가파르고
험한 반면 동쪽은 물 길 따라 길이 열려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산성안에서 순교자들의 삶터는 여주, 이천, 광주, 용인, 양주
로서 그곳에서 잡혀 동문으로 살아 들어 온 후 죽어 동문 옆 시구문으로 나간 것이다.
인조가 내려 선 서문밖 길은 가파르고 험하다. 그리고 길이 오랜 세월 물길에 휘쌓여 평탄함이 죽어 있어 걷기 불편하다.
겨울 능선의 바람은 메몰차다. 특히 입춘 무렵 능선 길은 걷는 사람의 체온을 빠르게 빼앗아 간다. 서쪽으로 난 양지바른
계곡 길은 바람이 들지 않고 빛이 들어 눈과 어름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거리는 조금 더 긴편이지만 이런날 계곡길을
걷는 것은 초봄의 빛을 등 뒤로 받으며 걷는 호사를 누릴 수 있어 좋다. 사월에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개나리 꽃이 좋은
산할아버지 길을 선택한 이유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위한 선택이었다. 물맛이 기가막힌 약수로 목을 축인 후 공터에 몰려
섰다. 시작기도를 하기 위함이다.
성지순례 출발기도.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걸어 가신 고통의 길!
순교자들이 생명을 내어 놓고 걸어가신 신앙의 길! 우리가 매일 겪어야 하는 고통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으로나 행동으로나 믿음의 증거자로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적은 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승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내줌으로써, 영원한 삶을 우리에게 주셨고
순교선열들은 바로 이 그리스도 때문에 또 그분을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과
그분을 맞바꾼 신앙의 씨앗을 이 땅에 심어 놓았습니다.
주님! 이 엄청난 신앙의 유산을 이어 받은 우리가 현대에 맞는 순교정신으로 믿음의 증인 역활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의 빛으로 이끌어 주옵소서.
순례자들의 시작기도란? 기도문을 정성 되이 여럿이 소리 내어 외우는 것으로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인격적
만남이며 대화로서 자신의 정신, 마음, 몸을 하느님께 향하며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고 생활을 통해서 응답하는 약속의
행위입니다. 그 약속을 하기 전 우린 스스로 고요한 마음을 부르고 하느님에 대한 항구한 신뢰와 믿음의 마음에 문을
열어야 합니다. 또한 프란치스칸으로서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는 시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야고바형제,자매님들은
늘 이런 마음으로 시작기도에 임하고 있습니다.
한 마음과 정신으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며 오늘 자연 속에서 순교선조들을 알현하고 그 뜻을 새기며 성심의 마음을
넓고 깊게 자신에게 자리 잡게 한 후 밝은 모습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 가겠다는 생각과 기도는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바람도 없는 양지바른 계곡길 안부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소리는 분명 서문 옹성을 넘어 순교터로 메아리침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기도를 끝낸 야고바 순례꾼들(이젠 꾼의 경지에 도달된 듯한 느낌을 받아, 꾼으로 부르겠습니다.)은 서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등산력이 상당하신 형제님께서 쉬엄 쉬엄 발걸음을 옮기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의 진리을 얻습니다.
그것은 바로 걷지 않는 자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입니다. 내가 꼭 가고자 하는 곳이 있다면 걷지 않고는 그곳에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보폭을 함께하고 싶어 형제님 뒤에 서면 늘 한결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가세요 천천히 따라
갈께요. 오늘도 중간 오르막길에 들어서자 등 짐에서 떡을 꺼내 나누어 주시며 호홉을 고르시고 나눔을 실천하십니다.
오르는 산길에서 잠시 쉼은 앞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입니다. 가끔 힘들다 싶을 때 등을 돌려 오던 길을 살피시고 산아래
정경을 조망하시면 자신의 대견함에 놀라시고 앞으로 향하겠다는 의지가 바로 서게됩니다. 한 걸음의 소중함이 바로
목표에 도달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마지막 안부입니다. 이 길을 올라서서 좌측으로 붙으면 남한산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산성의 총길이는 11.7km이며
본성 9km, 외성 2.7km를 합한 길이입니다. 총면적은 598,195 평방미터으로서 동서남북 4대문과 5개의 옹성 그리고 16개의
암문과 장수 지휘소였던 장대가 넷이 있었으나 지금은 수어장대 하나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형에 따라 성의 높이는
7m - 7.5m 로 축성되어 있습니다. 인조때 광주유수 이서는 축성공사 책임자로 이회와 승려 벽암(김각성)에게
공사를 맡깁니다. 벽암은 당시 9개의 사찰에서 거주하던 승군들의 도움으로 예정시간에 완성할 수 있었으나 이회는 부족한
축성자금으로 완성기일이 늦어져 갔습니다. 이를 시기한 주변에서 무고하여 (사리사욕을 탐하고주색에 빠져 공사를 게을리
한다는) 서장대에서 참수를 받지만 훗날 죄가 없음이 밝혀저 청량당을 세워 영혼을 위로하였습니다. 청량당으로 인해 산
이름도 청량산이란 이름을 얻게 됩니다.
늘 한결 같음으로 형제회를 이끌고 계시는 이국희 모니카 큰봉사자 이십니다. 얼마전 전주 모악산을 다녀 오셨다는....
여독이 남아 있는 중에도 나오셨습니다. 책임은 늘 자신을 솔선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나봅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그 마음에서 샷다가 움직였습니다.
이어서 성가대 좌장 성인신 모니카, 그리고 늘 함께해 주시는 김연옥 골롬바 자매님이십니다. 부군이신 김성곤 요셉
형제님은 마지막으로 올라 오시는 형제님을 마중하시느냐 아직 등정 중 이십니다.
저 멀리 성곽을 끼고 서문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앞서 오르신 야고바형제, 자매님들이십니다. 역사의 현장에 서서
그 길을 걷다 보면 문득 많은 연민이 생기고 당시에 상황을 반추해 보면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스스로
남한산성을 찾아 들므로서 고립을 자초한 인조와 그 신료들, 서로 각의 대립을 세우며 조정을 시끄럽게 합니다. 성(城)은
보호라는 측면이 있지만 외부와의 지독한 단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드 넓은 강토를 오랑케들에게 내어주고 고작 11.7km
옹성안에 갇힌 군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지독한 추위와 아사 직전의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사병들과 민초들은
암문을 통해 군열과 섬김의 자리를 박차고 달아납니다. 남한산성의 긴 외곽 길을 걷다 보면 당시에 처한 극한적 환경이
사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마천역을 출발하여 남한산 서쪽 산할아버지 길을 지나 계곡안부 길 따라 걸은지 1시간40분 만에 마지막 언덕을
오르시는 오상걸 도미니코 , 김성곤 요셉 형제님이십니다. 오상걸 형제님께서는 수고 많으셨습니다. 함께해 주신 덕분에
늘 트레킹은 중심을 잡습니다. 또한 식사중 들려 주신 재담에 귀가 솔깃 했습니다. 년령을 초월하여 모여 자연으로 침잠
되어가는 하루살림, 참으로 유익하고 즐겁습니다. 숲처럼 아름다운 어울림을 야고바 트레킹을 통하여 우린 아름다운 형제애를
만들어 가는 꿈을 이루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늘 그날이 다가 오면 설레는 마음으로 참가하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익숙함은 서로를 편안하게 하는 언로와 행로가 함께 존재합니다. 함께 모두 다 라는 뜻은 뭔지 모르는 힘을 실어줍니다.
그리고 자연속에서 틈틈히 마음에 새기는 의(義)로움은 진리로 세를 넓혀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 올 것입니다.
이 문이 바로 서문입니다. 일국의 왕이 나서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문입니다. 그 앞에 성이란 자를 붙여 사용하기엔
부끄러움이 묻어 나는 크기 입니다. 오히려 암문이란 표현이 제격을 찾는 것 같습니다. 항복하기 위하여 서문을 나서는
인조의 마음은 어때을까? 고심해 봅니다. 저 멀리 산아래 펼쳐진 청국의 오색창연한 진영을 보는 순간 인조는 미간을 찌푸리며
분명 탄식을 했을 것입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인조는 살아서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오신 자매님들 끼리 성문 안 양지바른 쪽에 앉아 해바라기 중이십니다. 빛이 좋으면 마음도 밝아지는 것은 인간의
심성입니다. 이를 간파하신 성프란치스코께서는 어느 수도원으로부터 작은 초막같은 작은 집 하나를 선물받으십니다.
그 집은 당시 수도원의 유행대로 밖으로 난 창문이 없는 폐쇄된 공간이였습니다. 물고기 한광주리를 사용료로 정하신 후
사부님은 제일 먼저 창문을 열어 자연과 교감의 길을 여십니다. 인간의 존재란 창조적인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자연의 종이란 인식이 없으면 불가능했던 일이였습니다. 자연과 의 교감 그것은 바로 인간을 자연의 지위임을 확인하는
일 입니다. 만물일체와 천지동근이란 각별한 신앙적 지성이 바로 사부님의 본체이신 것입니다. 그 뜻은 태양의 찬가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포르치운 쿨라에 있는 성당안의 작은 성당 집에서 그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밝은 빛이 넘치는 성문 안, 양지바른 곳에서 각자 지니고 온 간식과 차 등등을 나누 시간, 각별한 작은 행복들이 담겨 있는
시간입니다. 떡과 과자와 빵 그리고 대추차와 커피, 한 점 또는 두 점, 그리고 들이키는 찻물을 통하여 나눔과 소통이야
말로 형제적 소통이라 생각됩니다. 당시 나눔을 생각하며 서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올립니다. 나눔끝에 서문 앞 계단에
서서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북문으로 가 하남시 고골로 연결된 북문 길을 살펴 보고 북문에 대한 의미를 되짚어
보았습니다. 예로부터 성을 쌓고 동서남북으로 대문을 엽니다. 그 때 북은 겨울로 음기인 물로 보고 남쪽은 여름으로 보고
불로 보았습니다. 음기가 서린 북문은 항상 닫아 두었습니다. 북문이 열리면 음기가 들어와 성내 풍기가 문란해 진다는
뜻이 있어 잠궈 두는 것입니다. 다만 가뭄이 들면 화기를 죽이기 위하여 남문을 닫아 걸고 대신 음기가 서린 북문을 열어
가뭄을 물리치려 했습니다. 그래 가뭄때 빼고는 항상 닫혀 있는 것이 바로 북문이였습니다.
북문을 지나 종로통을 지나 당시 관청과 옥사가 있던 주차장을 거쳐 순교현양탑에 섰습니다. 그리고 기도문을 꺼내 기도를
드릴 채비를 차렸습니다.
남한산성 내 성지는 수원교구에서 관리하는 성지입니다. 수원교구에서는 하느님의 종 들을 위한 시복시성을 위해
기도서를 만들었습니다. 기도서를 만들면서 교구장이신 이용훈 주교께서는 그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셨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오묘한 섭리로 우리민족에게 신앙의 선물을 주시어 하느님을 맛들이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도록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 주님의 진리를 스스로 찾아 탐구하고 몸소 실천하여
모든 이의 모범이 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고 장렬한 죽음으로 받아들인 진리를 수호하며 증거하도록
하셨습니다. 자랑스런 신앙선조들에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의 영광 안에 천상 잔치를 차지하며 기쁨의 시간을 보내실 순교성인들을 생각하면 한없는 기쁨이
저절로 나옵니다. 이에 우리 모두가 천상 잔치에 참여해 기쁨을 누리고 계신 순교성인들과 함께 히느님을 찬미하고, 현재와
미래의 우리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의 기쁨이며 특권이 아닌가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신앙을 전수해 주신 창립선조들과 탁월한 덕행과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던 분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는
우리의 자랑인 동시에 의무라 여겨집니다. 수원교구 설정 50주년을 앞둔 이 시점에, 이 작은 기도문을 통하여 교우 모두가
천주의 신앙인으로서 거듭 태어나 , 주님께 영광을,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작은자 되시기를 바라며 강복합니다.
2012년 01월 01일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
~~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작은자 ~ 이 말이 강하게 다가옵니다.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작은자는 바로 성프란치스코 성인이시며
그 본양을 받아 뒤 따르는 프란치스칸, 즉 우리 자신들입니다. ~~ 자유롭게 세상안에서 평화를 전하는 작은자들의 몫을 지닌
우리들에게 소중한 것은 가난, 겸손, 단순입니다. 야고바 트레킹 제호 아래 주제를 적어 본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처럼 자유롭게 세상안에서 평화를 전하려는 작은자들의 걸음 걸음.....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훈련도감과 광주부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박해가 있을 때 광주, 양주, 용인,이천
여주 지역에서 잡혀 온 선조들은 이곳에서 참수, 교수, 장살, 옥사, 백지사 등등의 방법으로 순교하게 된 것이다.
1791년경 부터 산성내 옥에 갇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유박해(1801년)에서 병인박해(1866년) 까지 300여명의 순교자가
발생된 곳이 바로 남한산성 성지이다. 고문이 자행되던 포도군관청 터(현재 주차장으로 사용됨) 와 배교의 요청으로 매질을
당하던 연무관과 제승헌이 남아 있으며 잡혀 들어 왔던 길과 동문 그리고 순교후 버려졌던 성곽 아래 시구문이 보존되어
있다. 한덕운 토마스는 1841년 동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으며 성 김성우 안토니오 동생 김덕심 아우쿠스티노는 1841년 남한산성
옥에 갇혀 옥사를 한다. 1866년 이천 단내출신 정은 바오르는 종손자 정베들로와 함께 백지사를(얼굴에 창호지를 덮고 물을
뿌리고 다시 창호지를 발라 숨통을 끊는 방법) 당한다. 이어서 1868년에는 성 김성우 안토니오 가족들은 박해로 동생 김윤심,
아들 김성희, 순교자 김덕심의 아들 김차희, 김윤심의 아들 김경희와 그의 육촌 김윤희까지 이곳에서 순교를 당하며 성인과
같은 마을인 구산마을 신자 최지현, 심칠여 아우구스티노도 순교반열에 끼워다. 동문밖에는 남한산성 비석거리가 있는데
그 뒤가 바로 한덕운 토마스가 참수당한 곳이다.광주 출신 심아기 바르바라도 18세의 나이로 장살에 의해 옥사하였다. 그는
평소 신자로서 본분을 다했으며 평생 동정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어린나이에 순교를 하게 된 것이다.
성지현양 성전에는 103위 성인인 김성우 안토니오,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습니다.
성 김성우 안토니오는-
1794년 정조 18년 경기도 광주 구산 부농 출신으로 모방신부 입국 후 자신의 집에 경당을 설치한 후 한여름 내내 모셔
미사를 드리게 하였으며 고향마을에 교우촌을 형성하였으나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남한산성 옥사에 갇힌 후 형조로
이관된다. 계속되는 신문과 형벌, 그리고 배교 독촉에도 불구하고 ‘나는 천주교인이요, 또 천주교인으로 죽고자 합니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47세 나이로 1814년 4월29일 당고개에서 순교 후 가족들에 의해 광주구산에 묻힌다.
그곳이 바로 구산성지다. 가족들은 대부분 이곳 산성에서 순교한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이자 이성례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유명한 분이신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수리산 교우촌 회장인 평신도로서 기해박해에서 평신도 순교자로서 대표성을 지니신 순교자이시다
순교일은 1839년 9월12일 34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추위에 떨던 몸이 따듯한 온돌 열기로 녹아 내렸다. 각자 제대를 향해 모여 앉아 참회를 통한 신심을 새롭게 세우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찬미하고 순교선조들의 얼을 모듬는 개별적인 기도의 시간을 갖었다. 침묵의 많은 시간이 흐르고 누군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 나는 순간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어느 자매님의 낮으막한 소리가 들린다. 너무 따듯해
일어나고 싶지 않네~~ 그 말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순교선조들에게서 느껴지는 사랑의 온기임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
되었다. 따뜻한 사랑~~~ 진리안에서 만 가능한 사랑이다. 왜!! 그들은 지독한 사랑에 메달린 것일까? 자신을 송두리채
믿음에 던져버리고 그토록 지고지순한 사랑을 했을까 하는 답을 준비한 기도문에서 찾았다.
자비로우신 천주여,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우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의 유적지를 찾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가문 좋고 명성 높고 부유한 사람들이, 하루하루 건강하게 잘 살던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고 매질 당하고,
죽음을 당했던 성지를 찾아가는 우리들이지만 관광의 목적인냥 흩으러지고 어긋난 자세로 임하지 않토록
이끌어 주소서.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얻어진 순교자의 정신을 우리 마음에, 생활 속에 간직하고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순교선조들은 분명 천주의 은총으로 순교의 길을 두려움 없이
간 것이다. 은총으로 얻어진 순교, 그리고 그 은총을 현대를 살아 가는 우리들은 그 맥을 어떻게 이을 것인가 고심하기
위한 노력의 일한으로 순례자가 되어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순교 선조들을 벌하고 처형했던 왕조는 이 세상에서
이미 자취가 사라진지 오래다. 과연 무엇이 진리였던가 하는 사실은 명백한 것이다. 이 깨달음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성당옆 쪽문을 나섰다. 그리고 남한산 숲을 감싸고 있는 소나무 숲을 보았다. 그 푸르름이 바로 천주의 진리였다.
선조들은 이미 당시에 그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천주여 그 선조들에게 영원한 영광의 은총을 베푸소서.....
오늘같은 강추위 속 몸을 달래주는 방법은 국물이 있는 점심이 제격이라는 김성곤 요셉형제님의 의견과 세베리노 의견이
일치되어 두부전골에 미혹되어 두부집을 찾았다. 산성 안에는 유명한 두부집 두곳이 있다. 오복집과 산성 두부집이 바로
그 집이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산성 집은 국물이 좀 더 맛깔 스럽고 오복집은 두부자체가 참 고소한 향취가 묻어 난다.
추위에는 국물이란 등식이 성립되어 산성집을 찾았지만 만원사례 4자리 뿐이다. 우리 일행은 훗날 프란치스칸이 될 아이
포함하여 17명으로 어림없는 숫자다. 다시 오복집으로 직행 이 집 또한 문간방 하나가 남아 있었는데... 주인은 태이블이 3개
이므로 4*3= 12명 자리라 불가하단다. 밀고 땡기다. 기름짜듯 틈 없이 앉아 먹기로 했다. 과연 방안은 입추의 여지가 없는
형극이다. nap - sack 들은 카운더 의자에 올려 놓고 입장하였기에 망정이지...... 형제들은 머슴들이(?) 앉아 먹는 ㅋㅋㅋ
문간 바로 앞에 좌정하고 (아래 사진 참조) 메뉴를 중심으로 살피다. 주문에 달인 황영진 세레자 요한 형제님께서 주문을
완수하였다.
막간을 이용하여 야고바 트레킹 총무이신 장은기 데레사 자매님께서 회비와 관련된 건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 주셨다.
늘 흑자이다. 회비명목으로 일만원씩 각출되어 그 비용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잔여금은 훗날 원거리 출행 시 차량 임대료로
사용하려고 한다.
주문의 덧에 걸리신 황영진 세례자 요한 형제님 덕분에 좋은 식사, 안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사 후 걸어서 기념관과
동문 시구문을 견학하고 관청과 옥사가 있던 터에서 출발하는 성남방향 버스를 타고 일진은 떠났다. 손을 들어 배웅한 후
잔여 야고바형제 자매들은 등산화 수리에 메달렸다. 오늘처음 나오신 최정숙 스테파니아 자매님 등산화가 벼란간 말썽을
일으킨 것이다. 등산화 창의 이탈로 콰이강의 다리 신발로 변신한 것이다. 나는 압박붕대로 묶어 주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노련하신 야고바 형제회 멕가이버 김성곤 요셉형제님께서는 철사를 어느새 준비하시고 스위스 멕가이버 칼을 꺼내 능숙한
솜씨로 꿔메셨다. 솜씨가 외과의 못지 않는 능숙한 솜씨셨다. 철사봉합 수술로 말끔하게 변신한 등산화, 집까지의 무사한 귀가는
당연함이었을태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산성역까지 내려 온 잔여 일행은 구두수선 기념으로 갈매기 살을 놓고 몇잔의 술을
더 추렴한 후 헤어졌다. 오늘도 행복한 기운을 안고 하는 귀가 길, 별이 총총했다. 강 추위에도 아무렇지 않게 참석해 주신
야고바 형제, 자매님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특히 등산화 수리로 당사자는 물론 주변 목격 형제들에게 기쁨을 주신
김성곤 요셉형제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야고바형제회 트레커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3월 팔당역에서 만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