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1 정진(精進) 바라밀(波羅蜜)
정진(精進) 바라밀(波羅蜜)의 학습(學習)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정진(精進)의 자성(自性), 정진(精進) 수행(修行)에 들어가는 방법, 정진(精進)의 구별(區別), 정진(精進)하여 수행(修行)할 때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총괄(總括)이다.
정진(精進)으로 얻어지는 이익은 매우 크다. 행하지 않는 허물을 많이 사유(思惟)하는 것이 습관(習慣)이 되면 정진(精進)을 일깨울 수 있게 된다. 정진(精進)하지 않으면, 게으름의 함정에 빠져서 모든 정법(正法)이 손감(損減)되어 필경(畢竟)에 장부(丈夫)의 큰 뜻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정진(精進)은 두 가지로 나뉜다. 정진(精進)의 구별(區別)과 정진(精進)을 일깨우는 방편(方便)이다.
보살(菩薩)은 정진(精進)으로 수승한 이해와 신심(信心)을 견고(堅固)하게 일으켜야 한다. 선법(善法)을 모으는 정진(精進)은 청정(淸淨)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수행(修行)하기 위하여 가행(加行)하여 닦는 것이다. 중생(衆生)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한 정진(精進)이란 이치에 따라 바르게 가행정진(加行精進)하는 것이다.
정진(精進)을 일으키는 방편(方便)이란, 정진(精進)의 장애(障碍)와 역연(逆緣)을 없애는 것, 순연(順緣)의 자량(資糧)을 쌓는 것, 이 두 가지의 인연(因緣)에 의거(依據)하여 정진(精進)하는 것, 이를 감당(勘當)해 나가는 도리이다.
정진(精進)의 장애(障碍)와 역연(逆緣)을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역연(逆緣)을 알아내는 것과 그 역연(逆緣)을 막는 수행(修行)의 방편(方便)이다. 도(道)를 닦음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부류(部類)가 있다. 수행할 수 있지만 들어가지 못하는 부류와, 수행하기 전에 지래 겁을 먹고, 들어가지 못하는 부류이다.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아직 시간(時間)이 아직 남아 있겠지 생각하고 여유있다고 생각하여 미루는 경우가 있고, 하찮은 일이나 일상적(日常的)인 일의 집착(執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미루는 생각을 끊기 위하여, 이 몸이란 급히 무너져 언제 갑자기 죽을지 모르고, 죽은 뒤로는 악취(惡趣)에 떨어지고, 사람의 몸은 다시 얻기 어렵다는 세 가지의 도리를 깊히 사유(思惟)하여, 한가(閑暇)하지 않는 마음의 상속(相續)을 일으켜야 한다.
수행하기 전에 미리 겁을 먹고 들어가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은 내가 지금 사람의 몸을 받고 바로 수행을 시작하지 않는 다면, 어떻게 대승(大乘)을 성취(成就)할 수 있겠는가 하는 굳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약한 마음은 발심(發心)을 포기(抛棄)하는 큰 허물이 된다.
세존께서는 진실한 바른 말씀으로 조그만 벌이나 나비들 조차 깨달음을 증득(證得)할 수 있다고 설하셨음을 사유하여야 한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으로 태어나서 지혜(智慧)의 힘으로 정진(精進)을 버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하고 스스로 격려(激勵)와 용기를 북돋워 나가야 한다.
모든 과거불(過去佛)과 지금 부처로 머무는 분들과 장차 오실 미래불(未來佛)로 성불(成佛)하실 분들도, 단 한 번만에 성불(成佛)하신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범부였지만, 점차로 높이 수행하여 성불을 이루셨으니, 나 또한 마땅히 성불하리라 생각하고 나약한 마음을 물리쳐야 한다.
우리의 몸은 무수한 윤회(輪廻)의 갈래에서 갖가지의 생을 받아야 하는 것인데, 이 때 생사(生死)의 윤회고(輪廻苦)로 많은 괴로움을 당하게 되므로, 이와 같은 끝없는 생사(生死)의 윤회고(輪廻苦)의 괴로움은 감당하기 어려움을 사유하여야 한다.
한량없는 중생들을 위한다면, 빨리 모든 부처의 무한한 공덕을 갖추기를 바라는 동기(動機)를 일으켜야 한다. 무수겁(無數劫)을 머물면서 기꺼이 끝없는 자량(資糧)을 닦아 쌓아 모으겠다는 생각으로 율의(律儀)를 받아 지닌다면, 끝없는 자량(資糧)을 원만(圓滿)하게 닦아 나가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대자대비(大慈大悲)와 보리심(菩提心)을 아주 강하게 일으켜,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짧은 시간에 부처가 되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아주 희유(稀有)한 일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한량없는 모든 행을 배우고, 수 많은 난행(難行)과 고행(苦行)이 필요함을 알고 나서, 한량없는 난행(難行)을 어떻게 성취(成就)할 수 있겠는가 하고 쉬운 지름길을 찾아 보겠다고 한다면, 원보리심(願菩提心)에는 간접적(間接的)인 해를 끼치고, 행보리심(行菩提心)에는 직접적(直接的)인 해가 된다.
그런 태도는 대승(大乘) 불법(佛法) 종자(種子)의 힘이 점차 열악(劣惡)해져서 도리어 성불(成佛)에서 아주 멀어질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여래밀의(如來密意)를 결택(決擇)한 용수(龍樹) 무착(無着)의 보리심(菩提心)의 힘을 크게 증장(增長)하는 도리(道理)와 상반(相反)된다.
만약 나약한 마음에 머문다면, 이익도 없고, 점차 더 겁약(怯弱)하게 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증득(證得)하는 방편(方便)을 잘 알고, 마음을 북돋우면, 많은 이익을 성숙하게 하는 것은 손바닥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요즘 사람들은 조그만 공덕(功德)이나 법상(法相)을 얻게 되면, 대도위(大道位)에 이른 것으로 오해(誤解)하고 만족(滿足)해 한다. 도(道)의 요체(要諦)에 정통(精通)한 스승은, 교리(敎理)의 바른 잣대로 그러한 공덕(功德)은 아주 소분(小分)일 뿐이며, 어디에도 이르지 못했음을 말하여 줌으로서 그 이치를 바로 알도록 하여야 한다.
만일 이 도리(道理)를 알게 되면, 아주 의기소침(意氣銷沈)하게 될 수 있으므로, 적은 부분(部分)의 공덕에 만족하지 말고, 다시 더 높은 자리를 구하여야 하며, 무변학처(無邊學處)를 배워야 하지만, 나약한 마음이 없이 배움은 희유(稀有)한 일이기도 하다.
바른 인연(因緣)으로 자량(資糧)을 쌓음에는 믿고 받아지니고, 견고(堅固)함, 환희심(歡喜心)을 일깨우고, 잠시 쉬는 힘을 갖추는 네 가지가 있다. 믿고 받아 지님은 열망(熱望)이 기본이다. 열망(熱望)으로 정진(精進)의 근원(根源)을 삼아야 한다고 여러 경전(經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반드시 수승한 이해를 일으켜야 한다.
그러면 승해(勝解)는 어떻게 일깨우는 것인가. 선악(善惡)의 업(業)에서 좋고 나쁜 과보(果報)가 생기는 도리를 수행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대승(大乘)을 승해(勝解)하여 대승문(大乘門)에 들어갈 수 있고, 자타(自他)의 모든 허물을 없애고, 모든 공덕(功德)을 쌓도록 할 수 있기에 하나 하나의 허물과 습기(習氣)를 함께 청정(淸淨)하게 할 수 있으니, 낱낱의 공덕(功德)을 구경(究竟)의 원만(圓滿)에 이루도록 하려면 오랜 시간을 수행에 힘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