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6. 07
칸국제영화제에서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박찬욱 감독이 감독상을, 송강호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고,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게임’(2021)이 세계인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하더니 두 사람의 수상 소식이 그 뒤를 이었다. 바야흐로 한국 영화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이제 한국 영화는 세계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 서서 영화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더불어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백악관을 방문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방문 목적은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방탄소년단이 아시아계에 대한 혐오범죄에 반대 메시지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K콘텐츠’의 위상이 높아진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상대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내용을 담았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 작자미상. ‘야유풍속도’. 19세기. 종이에 색. 87.5×120㎝. / 개인
야외무대에 가왕이 등장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그림이 있다니.’ 처음 ‘야유풍속도(野遊風俗圖)’를 봤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밝혀지지 않은 무명씨의 그림인 ‘야유풍속도’는 그다지 수준 높은 작품은 아니다. 사내들의 품에 안긴 기생들은 상체에 비해 치마가 지나치게 부풀어져 있고 사내들의 신체 비례도 어색하다. 소나무 등걸을 그린 필법은 조잡하고 어지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면 볼수록 읽는 맛이 나고 현장감이 느껴지는 묘한 매력을 가졌다. 그 장소에 있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그릴 수 없는 현장감이다.
어디 그뿐인가. 왼쪽 하단에 그려진 선비는 술이 떡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져 있다. 짚신 한 짝은 벗겨져 뒤쪽에 떨어져 있다. 조선시대 회화사 전체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고주망태가 된 선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다. 물론 술 취한 선비를 그린 그림으로는 조선 후기의 김후신(金厚臣)이 그린 ‘대쾌도(大快圖)’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대쾌도’ 속의 술꾼은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걸을 정도는 된다. ‘야유풍속도’의 술꾼처럼 길바닥에 드러누울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니다.
비록 술에 취한 사람이 등장하지만 ‘야유풍속도’에서는 술꾼이 주인공이 아니다. 이 그림은 가객(歌客)이 소나무가 있는 야외에서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춰 노래하는 장면을 그렸다. 가객은 부채를 착 펼치며 목소리를 높여 열창하고, 고수는 “얼씨구! 그렇지!”라고 추임새를 넣어 가객의 흥을 돋운다. 가객은 지금으로 치면 ‘솔로 가수’이고, 고수는 북으로 반주를 하는 연주자라고 할 수 있다.
무릇 공연자는 관객이 많아야 신이 나는 법. 땅바닥에는 두 개의 돗자리가 깔려 있는데 한쪽에는 가객과 고수가, 다른 쪽에는 선비들이 기생을 무릎에 앉히고 앉아 있다. 선비나 기생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담배를 피는데 장죽이 유난히 길다. 돗자리에 앉은 선비들은 모두 갓 대신 탕건을 썼다. 탕건은 선비들이 평상시에 착용하는 가벼운 모자다. 서 있는 사람들이 갓을 쓴 것과는 대조적이다. 돗자리에 앉은 선비들이 오늘의 ‘뮤지션’을 초청한 주최자들일 것이다.
술상은 가객과 고수가 있는 돗자리에 차려진 것으로 봐서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듯하다. 그들 주변에는 갓을 쓴 어른들과 아이들이 서서 공연을 구경하고 있다. 물론 공연과 상관없이 소나무 아래에 앉아 기생을 희롱하는 젊은 총각들도 보이고 저 멀리에서 씨름을 하는 아이들도 보인다.
그림이 조금 난삽하지만 ‘야유풍속도’는 조선 후기 이래로 대중 속에서 공연을 펼친 가객들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야외공연은 지금의 ‘K팝’과 영화 대신에 조선시대 사람들이 관람하고 즐긴 그 시대의 엔터테인먼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그림 속의 가객 같은 전문 소리꾼의 등장에 마치 조용필 같은 국민가수를 보듯 열광했다.
조선시대부터 강화시킨 음악교육
‘K팝’은 이제 한국 내에서만 유통되는 내수용이 아니다. 전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글로벌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K팝’이 이렇게 세계를 주름잡게 된 것은 단순히 이수만이나 방시혁과 같은 몇몇 기획사 대표의 노력의 결과만은 아니다. 이미 조선 초기부터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음악교육을 강화시킨 결과일지 모른다.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는 그 정책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조선경국전’은 비록 개인이 지었지만 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모체가 될 정도로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이 제대로 압축되어 있다. 정도전은 이 책에서 가악(歌樂)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음악은 성정의 바름에 근본하여 소리의 곡조로 발현된 것이다. 종묘의 악은 조상의 풍성한 덕성을 찬미했으며, 조정의 악은 군신의 장엄과 공경을 지극히 한 것이다. 가정이나 항간에 미쳐서도 어떤 일을 계기로 짓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그윽하면 조상의 혼백이 왕림하고, 밝으면 군신이 화목한다. 향읍이나 국가에까지 이를 확대하면 행동을 교화시켜 풍속이 꽃다워지니 음악의 효용은 깊을 따름이다.”
정도전의 주장은 음악이 성리학적 인간을 양성하는 데 공리적 효용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즉 음악이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가악을 제작 배포하여 익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 궁중에서는 매년 연말이 되면 나례희(儺禮戲)를 펼쳤다. 나례희는 한 명의 광대가 재담과 흉내내기를 연극으로 꾸며 보여주는 형식이다.
▲ ‘야유풍속도’의 ‘가객’과 ‘고수’ 부분.
이것은 궁중 안에만 살고 있는 왕에게 세상의 풍속과 민심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와 함께 거문고, 젓대, 장구 등의 악기가 사대부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음악의 효용성은 비단 정도전 개인만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공자(孔子) 이래로 유교에서 줄기차게 강조했던 사항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문인 사대부들은 악기를 연주하는 데는 적극적이었던 반면 본인이 스스로 노래하는 행위는 기피했다. 특히 양반들은 입을 열고 몸을 움직여 직접 노래하는 가창이 양반의 품위를 저하시키고 체통을 떨어뜨린다고 간주했다. 우리가 연예인을 ‘딴따라’로 부르며 천시했던 근본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악기는 연주하지만 노래는 부를 수 없다는 이상한 논리였다. 대신 양반들은 가사를 지어 계집종이나 기녀에게 부르게 했다. 노래하는 가창자와 곡을 지은 작사가가 이원화된 특이한 구조였다. 사대부가에서 노래 부르기를 전담하던 계집종을 ‘가비(歌婢)’, 노래하는 기녀는 ‘성기(聲妓)’라고 불렀다.
어찌되었건 가창의 세계는 양반들이 진입을 꺼리는 예능의 ‘블루오션’이었다. 이 세계를 선점하기 위한 수많은 가객들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발전은 언제나 경쟁에서 시작된다. 조선 후기가 되면 기생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가객들이 노래하는 여러 팀의 놀이패가 결성되었다. 이런 구조는 기녀들이 가창을 담당하고 남자들이 악기를 다루던 기존의 여창남기(女唱男技)에서 남창여기(男唱女技)로 시스템이 전환된 경우다. ‘야유풍속도’에서 남자 가수가 노래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작자와 제작연도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 후기 이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비’와 ‘성기’에서도 알 수 있듯 가객들은 천민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예능인들의 삶은 노비나 천민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양반 중심의 신분사회에 균열이 발생했다. 농사꾼, 상인, 역관, 서리 등의 중인계급에서 문벌가 이상의 땅과 금전을 축적한 거부들이 등장하였다.
조선의 뮤지션들
이들 신흥 부자들은 양반들의 일상을 모방하고 학습하면서 가객들을 초청해 소리를 감상했다. 문화는 돈이 있는 곳에서 꽃피우기 마련이다. 후사금도 두둑했다. 탁월한 가창력을 인정받은 가객들은 넉넉한 사례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수요는 공급을 부른다. 신흥 부자들의 수적 증대는 무수한 가객들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다. 어느 집에서 어떤 가객을 불렀느냐에 따라 그 집의 수준을 가늠할 정도로 부의 척도가 바뀌었다.
숙종 때 거문고의 대가로 인정받던 김성기(金聖基·1649~1724)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원래 상방궁인으로 천민이었는데 발분의 노력으로 거문고 명인으로 인정받았다. 그가 불참한 연예장은 아무리 지체 높은 인물들이 모였다 해도 별 볼일 없는 행사로 치부될 정도였다. 전라도에서 잔칫집에 홍어가 빠지면 ‘상놈의 집’이라고 손가락질받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 그리고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玟英)의 ‘가곡원류’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시대적 환경이 뒷받침되었다. 김천택, 김수장, 박효관, 안민영 등은 그들 스스로가 작곡도 하고 악기를 다를 줄 아는 뮤지션들이었다.
곡은 양반이 쓰고 노래는 천기를 시키던 조선 초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김천택은 하위직 공무원으로 포교일을 맡았는데 노래를 잘 불러 온 나라에 이름을 떨쳤다. 거문고 명인 김성기가 거문고를 뜯고 김천택이 노래를 부르면 그 소리가 어찌나 맑던지 귀신도 감동시킬 수 있고 무르녹은 봄날이 다가온 것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공연이 지금과 같이 대중들과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판소리의 등장이었다. 판소리는 나례희가 폐지되자 그 분야의 광대들이 재담극에 소리를 더해 만든 음악 형식이다. 우리가 마당놀이에서 소리꾼, 고수, 청중이 한 팀처럼 축제에 참여했던 방식도 판소리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연예인들은 천민에서 가객으로, 가객에서 딴따라로 오랜 세월을 무시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 그다음에는 오락거리를 찾게 되어 있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 노래와 관광 등을 포함한 ‘K컬처’ 붐은 오래 지속될 것 같다.
조정육 / 미술평론가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