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월
밤숲은 가을 향내로 그윽하다
밤꽃술처럼 길게 머리를 딴 사내 하나가
자욱한 밤숲으로 올라간다
밤꽃 향기가 사내의 뒤를 따라가고
풍만한 과부 하나도 올라간다
보나마나 그들은 밤숲에서 몸 섞자고
무언의 약속을 했겠지
낮달의 눈길도 가려주고 싶어
긴 꽃술 찰랑찰랑 흔들어
황급히 밀월 장소를 가려주는 밤나무 숲
그들이 밤 숲에서 몸을 섞으면
그윽한 밤꽃 향기보다
사랑의 냄새가 더짙게 날리겠지
황간역
추억 속으로 비둘기호 풀뱀처럼 기어온다
침목 틈에서 흔들리는 민들레 꽃대처럼
늙은 역보 하염없이 흰 깃발 흔든다
그때마다 환한 햇살로 내려앉는 고요,
폐역廢驛이 되지 않기 위해 질주만을 꿈꾸지만
빠른 것들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황간역, 언제까지 간이역으로 남아있을 것인가
KTX 비웃듯 지나가도
무궁화호만 쓸쓸히 정차하는 역이
그래도 눈물 나게 살갑다
늙은 역보의 흰 깃발 그리우면
햇살 쏟아지는 황간역 철길에 나가
술렁설렁 꽃대 흔드는 민들레를 보아라
흰 깃발 향해 풀뱀처럼 달려오는
비둘기호의 순정을 추억 속에서 꺼내보라
강
아무리 가을이 장마처럼 밀려와도
꽃물결은 둑을 넘지 못하네
강물 출렁이는 둑 너머엔
버드나무 삼단 머리칼이 가지런하네
강바람에 산발한 버드나무 보며
강은 먼 미래를 향해 휘어져 흐르고 있네
강둑을 따라 걸어가는
염소 떼들 행렬 속에서
납작 엎드린 달맞이꽃
아직은 평화스럽네
황간역
추억 속 비둘기호가 머무는 역에
아련히 흰 깃발 흔들던 늙은 역무원
민들레를 닮아 등이 굽었네
나도 만들레를 닮아가네
무궁호만 쓸쓸히 정차하는 역에
늙은 역부처럼 흰 깃발 흔들고 싶네
첫사랑
내 생애 가장 부끄러운 날은 가을이었네
가을이 숨막히게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옷을 훌훌 벗어 버렸네
새벽이슬 맞고 나서야 그리움에 취해 벌인 짓이라는 걸 알게 되었네
세상이 내 치부 속속들이 알고 있는 한 한동안 맨몸으로 견디고 싶네
찬비와 폭설에 절고 절어도 내년 봄 맞이할 첫사랑만 생각하면 가슴이 띄네
실직
나뭇가지 끝 시든 잎새들이
찬바람에 팔랑거린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나뭇가지 꽉 잡은 손
찬바람 몰아쳐도 손 놓지 마라
내 가슴처럼 휑한 나뭇가지 끝에도
언젠가는 푸른 봄물 차오를 것이니
그 때 꽃 환히 피면
불안한 마음 내려놓고 살며시 손을 놓거라
포도나무 앞에서
나에게도 포도알처럼
쟁글쟁글 익어 가는 시절이 올까
달빛 쨍쨍하게 쏟아져 내릴 때
넝쿨손 흔들어 길손들을 유혹한다
길 가던 뭇 사내 꼴깍 침을 삼킨다
따먹을까 말까 유혹에 못 이겨 망설이는데
방황하던 벌떼들 꽁무니 들어
따끔 침 한 방 놓고
달아나는 한낮
포도나무 앞에서
포도나무가 제 몸 뒤틀며 허공을 타는 것은
당신에게 달콤한 사랑을 나눠주기 위함입니다
넝쿨마다 포도송이 알알이 맺혀도
따 먹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
땡볕 속을 숨막히듯 오릅니다
밤이 되면 달빛자락에 잠시 목축이기도 하지만
포도송이에 단물 넘쳐흐를 때면
당신에 대한 그리움도 흘러넘침니다
포도나무가 넝쿨손 흔들 때마다
당신은 꿈결처럼 다가와 흔들립니다
포도송이 한손에 쥐어줘도
따 먹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
매일 밤 포도나무에 달빛 같은 사랑
주절주절 걸어놓겠습니다
산경
사태 난 꽃 물결 따라 흰나비 날아온다
낡은 초가의 굴뚝 연기 솟구쳐 오르고
초가너머 짙푸른 산하나
뻐꾸기 울음 속에 파묻힌다
구성진 울음이 싸리꽃 노을처럼 잔물결친다
벼랑 아래 흘러가는
강물 따라 가다보면
아직도 봄이 절정으로 타오르는 것을 알겠다
반야사 풍경
반야사 뜨락에서
백구 한 놈 설핏 풋잠이 들었다
목백일홍 숯불처럼 타오르는 절
이른 가을이라
꽃잎이 너울너울 꽃비로 쏟아진다
간지러운 꽃비에
백구가 조심스레 실눈을 뜬다
그 눈 속에서 노을이 잔잔하게 탄다
한생이 잠시 잠깐이다
저녁 열차
저녁 열차가 고함을 지르며
모퉁이를 돌고 있다
철컥 철컥 쇠바퀴를 끌며 들판을 지나갈 때
가을은 수숫빛 노을 내리며 일몰의 시간을 갖는다
분 화장을 한 코스모스가 바람결에 허리를 꺾는다
낮달이 하품을 한다
늙은 촌로 논두렁길 밟고 가듯
저녁 열차 늘어진 몸통 끌며
흐릿한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
추수날
황금 들판에서 벼를 베면서 서울을 동경했다
동네 형들에게 전해들은 서울의 신기한 풍경들이
동화 속 세상처럼 머릿속을 떠돌았다
서울에 가면 촌놈티를 내지 말라던 동네 형들
빌딩의 층수를 세지도 말고
차량의 숫자도 세지 말라던 동네 형들
정신 차리지 않으면
귀신같이 코를 베 간다는 섬뜩한 말을 떠올리며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열차의 꽁무니에 멍한 눈길 실어 보냈다
명절마다 동네 형들 고향 내려와 자랑거리 늘어놓을 때도
보름달처럼 부푼 셀렘을 싣고 달려가는 밤 열차
가스통과 호박꽃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 호박꽃이 피었다
내려다보면 아득한 길
노란 가스관이 사다리 되어 넝쿨손을 끌어올렸다
저렇게 넝쿨손 뻗어 올린 건
가스통을 향한 집착이 아니더냐
가스레인지에 불꽃이 필 때
가스통도 간지럽게 오르가즘을 느낀다
넝쿨손의 촉수는 청진기보다 더 예민하다
촉수를 가스통에 갖다 대면
가스관 휘돌아 새 나가는 화력도 희미하게 감지한다
그 화력이 호박꽃을 터뜨린다
똥을 주지 않아도
똥 빛 같은 꽃 흥건히 퍼질러놓는다
그 꽃이 아내의 얼굴을 닮았다
가스레인지 앞에서
요리를 하며 훤한 꽃 피워 물던 아내의 얼굴을 닮았다
횟집 어항
쪽빛 바다에서 잡혀와
어항에 내던져지기까지의 생을
장어는 온갖 몸부림으로 풀려고 하는 것일까
먹빛 몸뚱이 세차게 흔들면
자칫 먹물 흥건히 풀어질듯 하지만
조금 뒤면 불판에 던져질 죽음의 전율에
어항은 다시 쥐죽은 듯 조용하다
몸부림과 고요가
반복되는 어항 속에서
장어는 지금 먼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집채만 한 포말 속에서도
잔잔히 자유를 꿈꾸었던 놈들
보나마나 장어는
파랑의 세월이 그리웠을 것이다
먹빛 몸뚱이 세차게 휘두르며
쪽빛 물결에 먹물 흥건히 풀어놓던 그 시절이
선인장
한평생 살면서 죄짓지 않는 이 있을까
죄짓지 않는 이 있으면 나와 보라
열사의 사막에 하루 종일 서 있어보라
아니 천년만년 죽은 듯 입 닫고 있을 사람
그런 사람 있으면
한평생 경의를 표해주마
그 고통 속에서
꽃 해맑게 피어
죄 훌훌 열사의 사막에 쏟아 붓는
선인장이 그래도 장하지 않느냐
사랑을 하려거든
사랑을 하려거든 보리밭엘 가라
보리꽃 일렁이는 이랑으로 들어가라
파도치는 보리 물결 속으로
몸 숨기는 종다리처럼
애인 꼭 끓어 안고
푸른 물결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다
사랑을 하려거든 보리밭엘 가라
애인과 손잡고 한참을 가다보면
끝조차 보이지 않는
푹신한 보리 이랑이 나올 것이다
거기서 숨 할딱이며 사랑을 나누다 보면
하늘을 배회하던 종다리들도
부러운 듯 달콤한 광경 엿볼 것이다
도깨비 씨앗
외딴집 앞 도깨비 풀들아
내 지나가거든 화살을 겨눠라
내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면
오늘밤 내 집에 들지 못하니
날이 훤히 밝으면
날 표적으로 삼아라
난 너의 심정을 안다
남자를 그리워하다 죽은 여자의 혼령처럼
너의 고집이 센 것을 아나니
도깨비 풀이여
이제는 마음 풀 때도 되지 않았나
달 훤히 떠오를 때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면
혹시 아느냐
너를 미워한 마음 풀어질지도
홍시
아무리 먼 곳에서도
까치가 날아오면
네 집앞 감나무에 등 하나 켜진 줄 알아라
둥불은 그리움처럼 빛을 밝혀
길 못찾아 서성이는 사람의 마음을 비쳐주는데
오늘 밤 네 집앞에서 까치가 울면
아주 귀한 손님이 온 줄 알아라
파꽃
파대궁은 싱싱해도 속은 텅 비었다
대궁 꺾어 불면
애절한 퉁소 소리가 나고
퉁소 소리에 반한 나비도 날아온다
마약에 취한 듯
날개 펄럭이다가
대궁 끝에 앉아 봄꿈을 꾼다
노송의 일생
벼랑에 좌정하고 앉아 있는 노송 하나
백살 먹은 노스님처럼 점잖하다
헝클어진 백발 바람에 찰랑이며
자식들 손잡고 마실가시던 어른들처럼
푸른 하늘 느릿느릿 흘러가는 구름의 행로
가끔씩 황새들 똥물 뒤집어쓰면서도
솔바람에 찰랑찰랑 푸른 갑옷만 뒤집는다
늙어가는 나이마저 밑동 속에 감추고
푸른 절개만 고집하는
노송의 일생이 딱딱한 옹이로 진다
폐촌
초가지붕이 덕지덕지 이끼 투성이다
세간 살이 하나 없는 방은 동굴처럼 텅 비었다
태양은 땡볕 햇살 꽉 채울 듯
낡은 사립문 앞에서 아지랑이로 불타고 있다
두 눈 빨개진 부엉이
밤만 오면 주인을 불러내듯 흐느껴도
잡풀들 키재기를 하며 기웃대고 있다
녹슨 놋요강 신주단지처럼 놓여 있는
낡은 사랑채 따라
잡풀들이 꽃망을 흔들며 진한 향기를 뿌린다
풀꽃 향기로도 채울 수 없는
텅 빈 초가의 공허
문득 두툼한 봉투 몇 개 던지고 가는
우편배달부의 녹슨 자전거 뒤로
아지랑이가 바퀴에 걸려 넘어지고 있다
억새
하늘을 쓸고 싶어 능선에서 살아요
조금만 손 올려도 하늘을 잡을 수 있는 곳
몽당 빗자루들 한데 모여 하늘을 쓸고 쓸면
하늘 속 해맑은 마음이 보이는 듯해요
새털구름은 잔잔한 수면을 휘젓듯 하늘을 저어가요
햇살이 쏟아질수록
제 육신 바삭바삭 말라가며 하늘을 쓸어요
겨울이 오기 전
편히 제 육신 눕힐 가장 성스러운 곳을 찾아
스스로 빗질을 해요
새벽녘 슬픈 노래
새벽녘이 풀들에게는 가장 슬픈 날이다
해가 뜨지 않아도 오종종 모여앉아 눈물 흘린다
어둠 속인데도 황홀하게 빛나는 눈물
보석알처럼 반짝일 때마다
풀숲에 숨어있는 벌레들 흐느껴 울고
풀들은 손을 흔들며 만남의 시간을 준비한다
벌레들의 눈동자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세상의 어느 누구를 위해
벌레들은 한 됫박의 눈물을 퍼내 새벽길에 뿌리고 있나
풀들이 꽃을 피우려고 저러는 것일까
풀들이 좁쌀 같은 꽃망울 까칠하게 내밀고 있을 때
벌레들이 한가락 울음이라도 던져준다면
풀숲은 금세 꽃으로 피어나 환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