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 솟아있는 감나무는 벌써 가을 물이 들었다. 바닥은 울긋불긋한 감잎들로 수북하고 앙상한 나뭇가지는 감잎 몇 장 매달고 하늘거린다. 사람의 발길조차 뜸한 황량한 골목이지만 감잎이 흩날리는 가을철엔 분위기가 달라진다. 긴 장대를 꼬나 쥐고 감을 따는 골목 노인들의 눈길에 오종종 매달린 붉은 감들이 등불처럼 환한 빛을 뿜어주기 때문이다.
감나무에서 마저 남은 감잎이 몽땅 떨어지고 감잎이 더 수북이 쌓일 무렵, 노인의 대문 앞은 텅 비어있었다. 대문 앞에 조는 듯 서있어야 할 노인의 낡은 차가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았다. 노인이 집을 내 놓았다는 소문이 퍼지더니 벌써 집이 팔린 모양이다. 집이 낡고 평수는 넓은데 시세보다 비싸게 가격을 내놓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젊은 사람이 그 집을 구입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젊은 사람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안 그래도 요즘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아파트를 선호하는 추세인데 젊은 사람이 단독주택을 산 것에 대한 호의적인 생각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 주변에 산재한 단독주택의 골목 풍경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글오글 늙은 사람들이고 걸음걸이도 느려 터져 골목은 늘 활기가 없었다. 활기 넘치는 골목을 만들려면 우선 젊은 사람들이 단독주택에 살림을 꾸려야 한다고 나름대로 진단을 했다. 아파트보다는 불편하지만 마음을 내려놓고 살다보면 단독주택도 살아볼 만하다는 경험 때문이었다.
앞 집 대문 앞에 주차된 차를 본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칠이 벗겨지고 오래된 자주색 승용차였다. 그러나 그 자가용 때문에 갈등의 골이 패인 것은 다름 아닌 아내였다. 퇴근한 아내가 울그락불그락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왔다. 앞집 차가 제멋대로 주차돼 있어 대로변에 차를 대고 오는 길이라며 욕을 섞어 툴툴거렸다. 젊은 사람이 처음 이사를 와서 사정을 몰랐으니 내일 만나 잘 알려주면 주차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라고 아내를 진정시켰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앞집 ,젊은 주인과 대화를 나눠 보니 아주 싹수가 노랬다. 주차시비로 언성이 높아지면서 내쏟는 말투에는 고집스런 면이 있었고 종종 짜증도 섞여 나왔다.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꾹 참았다. 사소한 일로 다퉈봤자 양쪽 모두 덕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아파트의 층간 소음이나 주차 문제로 갈등을 겪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우리 집 골목의 주차문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주차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없게 주차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곁들였다. 주차선이 없어 주차를 할 때는 보도블록의 금에 정확히 앞바퀴를 맞춰야 한다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간이 좁아 이웃집 차들이 빠져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소상히 알려 주었다. 고집이 셌던 사람도 성격이 누그러지고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까지 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 부부가 처가에 다녀오던 날 골목에 주차된 그의 차를 보게 되었다. 차는 보도블록의 금을 벗어나 한참 뒷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 차를 받칠 수가 없었다. 아니 억지로 받쳐 놓아보았자 우리 차와 담장의 폭이 너무 좁아 다른 차가 빠져 나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뻔질나게 드나드는 골목 끝 빌라의 택시가 더 불편했다. 주차된 앞집 차 유리창에 부착된 휴대폰 번호로 몇 번이나 전화를 넣었지만 받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차를 대로변에 대고 집으로 들어오자 한참 후에 골목에서 걸걸한 여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말투를 들어보니 빌라 아줌마가 틀림없었다. 앞집 젊은이와 휴대폰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높아진 목소리로 아줌마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랐다. 목소리도 가래 끓는 것처럼 그렁그렁했다. 열을 낼 때마다 살집이 펑펑한 뱃살이 들썩거리고 호흡조차 벅찬 얼굴이었다.
저러다가 뇌출혈로 쓰러질지 모른다는 위급한 생각까지 들었다. 한참 후에 아줌마가 전화를 끊자 골목이 조용해졌다. 소란하던 엔진의 시동이 꺼져버린 느낌이었다. 아줌마의 말로는 젊은이가 모임중인데 여간 말투가 뻣뻣한 게 아니라고 했다. 귀가하면 차를 잘 받쳐 놓겠다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도 아줌마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다음날 골목에 차 두 대가 형제처럼 오순도순 주차되어 있었다. 처음 젊은이에게 받은 선입견 때문인지 아내의 표정은 냉랭했다.
“백수가 차를 대로변에 받쳐 놓으면 얼마나 좋아. 그러면 골목도 넓어 보이고 다른 차도 쉽게 골목을 빠져 나갈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차는 여전히 대문 앞에 주차돼 있었다. 골목에 나뒹구는 낙엽대신 눈발을 도툼하게 뒤집어쓰고 한파에 오돌도돌 떨고 있었다. 골목을 들락거리는 택시가 정확한 눈대중으로 차와 골목 사이의 공간을 조심스레 빠져 나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