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1
30년은 한 세대다. 세상 어떤 일이든 한 세대를 지켜봤으면 결론을 내려도 된다. 지난 30년 공산국가를 향한 ‘햇볕 정책’은 모두 실패했다. 러시아는 여전히 소비에트 제국 위상을 그리워하고, 중국은 부유해졌지만 민주화로 이행하지 않았고,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미국·유럽연합(EU)은 ‘그들이 변할 것’이라고 오판했다.
변하기는커녕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더 강화했다. 푸틴·시진핑·김정은은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을 닮아가고 있다. 푸틴과 김정은은 선제적 핵 사용을 공개 선언했고, 시진핑은 대만 무력 통일을 공식화했다. 결론은 분명하다.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세계화에 대한 결론도 분명하다. 대한민국은 세계화의 승자다. 세계가 모두 문을 열고 하나로 연결될수록 대한민국은 성장하고, 탈세계화로 문을 걸어 잠그고 블록화로 연결이 끊어지면 위기를 맞는다. 세계화로 세계는 평평해졌지만 평등해지지는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성장할수록 불평등은 커졌다. 불평등 확대를 놓고 진보 진영은 ‘신자유주의’ 폐해로 몰아붙였지만 진보 정책통 최병천은 그걸 용기 있게 ‘좋은 불평등’으로 불렀다. 세계가 보호주의로 돌아선다면 대한민국의 성장은 멈추고 불평등은 줄어들겠지만 그건 ‘나쁜 평등’일 뿐이라고도 했다. 세계화 논쟁도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다.
역학 관계도 변했다. 중국은 성장해서 미국과 패권을 다투고 있고, 한국도 일본에 열등감을 갖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 국내 정치에서는 ‘보수 동맹’은 약해지고 ‘민주 동맹’은 강해져서 ‘주류(main stream) 경쟁’을 하고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올라가면 내려가고 내려가면 올라가는 게 세상 이치다.
민주화 이후 30년이 흘렀으니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가 됐다. 한국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는 뭘까. 다시 말해 한국 정치 개혁의 목표는 뭘까. ‘정치 개혁 특별위원위’(정개특위)가 만들어질 때마다 물어보면 그들은 언제나 한결같이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없애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언론이나 학계도 그렇게 답한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제왕이라면 적어도 푸틴, 시진핑, 김정은 정도는 돼야 하지 않는가. 실제로 박정희, 전두환은 그 정도 권력을 누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정(우)회’라 부른 국회의원을 지명했는데 그 수가 전체 의석 3분의 1이었다. 그는 입법부·행정부·권력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사법부와 언론도 통제했다. 반체제 인사나 기자는 물론 국회의원이나 장·차관도 ‘중정’에 끌려가 얻어맞던 시절이었다. 전두환 시대도 다르지 않았다. 대통령이 ‘왕’인 시절이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들어선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 대통령까지 대통령 권력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단 한 번도 역류한 적이 없다. 그나마 여당 총재인 대통령이 당 대표를 임명하던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시절까지는 당에 대한 지배력은 있었지만 당대표를 선거로 뽑기 시작한 노무현 대통령부터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고위직 인사권 정도만 남은 대통령을 제왕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물론 말로만 책임 총리, 책임 장관을 떠들고는 이들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점에서는 ‘청와대 정부’라는 박상훈의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건 행정부 내의 권력 관계일 뿐이다. 대통령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제왕적 대통령’은 신화 같은 거대한 착각이다.
한국 정치의 핵심적 문제는 상대 정파의 정책과 주장을 모조리 거부하는 ‘비토크라시(Vetocracy)’다. 한국 정치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늪에 빠졌다. 모두가 못 하게 할 정도의 힘만 가질 뿐 누구도 대한민국을 끌고 갈 힘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개혁도 불가능하다. 노무현 대통령 이래로 대한민국은 비전도 없고, 전략도 없고, 리더십도 없다. 정치의 본령은 결정하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같이 양당제·다수제·승자독식제를 갖고 있는 정치 문화에서는 단 한 석이라도 많으면 국정을 운영할 전권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는 미국도 사실은 ‘의회 중심제’라 불러도 무방하다. 이들과 달리 합의제를 선택한 내각제 국가는 연정을 통해서 애당초 다수파를 구성한다. 어느 제도든 결정할 수 있는 구조다. 우리는 죽도 밥도 아니다. 대통령제와 내각제, 미국식과 유럽식, 다수제와 비례제 등 온갖 것을 짬뽕해 놓은 통에 정체 모를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 치명적 약점은 결정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젠 결정할 수 있도록 결정해야 한다. 이게 정치 개혁의 핵심적 목표다. 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비례대표를 없애고 4인 선거구 60곳, 3인 선거구 20곳의 중선거구제를 하자는 쪽이다. 그렇게 된다면 수많은 무소속 당선자가 나오고, 20석 이상의 원내 교섭 단체도 많아질 테고, 당선자를 낸 정당도 숱하게 많아지겠지만 그래도 그게 훨씬 낫다. 정당 정치는 약해지겠지만 어차피 정당은 정치 플랫폼으로서 수명을 다했다. 정당은 산업 시대 유물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박물관에 들어가야 한다. 리모델링이 불가능하다. 해체 후 새로운 플랫폼을 구상하는 것이 낫다. 소선거구제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공천 때문에 국민의힘은 권력 앞에서 비굴해지고, 민주당은 정치 훌리건 앞에서 비겁해진다. 정치의 목적이 지역 민원 해결이나 공천 싸움뿐이다. 중선거구제를 하면 재벌·파벌·족벌 판이 될 것이라는 주장은 광우병에 버금가는 선동이다. 그러기는커녕 돈 없는 청년, 선거는 꿈도 꾼 적 없는 과학자도 순식간에 전국적 스타가 될 수 있다. 지금은 시공간이 장벽이 되지 않는 디지털 시대다.
대통령도 그게 훨씬 낫다. 그때그때 현안마다 연정을 통해 다수파를 만드는 게 레거시를 남기기 쉽다. 그렇게 과도적으로 2024년, 2028년 총선을 치른 후, 대통령 선거와 총선이 겹치는 2032년에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면 된다. 그러니 2024년 총선은 중선거구제로 한번 해보자. 설사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더라도 설마 지금보다야 더 나빠질까.
박성민 / 정치컨설턴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