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국군3군단장이었던 유재흥 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5기로 졸업하였고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에는 일본군 육군 대위로 근무.
미군정 시기에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 장교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계속되는 패전과 도주 했으나 역대 정권에서 계속 승승장구 하였다
1.전쟁초기 국군 7사단장으로 의정부에서 북한군에 궤멸상태 사단 해체.
2.국군 2군단장으로 장전호 전투에서 중공군 기습공격에 2군단 궤멸 일사후퇴 원인제공으로 군단 해체.
3.국군 3군단장으로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군 가평전투에서 중공군에 궤멸 군단 해체.
싸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패전 한 것 아니고
포위 당한 것도 아닌데 그런 줄 착각하여 최고 지휘관인 유재흥 군단장이 비행기 타고 도주를 하자
휘하 부하들은 전의를 상실한채 무질서한 도주로 포로로 잡혀 인민군으로 전환.
중화기는 중공군에 넘겨줘 적의 병력과 화력증강에 도움을 줌.
미군 전사에 당시 국군을 군기빠진 오합지졸들의 나 살기 경쟁이라고 기록.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제7사단장으로서 참전하여 의정부 축선을 책임지고 있었으나
북한군에 패전을 거듭하여 덕정-의정부-창동으로 축차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7사단은 붕괴 괴멸되고, 결국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후 덕천 전투에서 지휘실수로 중국군에 포위를 허용하여 제2군단이 사실상 전멸되어 해체케 하였으며,
현리 전투에서도 제3군단을 해체케 하는 등 한국 전쟁에서 지휘한 전투마다 패전하였다.
제2군단장으로 낙동강 방어전에서 일어난 영천 탈환전과 이후 한국 전쟁 후반부의 수도고지 전투의 공로가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전술, 지휘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UN군에 패퇴한 북한군의 전술적 퇴각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공세 당시 지휘하던 3군단이 포위되자, 유재흥은 군단을 버리고 항공기편으로 도주하였다.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갔다"라고 항변하였지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의
136페이지에는 이 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고 분명히 명시했다.
이 도주행각으로 3군단은 사실상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와해상황이 되었다.
결국 현리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포위섬멸당하며 3군단은 해체되었다.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 지휘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된 계기였다.
당시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국군의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육군 중장으로 예편.
제3공화국에서 등용되어 타이, 스웨덴, 이탈리아 대사 및 대통령 특별보좌관, 국방부장관 등을 지냈다.
퇴임 후에는 1974년부터 대한석유공사 사장으로 6년간 재직했다.
한국전쟁시 잘못된 상황판단으로 본인 지휘하의 1개사단과 2개 군단이 패주후 해체되는 결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공으로 1951년에 받은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수교훈장 등 여러 차례 훈장을 수여받았다.
1990년대에 전직 장성 모임인 성우회의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통수권을 미군에게 일임하자는 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계속되는 패전과 무단도주로 작전통수권이 미군으로 넘어가게 된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였지만,
1990년대 이후 작전통수권 반환 움직임에 결사반대를 표시하여 많은 비아냥을 사기도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별 달고 거들먹거리기만 했다'라고 발언한 것 때문에 예비역 장성들이 발끈했던 일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재흥은 발끈할 자격이 없다.
경북 경산 하양초등학교에는 유재흥 장군 전승기념비가 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아버지 유승렬과 함께 선정되었다.
현리전투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94년 탈출한 조창호 소위(훗날 중위로 진급)는 유재흥과의 면담을 원하였으나 2006년 사망할 때까지 일체 만남을 거부하였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명단중 군 부문에 부친 유승렬과 함께 선정 글 인용 : 위키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