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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문학원고. 이무상>
소양정과 춘천-1
이 무 상
아득한 옛날 한강(漢江) 이남에
78개 부족국(部族國)들이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에
소속되어, 삼한(三韓)이라 하던 때
춘천은 맥국(貊國)이었네.
그러다 Bc:108년
한(漢)의 무제(武帝)가 대륙을 통일하고
이번엔 동방을 개척할 량으로
한반도를 침략하여, 이곳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던 때
춘천도 그 영역이 되어
진번군(眞番郡) 소명현(昭明縣)이 되었네.
그러다, 무제(漢武帝)가 죽고
아들 소제(昭帝 7세)가 위에 오르면서
곽광(霍光)이란 신하가 보필하던 때
많은 변화가 있게 되는데
Bc; 82년 4군이었던 한사군(漢四郡)을
2군으로 줄이게 되어
낙랑군(樂浪郡)과 진번군(眞番郡)을 병합하여
<낙랑(樂浪)>이라 하고
현도군(玄菟郡)과 임둔군(臨屯郡)을 병합하여
<현도(玄菟)>라 하였는데
이번엔 몇 해 안 되어
압록강 위쪽에 자리하였던 현도(玄菟)를
그곳 토착세력들(高句麗族)에게 빼앗기게 되면서
낙랑에서는 또다시 개편을 하여
Bc;75년 영동(嶺東)의 임둔군(臨屯郡)을
낙랑군동부도위(樂浪郡東部都尉)라 하여
그 일대의 7현(縣)을 관할게 하였고---
진번군 소명현(昭明縣)인 춘천은
낙랑군남부도위(樂浪郡南部都尉)라 하여
주위의 7현(縣)을 관할게 하였는데
그러던 때 춘천의 소양정(昭陽亭)이
건립이 되었네, 그 연유(緣由)는
이 고장은 높은 산들로 둘리어 있어
오는 길이 험한데다, 내륙으로는
강들이 막히어 있어
난세(亂世)의 피난처로는 더 없는 고장이나
현(縣)들을 관할하는 치소(治所)로서는
너무 열악한 조건에 있었으므로
그러한 어려움을 대안(代案)키 위한 생각에서였네.
그렇게 되어, 소양강 기슭에 정자(亭子)를 짓고
소양강 어부들이 잡아 올린 고기며
봉산(鳳山)의 산채(山菜)들로 자리를 만들어
먼 길을 오신 손님들을 반가이 맞아
그 피곤을 풀며, 친목(親睦)의 자리가 되다보니
산골로만 느껴지고, 멀게만 생각되던
이 고장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겸하여, 경승지(景勝地)로 소문이 나면서
새롭게 변신하는 계기가 되었네.
그렇게 되어, 이 고장이
풍류를 즐기는 시인묵객(詩人墨客)들에
동경(憧憬)의 대상이 되었고
이와 같은 정자(亭子)들이
전국으로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정자를 함께한 산도 처음엔
봉황(鳳凰)이 날아와 앉은 모습 같다하여
<봉산(鳳山)>이라 불렀으나
소양정으로 하여
<봉황이 알을 품은 모습 같다>는
의미로 바뀌면서 <거동 儀(의)>자가
더 붙게 되면서 <봉의산(鳳儀山)>이 되었네.
그러한 역사를 이어오다
고려태조 23년(940년)에 오면서
<봄의 고을>인 <춘주(春州)>가 되었고
조선태종 13년(1413년)에 오면서는
그 아름다움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소양강의 봄>인 <춘천(春川)>이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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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연
사라지는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남아 있는 자들은 그 흔적 때문에 아픈 시간을 보낸다.
*
이곳에서 도를 닦던 네 마리의 이무기가 있었다. 때가 되어 세 마리가 폭포의 기암을 하나씩 뚫고 용으로 승천하였다. 그때 생긴 세 개의 구멍에 물이 고인 것이 삼부연이며, 마을 이름도 이무기가 용으로 변했다고 용화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행렬이 삼부연 폭포 옆을 지날 때 김중사가 해준 이야기다.
상우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 마리 이무기는 무슨 까닭으로 남았을까 궁금했다. 혹시 이 땅을 떠나지 못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뿌연 새벽안개 사이로 위병소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완전군장 차림의 군인들은 24시간 행군 끝에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왔다.
*
시외버스에서 내렸다. 피부를 자극하는 매서운 한기가 상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새삼 철원의 추위가 느껴졌다. 시외버스는 마지막 정류장인 와수리를 향해 남은 여정을 마치기 위해 서둘러 떠났다.
신철원시외버스터미널의 모습은 십 년 전이나 별반 다름이 없었다. 터미널 정면으로 외출 때 허겁지겁 배를 채우던 음식점은 간판만 바꾼 채 여전히 허기진 군인들을 기다리고 있고, 그 옆에 군인용품을 파는 가게도 그대로였다. 상우는 그 가게의 한쪽 다리가 불편한 주인도 그대로인지 궁금했다. 터미널 옆으로 24시간 편의점이 들어선 정도가 상우의 눈에 비친 변화의 전부였다.
물론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지역의 10년 동안의 변화에 비해 이곳이 더디게 바뀐 탓이리라. 상우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철원의 변화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래서 버스에서 내리면 낯선 곳에 떨어진 느낌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낯설음이 아니라 기억 속에 잠재된 익숙함의 감정이 먼저였다.
날씨 탓인지 아니면 지역의 특성인지,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한산했다.
십 년만에 느닷없이 철원에 왔다. 어제 종로의 지하도에서 신동호를 만나지 않았다면 상우는 지금 이 거리를 서성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금요일의 밤, 종로는 인파로 넘실거렸다. 상우는 술자리에 동참을 요구하는 동료들을 뿌리치고 지하도로 내려갔다. 연말이라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상우의 책상 위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이 주째 계속되는 야근이었다. 지난주는 토요 근무까지 하였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낮잠 한번 늘어지게 자리라고 다짐을 하며 종로타워 쪽 출구로 걸어 나갔다.
노숙인 몇은 벌써 널빤지 상자 몇 개로 밤새 추위와 맞설 준비를 끝내고 누워 있었고, 몇은 주억거리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지하도의 불빛 아래에서 그들은 움직임을 상실한 물체 같았다. 행인들도 그들의 정지된 자세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듯 멀찍이 떨어져 그들의 곁을 지나쳤다. 상우도 곁눈으로 그들을 살피며 빠른 걸음으로 그들의 곁을 지나쳤다. 상우가 출구 쪽 계단을 올랐다. 계단에 한 노숙자가 벽에 고개를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상우는 그 노숙인과 눈이 마주쳤다. 상우는 고개를 돌렸다. 그들과는 눈길도 마주쳐서는 안 되는 듯한,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었다.
상우는 몇 걸음을 가다가 멈췄다. 낯익음,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에 뒤를 돌아보았다. 상우는 노숙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분명 신동호였다.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이었지만 그 속에서 상우는 10년 전 신동호의 모습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신병장, 신동호!”
노숙인은 상우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아니면 모른 체하는지 한번 흘낏 보더니 그냥 외면해 버렸다.
“자네 나 모르나?”
“......”
“나 조하사야, 조상우.”
“알아.”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노숙인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런 몰골로 있는데 아는 척해서 뭐 할라고....”
노숙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하사, 나 술 한잔 사줘.”
그가 배낭을 메고 앞장서서 지하도의 계단을 올랐다. 상우는 그의 터덜거리는 신발 소리를 들으며 뒤를 따랐다.
신동호는 밥에는 거의 손대지 않고 술잔만 거푸 비웠다. 상우는 신동호의 앞에 놓인 빈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어떻게 지냈나?”
“이 꼴을 보고도 모르겠나?”
상우는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상우는 새삼 신동호의 외양을 다시 한번 살폈다. 수염이 입 주위와 턱을 촘촘히 메우고 있었고, 여러 겹으로 걸쳐 입은 옷은 땟국물이 줄줄 흘렀다.
“조하사는 어떻게 나를 한눈에 알아본 거야?”
입가에 묻은 술을 손으로 닦으며 신동호가 물었다.
“동긴데 어찌 모르겠나, 삼 년이나 같이 뒹군 사인데.”
“그랬군, 삼 년이나 같이 뒹군 사이군.”
신동호가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시절로 돌아가면 행복할 수 있을까?”
상우는 신동호의 말을 듣고 그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단편 단편의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그 시절로 돌아간대도 그리 행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곳에 가 볼까?”
말을 꺼내 놓고는 왜 이런 제의를 했는지 상우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상우가 잠시 후회하고 있을 때 신동호가 선선히 말을 받았다.
“그래, 한번 가 보자.”
토요일 아침, 단잠을 깼을 때, 상우는 또 한 번 자신의 제안을 후회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걸음으로 동서울버스터미널로 나왔다.
외투깃을 세우고 칼바람 속에서 한 시간 남짓 기다렸지만 만나기로 한 장소에 신동호는 나오지 않았다. 상우는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기왕 나온 걸음이니 혼자라도 가 보자 하고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을 떠난 버스는 의정부를 지나 포천으로 들어섰다. 차창에 그려진 풍경은 도시와는 사뭇 다른 살풍경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 풍경에 익숙해질 즈음에 차는 철원에 도착했다.
상우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조금 떨어진 버스 정류장에서 다시 버스를 기다렸다. 지경리까지 가야 한다.
“지경리 가는 버스는 언제 옵니까?”
정류장 앞 가게 할머니가 돋보기안경을 올리며 버스 시간표를 살폈다.
“열두 시 이십 분이니까, 좀 있으면 오겠네.”
상우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따뜻한 캔 커피 하나를 사서 가게를 나왔다.
군용트럭 하나가 찬바람을 일으키고 도로를 질주했다. 트럭 뒷좌석에 한 무리의 군인들이 방한모를 깊게 눌러쓰고 앉아 있었다.
십 년 전, 사단 훈련소에서 자대로 오던 날이 생각났다.
군용트럭을 타고 있는 병사들은 군용더플백을 두 다리 사이에 끼운 채 말이 없다.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가득 찬 눈빛들이다. 상우는 곁에 앉은 신동호를 본다. 무표정이다. 대대를 거쳐 중대로, 소대에 이르기까지 상우와 신동호는 같이 있다.
소대에서 첫 밤을 보낼 때 신동호가 상우에게 말한다.
“열심히 버텨보자.”
지경리행 버스가 상우 앞에 멈춰 섰다. 상우가 버스에 올랐다. 할머니 두 분이 앞쪽 좌석에 앉아 있었고, 맨 뒷좌석에 젊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자줏빛 외투의 여인은 시선을 창밖에 두고 있었다.
상우는 버스 중간의 좌석에 앉았다. 버스는 다시 움직였다.
차창으로 흰 들판이 스크린처럼 지나갔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은 여전히 들판을 흰 색깔로 덮고 있었다. 눈이 덮여 있어도 메마른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풍경이었다.
부대 앞에서 버스가 멈췄다. 상우가 버스에서 내렸다. 뒤를 이어 자줏빛 외투의 여인도 내렸다.
위병소의 초병에게 면회를 왔다고 하니 초병이 소속과 이름을 물었다. 상우는 잠깐 생각을 하다가 김중사의 이름을 댔다.
“일 중대 김주은 중사.”
위병소의 초병은 면회 장부에 이름을 적고, 위병소 뒤의 면회소에서 기다리라 상우에게 말했다.
상우가 돌아설 때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줏빛 외투의 여인과 눈이 잠깐 마주쳤다. 여인에게서 분 냄새가 났다. 여인은 고개를 숙여 눈길을 피했다. 상우는 여인을 스치고 지나쳐 면회소로 발길을 옮겼다.
면회소 안에는 4인용 탁자가 좌우로 열을 지어 놓여 있었다. 탁자 세 개는 이미 면회객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상우는 구석의 빈 탁자에 앉았다. 잠시 후 자줏빛 외투의 여인이 들어왔다. 그 여인은 상우의 앞쪽에 앉았다. 상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의 화장품 냄새를 떠올리며 김중사를 기다렸다.
*
김주은 중사, 그는 일 중대 삼 소대의 선임하사다.
고향이 문경이라 했다. 공고를 졸업하고 주물공장에서 일을 하다 입대한 그는 재워주고 먹여주고 게다가 월급까지 주는 군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는 좀처럼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명절이 되어도 고향에 갈 생각도 않고 부대에 남아 소일을 했다.
상우의 눈에 비친 김중사는 좀처럼 가만히 있는 법이 없었다. 며칠 동안 땡볕에서 웃통을 벗고 대패질과 망치질을 하던 그는 소대의 총기 거치대를 만들어냈다. 고물상에서 주워온 몇 개의 파이프는 그의 손을 거치자 텔레비전대로 변신했다.
상우와 동호가 소대로 전입하던 날, 김중사는 둘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했다.
“조금 고생은 될 거다. 부모님 생각하며 견뎌라. 그렇게 조금만 세월을 보내면 이곳 생활이 몸에 익을 거다. 그러면 곧 제대할 날이 온다.”
검은 피부에 흰 이를 드러내고 김중사가 말했다. 잔잔히 웃음을 지을 때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삼 소대 소대장은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ROTC출신의 중위였다. 그는 소대 일의 대부분을 김중사에게 맡겼다.
김중사는 소대장의 지시를 무리 없이 수행했다. 오히려 소대장보다 더 효과적으로 소대를 이끌었다. 소대원들은 소대장보다는 김중사와 더 친밀감이 높았다. 그는 병사들에게 엄한 아버지이자 다정한 친구였다.
상우가 일병 진급을 앞둔 어느 날, 김중사가 소대의 선임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선임하사라는 직책은 참 애매한 직책이야. 처음 군에 들어온 졸병들에게 다가서기 어려운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그 병사가 군 생활에 적응이 되어 제대할 무렵이면 친한 친구가 되거든. 그러면 그 친구는 떠나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맞아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하지.”
상우도 이 과정을 그대로 거쳤다. 상우는 상병 때 분대장 교육을 들어갔다. 4주간의 교육을 받고 하사 계급장을 달고 돌아온 상우는 초록색의 견장을 하고 분대장 역할을 수행했다.
김중사와 상우의 관계는 상우가 일반병이었을 때보다 더욱 가까워졌다. 휴일이면 김중사는 상우와 함께 종종 외출을 하곤 했다.
그때 상우는 알았다. 김중사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다방 종업원이었다. 김중사가 그녀에 대해 자세한 것은 이야기해 주지 않아 알 수는 없었으나, 전방 부대 인근에 있는 다방 종업원의 신산한 인생 역정은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겉모습에서 그러한 고생의 흔적은 쉽게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쾌활한 여자였다. 가슴 속의 상처를 숨기려는 과장된 행동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녀는 작은 일에도 소리를 내어 깔깔거리며 웃었다.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웃음이었다. 여자가 웃으면 김중사는 그녀를 보고 연신 싱글거렸다. 그럴 때의 김중사의 표정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