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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장 프랑스 공포 시대와 그 원인
16세기에 이르러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을 백성에게 공개하며 이를 유럽 각국에 보급시키고자 하였다. 어떤 나라들은 그것을 하늘에서 온 사자로 기쁘게 환영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나라들에서는 성경의 빛을 완전히 배척하였다. 한 나라에서는 여러 세기 동안 진리와 오류가 서로 지배권을 갖고자 다투었다. 그러다 악이 승리하여 하늘의 진리가 밀려나게 되었다. 악을 제어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멸시한 백성으로부터 떠나가셨다. 그리하여 세계는 고의적으로 빛을 거절한 결과를 보게 되었다.
https://youtu.be/KdP71HkGu20
여러 세기 동안 프랑스에서 계속된 성경 배척 운동은 프랑스 혁명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처럼 무서운 혁명이 일어난 것은 로마 교회가 성경을 억압함으로 빚어진 당연한 결과였다. 그 혁명은 로마 교회의 가르침이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뚜렷한 예증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죄악의 사람”의 통치로 말미암아 특히 프랑스에서 일어날 무서운 결과를 예언하고 있다.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곳이라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계 11:2, 3, 7, 8, 10, 11).
여기에 기록된 “마흔두 달” 혹은 “천이백육십 일”은 같은 기간을 말하며, 그리스도의 교회가 로마 교회의 핍박을 받는 기간을 나타낸다. 1,260년은 기원후 538년에 시작되어 1798년에 끝났다. 그 기간이 끝나는 1798년에 프랑스 군대가 로마에 침입하여 교황을 사로잡았는데 그는 유배 중에 죽었다. 얼마 후에 새 교황이 선출되었으나 로마 교회는 전과 같은 세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교회의 박해는 1,260년 내내 계속되지는 않았다.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종교 개혁의 영향을 통하여 그들이 당하는 극심한 시련의 시기를 단축하셨다.
두 증인은 신구약 성경을 대표한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의 율법의 기원과 영속성을 알려 주며 구원의 계획을 증거 하는 중요한 증인들이다.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하리라.” 성경을 박탈당하고 성경의 증거가 곡해되었을 때 성경의 거룩한 진리를 담대하게 전하던 자들이 배신당하고 순교당하고 추방당했을 때 그 충성된 증인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였다. 가장 어두운 시기에 충성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 할 지혜와 권세를 받았다(부록 참조).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계 11:5).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는 자들은 벌을 면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거나 명령하신 것은 어떤 방식으로도 변경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시고자 함이다. 이 엄숙한 선언은 하나님의 율법을 경시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들이 그 증거를 마칠 때” 곧 그 두 증인이 비밀리에 그들의 사업을 마쳐 갈 때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으로 표상된 세력이 그들과 싸움을 하게 될 것이었다. 여기서 사탄의 세력이 새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로마 교회는 성경을 존중한다고 공언하면서도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성경을 제시함으로 대중이 접근할 수 없도록 하였다. 로마 교회의 지배 아래 그 증인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이제 또 다른 세력 곧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여 공공연하게 싸우고자 일어났다.
죽임을 당한 증인들의 시체가 거리에 놓여 있는 그 큰 성은 “영적으로” 애굽을 가리킨다. 성경의 역사에 나타난 모든 나라 가운데 애굽처럼 대담하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분의 명령을 거역한 나라는 없었다.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라고 한 바로처럼 하나님 앞에 오만하고 반역적인 왕은 없었다. 이것은 무신론 사상이다. 그러므로 애굽으로 표상된 나라는 그와 유사하게 하나님을 부인하는 말을 하고 불신과 반역의 정신을 나타낼 것이다.
“큰 성”은 “영적으로” 소돔에 비유되었다. 소돔은 특별히 음란이 그 특징이었다. 그러므로 이 죄가 성경 예언을 성취시킬 나라의 특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선지자의 말에 따르면 1798년이 되기 전에 어떤 극악한 세력이 일어나 성경에 대항하여 싸우게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두 증인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그 나라에서 바로의 무신론과 소돔의 음란이 나타날 것이었다.
분명한 예언 성취
이 예언은 1793년 프랑스 혁명 기간에 그 나라에서 가장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세계 역사에서 프랑스는 의회의 결의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 유일한 나라이다. 수도인 파리의 모든 시민 그리고 나라 곳곳에서 남녀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이 그 선언을 수락하고 기쁨으로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프랑스는 소돔의 특성을 현저하게 드러냈다. 역사가는 예언에 기록된 그대로 프랑스의 무신론과 부도덕한 모습에 대해 기록했다. “종교에 영향을 미친 법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결혼 관계의 경시였다. 사람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계약이며 사회의 안정에 가장 강력한 역할을 하는 결혼 제도가 당사자 두 사람이 마음대로 결합하거나 헤어질 수 있는 일시적인 성격의 단순한 민간 계약으로 전락하였다. …풍자적인 말을 잘하기로 유명한 여배우 소피 아르누(Sophie Arnoult)는 프랑스 혁명 시대의 결혼을 ‘간음의 예식’으로 묘사하였다.”
그리스도께 대한 적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라는 예언 역시 프랑스에서 성취되었다. 이 나라만큼 진리를 잔인하게 반대한 나라는 없었다. 프랑스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는 명분으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핍박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여러 세기에 걸쳐 성도들이 피를 흘렸다. 왈덴스 교도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위하여” 피에몽 계곡에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을 때 프랑스에서는 그들의 형제인 알비젠스인들이 진리에 대하여 동일한 증거를 나타냈다. 종교 개혁 당시에 그들은 참혹한 고문으로 죽어 갔다. 왕과 귀족들과 상류층 부인들과 젊은이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용감한 위그노들은 치열한 전쟁터에서 피를 흘렸다. 개신교도들은 들짐승처럼 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18세기에 프랑스에 남아 있던 소수의 초기 그리스도인 후예들은 남부 지역의 산속에 숨어서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밤에 비밀리에 산 중턱이나 인적 없는 들판에서 집회를 열다가 갑자기 습격을 받고 붙잡혀서 평생 동안 노를 젓는 노예가 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 가장 고상하고 지성적인 사람들이 강도와 살인자의 무리와 함께 쇠사슬에 매여 무서운 고통을 겪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은 채로 참혹하게 총살을 당하였다. 수백의 나이 많은 남자들, 아무런 방비가 없는 여자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집회 장소에서 살해되어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들이 집회를 하던 산 중턱이나 숲속을 지날 때 시체들이 풀밭 사방에 흩어져 있거나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 나라는 칼과 도끼와 화형을 위한 장작으로 황폐해졌고, “하나의 거대하고 음울한 광야로 변해 버렸다.” “이처럼 흉악한 일들은…암흑시대에 행해진 것이 아니라 루이 14세의 찬란한 번영의 시대에 일어났다. 당시는 과학이 발달하고 인문학이 꽃피던 시대였으며, 궁궐과 도시에 사는 성직자들은 유식하고 유창한 연사들로서 온유하고 자비한 미덕으로 크게 인정받는 사람들이었다.”
가장 무서운 범죄
각 시대를 통하여 자행된 잔인한 일 가운데 가장 끔찍한 만행은 성 바돌로매 제일(祭日)의 대학살이다. 오늘날 세상은 그 잔인하고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습격의 광경을 공포와 전율로써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왕은 로마 교회의 고위층과 사제들의 강요로 그 흉악한 행위를 묵인하였다. 한밤중에 울려 퍼진 큰 종소리는 대학살의 신호였다. 왕의 명예를 건 약속을 믿고 집에서 평안히 자고 있던 수천 명의 개신교도가 끌려 나가 살육을 당하였다.
학살은 파리에서 7일간 계속되었다. 왕의 명령에 따라 개신교도들이 거주하는 모든 도시와 시골로 살육은 확대되었다. 그 일은 연령과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순진한 어린아이들과 백발 노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귀족과 농부, 노인과 젊은이, 어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죽임을 당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학살은 2개월간 계속되었으며 국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7만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학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성직자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로렌의 추기경은 그 소식을 전한 사람에게 1천 크라운의 상금을 주었고, 성 안젤로에서는 축포를 쏘았다. 모든 교회의 첨탑에서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밤새도록 축제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추기경과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을 데리고 큰 행렬을 지어 성 루이 성당으로 갔으며 그 곳에서 로렌의 추기경은 테 데움(Te Deum ‘오 하느님 당신을 찬미합니다’라는 뜻의 거룩한 삼위일체 찬양)을 낭송했다. …또한 이 학살을 기념하는 메달이 주조되었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카알 황제에게 황금 장미를 보냈으며…프랑스의 한 신부는 그 학살의 날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그날에 가장 거룩한 신부가 무한한 행복과 기쁨으로 보고를 받았으며, 그는 위엄을 갖추고 하나님과 성 루이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나아갔다.’”
성 바돌로매 대학살을 충동한 바로 그 정신이 프랑스 혁명에도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기꾼이라고 선언하면서 프랑스의 무신론자들은 소리를 높여 “쓸모없는 자를 박멸하자.”라고 부르짖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한 모독과 가증한 죄악이 서로 손을 맞잡았다. 이런 모든 일을 통하여 사탄에게 최고의 존경이 주어졌고, 진리와 순결과 이타적인 사랑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계 11:7). 프랑스 혁명과 공포 시대 동안 프랑스를 지배한 무신론 세력은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대항하여 싸웠다. 의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금했다. 성경이 공중 앞에서 불태워졌다. 하나님의 율법은 유린당하고 성경에 명시된 제도들은 폐지되었다. 매 주일의 휴일은 무시되고 그 대신 10일마다 휴식했는데 그날은 부도덕한 축제의 날이 되었다. 침례식과 성찬식은 금지되었고, 묘지에는 “사망은 영원한 잠”이라는 표지가 붙여졌다.
자유와 국가를 예배하는 일 이외의 모든 종교적 예배가 금지되었다. “파리의 한 주교는 국민 대표들 앞에 가장 불경하고 추잡한 연극의 주연 배우로 출연하였다. …그는 앞에 나와서 회중을 향하여 선언하기를 자신이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가르친 신앙은 모두가 역사와 거룩한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일종의 속임수였다고 말했다. 그는 엄숙하고 솔직한 말로 하나님의 실존을 부인했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계 11:10). 무신론 예찬자인 프랑스는 하나님의 두 증인의 책망을 침묵시켰다. 진리의 거룩한 말씀은 시체가 되어 길거리에 쓰러졌고, 하나님의 율법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기뻐 날뛰었다.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하늘의 왕을 모독하였다.
담대한 모독
새로운 제도에 의하여 임명된 한 수도승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참람된 말을 하였다. “하나님이여, 만일 당신이 참으로 존재한다면 당신의 이름을 모독한 내게 복수해 보라. 나는 당신이 도전해 오기를 바란다. 당신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 감히 노하지는 못하는도다. 이제 후로 누가 당신의 존재를 믿겠는가?” 그것은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들으리오 여호와는 나의 알 바 아니라”(출 5:2)라고 한 바로의 말이 그대로 반향된 것이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를 왜곡시키는 자들에 대하여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딤후 3:9)라고 말씀하신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을 거절한 지 얼마 후에 프랑스는 이성(理性)의 여신을 숭배함으로 우상 숭배로 전락하였는데 방탕한 한 여자가 그 여신이 되었다. 이 일은 국가의 대표적인 집회 곧 의회에서 이루어졌다. 한 역사가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광란의 시대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그처럼 유치한 의식을 행한 일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음악단을 선두에 세우고 도시의 관리들은 활짝 열린 의회의 문을 통과하여 엄숙한 행렬을 지어서 들어갔다. 자유의 노래를 부르며 그들은 바야흐로 경배하려는 대상 곧 이성의 여신이라고 부르는 면사포를 쓴 한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 행렬이 식장 안으로 들어서자 이성의 여신은 면사포를 벗어 그것을 의장의 오른편에 두었다. 그 여자는 오페라단에서 춤추는 젊은 여자에 불과했다.”
이성의 여신
“이성의 여신 제막식은 전국에 보급되었고, 혁명 세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든 그것을 재연하거나 모방하여 거행하였다.”
이성의 여신이 의회에 들어오자 사회자는 그 여신의 손을 잡고 회중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 당신들의 공포심이 만들어 낸 무력한 하나님의 진노 앞에 더 이상 떨지 마십시오. 이제부터 이성 외에 아무것도 신으로 인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이성의 가장 숭고하고 순결한 모습을 보여 드립니다. 여러분이 우상을 가지고 싶다면 이와 같은 우상에게만 제사를 드리십시오. 자, 이성의 여신 제막식을 자유의 의회 앞에서 거행합니다.”
“여신은 의장의 포옹을 받은 후 화려한 수레에 태워졌고, 많은 군중 사이를 통과하여 노트르담 성당으로 인도되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 높은 제단 위에 앉아 참석한 모든 자의 경배를 받았다.”
프랑스를 무신론 국가로 만들어 급속히 멸망으로 이끈 것은 로마 교회가 시작한 일이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무서운 상태를 기술한 한 저자는 왕과 교회가 그 극단적인 행동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였다(부록 참조). 엄격히 말해 그 책임은 교회에 있었다.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은 종교 개혁은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하는 불화의 요소라고 말함으로써 왕들을 자극하였다. 왕을 통해 가장 비참하고 잔인하며 견딜 수 없는 압제와 박해가 가해진 것은 로마 교회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복음이 전파된 곳이면 어디서나 사람들의 마음이 각성되었다. 그들은 무지와 부도덕과 미신에 사로잡힌 속박을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왕들은 그러한 일들을 보고 자신들의 세력이 약화될까 두려워 떨었다.
로마는 왕들의 질투심에서 나온 공포심을 자극하는 데 지체하지 않았다. 1525년에 교황은 프랑스의 통치자에게 말하였다. “이 광신자(개신교를 가리킴)들은 종교계를 혼란케 하고 파괴할 뿐 아니라 나라의 통치권, 귀족 계급, 법률, 질서, 계급 등을 파괴하는 자들이다.” 또한 몇 년 후에 교황의 사절은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폐하, 속지 마십시오. 개신교인들은 종교의 질서는 물론이요 국가의 질서도 모두 전복시킬 것입니다. …왕위도 교회의 제단과 마찬가지로 위험합니다. …새 종교가 들어오면 새 정부가 필연적으로 들어설 것입니다.” 결국 로마 교회는 프랑스가 종교 개혁을 반대하도록 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성경의 교훈은 사람들의 마음에 국가 번영의 기초가 되는 공의와 절제와 진리의 원칙을 심어 준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잠 14:34; 16:12).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은 국가의 법률도 존중할 뿐 아니라 성실하게 순종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정당하고 합법적인 권위를 지닌 나라의 왕을 공경하게 된다. 프랑스는 불행하게도 성경을 금지하였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파문하였다. 여러 세기에 걸쳐 원칙과 신조에 굳게 선 사람들, 지성과 도덕적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 자기 양심을 거스르지 않고 진리를 위하여 고난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믿음과 용기의 사람들이 갤리선의 노예로 고역을 당하거나 화형에 처해지거나 감옥 속에서 고초를 겪었다. 이로써 수많은 사람이 종교 개혁이 시작된 후 250년간 안전을 찾아 프랑스를 떠나갔다.
“박해자들의 광적인 분노를 피해 떠나온 복음의 사도들은 그들의 뛰어난 지성과 예술과 공업과 질서 있는 생활 등을 통하여 그들이 피난해 온 그 지방을 번영케 하였다. …이와 같이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이주해 갈수록 프랑스는 그런 재능 있는 사람들을 점점 잃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들이 모두 프랑스에 남아 있었다면…만약 그들의 지혜로써 의회를 지도하고, 그들의 용맹으로 싸우고, 그들의 공의로 나라의 법률을 제정하고, 성경의 종교로 백성의 지능을 계발시켰더라면 오늘날 얼마나 찬란한 영광이 프랑스를 두르고 있었을 것인가? 그러나 맹목적이고 완고했던 프랑스는 모든 덕망 있는 교사들과 질서를 잘 지키는 우수한 사람들과 왕위를 충성스럽게 옹호하던 사람들을 나라 밖으로 추방하였다. 마침내 국가의 쇠퇴는 극에 달하여 추방될 만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었는데 화형주로 끌려갈 만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없었고, 나라 밖으로 추방할 만한 애국자들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무서운 혁명이 일어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실을 거둠
“위그노 교도들이 도피하자 프랑스는 전반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번영하던 생산 도시들이 타락한 도시로 전락하였다. 혁명이 일어나던 당시에 파리에서는 약 20만 명의 거지가 왕에 의해 구제받고 있었다. 쇠퇴하여 가는 나라에서 제수이트당원들만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온 나라를 무정부 상태와 파멸로 이끌어 간 그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성직자와 왕과 입법자들은 해결할 수 없었다. 오직 복음만이 그것을 치료할 수 있었다. 로마 교회의 지배 아래 있던 백성은 구주께서 가르쳐 주신 자아 희생과 이타적인 사랑의 귀한 교훈을 잊어버렸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여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았고,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고역과 압박에 대하여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부요하고 권세 있는 자들의 이기심은 점점 더 커졌고 그들은 약한 자들을 더욱 억압하였다. 여러 해 동안 귀족들은 탐욕과 방탕의 삶을 일삼으며 농민들을 약탈하고 착취하였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를 증오했다.
귀족들이 모든 토지를 차지하였고, 노동자 계급은 지주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그들의 무리한 요구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가와 교회의 집권자들은 중류와 하류층 사람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다. “귀족들은 쾌락을 최고로 생각하였고, 농부들과 하층민들이 굶어 죽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농부들의 생활은 실로 끊임없는 수고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들이 불만을 표하면 태만으로 여기고 무시하였다. 법정은 언제나 농민들의 호소보다 귀족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평민들은 한편으로는 세속적 권력자들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바쳤는데 그 세금의 절반 이상이 왕실이나 교회의 금고로 들어가는 대신 권력자들의 방탕한 삶에 사용되었다. 동족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지배자들은 오히려 세금을 면제받았고, 국가의 법과 관례에 따라 관직에 따른 권리만을 행사하였다. 이와 같은 특권 계급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사람들은 절망적이며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부록 참조).
루이 15세는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반세기 이상을 왕위에 있었다. 그는 나태하고 경박하고 음란한 왕으로 유명하였다. 국가의 재정적 곤란과 백성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선지자적 안목이 아니라도 무서운 폭풍이 몰려오고 있음을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다. 개혁의 필요를 아무리 역설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프랑스에 다가오고 있는 운명은 왕의 나태하고 이기적인 대답 곧 “재앙은 나의 죽은 뒤에”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었다.
로마 교회는 왕들과 지배 계급이 백성을 노예 상태로 묶어 두도록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나라가 약화되면 백성과 통치자들을 모두 교회의 지배 아래 속박하고자 의도한 것이었다.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노예 상태에 묶어 두려면 그들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로마 교회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정책의 결과로 초래된 것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천배 이상 무서운 도덕적 타락이었다. 성경은 박탈되었고, 이기심에 사로잡힌 지도자들의 통치하에 백성은 무지와 미신과 악습에 빠져 완전히 자제력을 잃게 되었다.
피로써 거둔 결과
그러나 이 모든 결과는 로마 교회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로마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리에 맹종하도록 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교도와 혁명가들을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로마주의를 성직자의 속임수로 경멸했다. 그들이 알았던 유일한 신은 로마 교회의 하나님이었다. 그들은 로마 교회의 탐욕과 잔인성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경을 매우 무익한 책으로 여겼다.
로마 교회가 하나님의 품성과 그분의 율법을 왜곡시켰으므로 사람들은 성경과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을 동시에 거절하였다. 볼테르(Voltaire)와 그의 동료들은 성경을 완전히 무시하고 무신론 사상을 퍼뜨렸다. 로마 교회는 쇠발굽으로 백성을 짓밟았다. 그런데 이제는 대중이 타락하고 사나워져서 로마 교회의 학대에 저항하였고 그들이 만든 모든 속박을 끊어 버렸다. 그들은 분노한 나머지 진리와 오류를 모두 거절하였다.
혁명 초기에는 왕의 양보로 민중의 대표자들이 귀족과 성직자들의 수를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리하여 세력의 균형에 있어서 백성이 우세했지만 그들은 그 힘을 지혜롭고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하였다. 분노한 민중은 그들을 곤경에 빠뜨린 장본인들로 생각되는 지배 계급에 보복하기로 결심하였다. 압제받던 자들은 억압 아래서 경험한 그대로 그들을 억압해 온 자들을 압제하게 되었다.
불행한 프랑스는 자신이 심은 씨앗을 피로써 거두었다. 프랑스가 로마 교회의 영향을 받아 종교 개혁 초기에 처음 화형주를 세웠던 그곳에 프랑스의 혁명당원들은 그들의 최초의 단두대를 세웠다. 16세기에 개신교 신앙을 가진 최초의 순교자들이 화형 당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18세기 최초의 희생자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프랑스는 자기 나라를 치료해 줄 복음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무신론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을 열게 되었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재를 무시해 버릴 때 인간의 법률로는 인간의 정욕이라는 강력한 세력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입증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반란과 무정부 상태로 휩쓸려 들어갔다. 성경에 대항하여 벌인 이 싸움은 세계 역사에서 공포 시대라는 뚜렷한 한 시대를 초래하였다. 평화와 행복이 사라졌다. 안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늘의 승리자가 다음 날에는 혐의를 받고 정죄를 받았다. 포악과 음란이 극에 달하였다.
왕과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흥분하여 미쳐 날뛰는 군중의 잔인한 행동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그들은 한층 더 자극되어 왕을 처형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자들도 오래지 않아 왕의 뒤를 이어 단두대로 끌려갔다. 혁명을 반대하는 혐의를 받은 자들은 다 살육되었다. 도시마다 무서운 사건들이 일어났다. 혁명주의자들 내에 분열이 일어났고 프랑스는 싸우는 군중으로 인해 하나의 커다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서로 싸우는 군중의 분노와 격정이 온 세상을 뒤흔들었다. “파리에서는 소동이 잇달아 일어났고, 시민들은 여러 당파로 나누어져서 서로 죽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라는 거의 파멸 상태에 이르렀고, 군인들은 급료 지불이 지연됨으로 인해 소동하였으며, 파리 시민들은 굶어 죽어 갔다. 각 지방은 무장한 강도들에 의해 황폐화되었고, 그동안 이루어 놓은 문명은 무정부 상태와 백성의 방종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었다.”
사람들은 로마 교회가 반복해서 가르쳐 온 잔인성과 고문을 그대로 따랐다. 옥에 갇히고 화형주에 달리는 사람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되었다. “프랑스에 있는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이 여러 세대에게 집행해 온 박해가 이제는 자신들에게 매우 혹독하게 되돌아왔다. 단두대는 신부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한때 위그노 신도들로 채워졌던 갤리선과 감옥들이 이제는 그들을 핍박하던 자들로 채워졌다.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은 의자에 매인 채 노를 젓는 형벌을 당하며 그 교회가 소위 이단이라고 부른 사람들에게 행했던 그 형벌을 이제 자신들이 받게 되었다”(부록 참조).
“도처에 정탐꾼들이 잠복해 있고, 단두대에서는 매일 아침 여러 시간에 걸쳐 잔인한 일들이 일어나고, 노예선과 감옥에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하수구…피로 물들어 센(Seine)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그런 시대가 왔다. …길게 줄지어 선 죄수들은 풀이 베이듯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사람이 가득 탄 거룻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서 그들을 몰살하기도 하였다. 그 무섭고도 지긋지긋한 공포 정치 아래 살육을 당한 청소년들도 수백 명에 달하였다. 군인들은 젖먹이들을 그 어머니들의 젖가슴에서 떼어 내어 창끝에 꽂아서 이 창에서 던지면 저 창으로 받아 꽂는 일도 하였다”(부록 참조).
이 모든 일은 사탄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의 정책은 기만이며 그의 목적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욕되게 함으로써 그분의 자비와 인애의 거룩한 목적을 방해하여 하늘에 슬픔을 주는 것이다. 사탄은 기만적인 술책으로 모든 불행을 창조주의 계획의 결과인 것처럼 보이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비난하게 만든다. 로마 교회의 기만이 드러나자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종교는 거짓이며 성경을 우화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도록 충동하였다.
치명적 오류
프랑스 국민이 이와 같은 치명적인 잘못을 범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참자유가 있다는 위대한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사 48:18).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거절하는 자들은 각 나라의 역사에서 그것을 배우게 된다.
사탄이 로마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만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의도를 숨겼다. 그는 부패와 불행이 범죄의 결과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그의 일을 아주 교묘하게 가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목적이 완전히 성취되지는 못하였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들이 당하는 비참한 일들의 원인을 깨닫지 못하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 하나님의 율법은 의회에서 공공연히 무시되었다. 그 후에 계속된 공포 시대를 통하여 사람들은 그들이 당한 불행의 원인과 결과를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프랑스가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부인하고 성경을 거절하였을 때 사탄과 그에게 속한 악인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계획한 대로 하나님의 율법의 제재를 받지 않는 나라를 세운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악한 일에 대한 심판이 속히 이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데 마음이 담대하”(전 8:11)게 되었다. 하지만 공평하고 의로운 율법을 범하면 필연적으로 파멸이 초래된다. 여러 세기 동안의 불순종과 죄악이 심판 날에 받을 진노를 쌓고 있었다. 잔인한 사탄의 세력을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의 떠나가고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는 사탄은 마음대로 활동하게 되었다. 반역을 선택한 자들은 무서운 죄악이 땅에 충만해질 때까지 반역의 결실을 거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황폐한 지방과 폐허가 된 도시들로부터 쓰라린 고통의 부르짖음이 울려 퍼졌다. 프랑스는 마치 지진이 발생한 것처럼 흔들렸다. 종교, 법률, 사회적 질서, 가정 제도, 국가, 교회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적한 불의한 손에 의해 파괴되었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의 참람된 세력에 의해 살해된 하나님의 충성된 두 증인이 언제까지나 잠잠하지 않을 것이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계 11:11). 성경을 금지하는 법이 프랑스 의회를 통과한 때가 1793년이었다. 그러나 3년 반 후 그 결의를 무효로 한다는 결의가 동일한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사람들은 미덕과 도덕의 기초로써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이 참으로 필요한 일임을 인정하였다.
두 증인에 대하여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계 11:12). “하나님의 그 두 증인”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높임을 받았다. 1804년에 영국 성서공회가 조직되고 이어서 유럽 대륙에 이와 유사한 조직체들이 생겼다. 또한 1816년에는 미국 성서공회가 세워졌다. 이제 성경은 수백 개의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되었다(부록 참조).
1792년 이전에는 외방 선교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엽이 되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이성주의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와 체험 종교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외방 선교 사업이 크게 발전하였다(부록 참조).
인쇄술의 발달은 성경 보급에 활력을 주었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문호가 개방되었고 이전부터 내려오던 편견과 쇄국주의의 담이 무너졌다. 교황이 세속적 권력을 잃어버리게 되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오늘날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성경이 보급되고 있다.
일찍이 무신론자 볼테르는 다음과 같이 장담하였다. “12명의 사람이 그리스도교를 세웠다는 말을 나는 지겹도록 들었다. 그러나 이것을 무너뜨리는 데는 오직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나는 증명할 것이다.” 그가 죽은 후 여러 세대가 지났다. 수백만의 사람이 성경을 대적하는 싸움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성경을 멸할 수는 없었다. 볼테르 시대에 성경이 백 권 있던 곳에 오늘날에는 10만 권이 있다. 초기의 한 종교 개혁자는 “성경은 마치 쇠망치를 닳게 만든 모루와 같다.”라고 기록하였다.
사람의 권위 위에 세워진 것은 무엇이나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은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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