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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에서 만난 예수님
요한복음 4 : 3-14, 39-42
의양동연 아학 기도회2018.08.21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셔서 수가라고 하는 한 마을을 구원하신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을 (정오의 땜볕이 쏟아지는)사마리아 수가마을의 어구에 있는 한 우물가로 인도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 가셔서 하신 일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까 불렀던 복음성가를 다시 한 번 부르겠습니다.
<G. S>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자는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예수님」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사마리아라고 하는 지역은 역사적으로 슬픈 사연을 간직한 곳입니다. 때는 기원전 721년 앗수르 나라가 북 왕국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점령하고 단일민족인 이스라엘을 혼혈민족을 만들기 위하여 27,290명을 강제로 끌어갔고 앗수르 나라는 약3만 명의 앗수르 사람을 이스라엘 나라 사마리아에 이주시켜서 혼혈족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 126년이 지나 주전586년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여 포로로 끌려가서 70년이 지나서야 본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70년 만에 돌아와서 본 예루살렘은 황폐되어 참으로 낙심천만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스룹바벨과 에스라 선지자의 외치는 말씀에 힘을 입어서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중건하고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공사에 참여하겠다고 하였지만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하지 않고 개만도 못한 너희들을 어떻게 거룩한 성전 공사에 참여시킬 수가 있느냐 면서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사마리아는 그 후 남북한이 통일이 되었어도 동족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버림받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보면 외면을 하고 이스라엘의 남부 예루살렘 지역에서 북부 갈릴리 지역으로 갈려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이 보기 싫어서 동쪽으로 돌아서 요단강을 건너 북으로 올라가 다시 요단강을 건너 갈릴리로 갔습니다. 하루 이틀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3~4일씩 걸려서 갔습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을 상종하지 않고 자신들만이 살아갈 수 있는 자구책을 강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사마리아 지역을 찾아 가셨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하고 버림받은 사마리아를 예수님이 찾아가신 것입니다.
(눅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잘 나타내 주고 있고 주님은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의 만남은 사마리아 전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버림받고 소외당한 곳의 한 여인이 주님을 만남으로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절망가운데서 소망이 생겼고 멸망가운데서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을 받고 여리고성을 정탐하러 갔던 살몬과 그므엘은 라합이라는 여인을 만나서 여리고성 함락을 성공할 수가 있었던 것처럼 수가 마을뿐만이 아니라 전 사마리아가 이 여인 때문에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수가 마을의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를 좀 더 자세하게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수가 성 앞 우물가로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정오에. . . .
(1) 이 여인은 부도덕한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여자가 아니고 남의 남편과 사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남의 눈을 의식해서 남들이 물 긷는 저녁 서늘한 때가 아닌 한낮에 물을 긷게 되었습니다.
(2)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와 무시를 당하면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자이기에 어느 누구 하나 그 사람을 상종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비웃고 침 뱉으며 멸시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누구에게 하소연 할 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산헤드린의 공회원이나 로마의 관료가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고 사회에서 소외당한 이 여인이 예수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이 여인을 기다렸습니다. 마치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와 같이 예수님은 이 한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머나먼 사마리아를 오시게 된 것입니다.
(3)이 여인은 향락주의 자였습니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남의 가정을 파괴시키는 여자입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인데 이 여인이 바로 있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사회악이요 기생충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육신의 향락으로 살아가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2.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요구한 것은 다만 갈증을 면하기 위해서 요구한 것만은 아닙니다. 더 큰 생수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요구 사항은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더 풍성한 것, 더 훌륭한 것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에 사는 가난한 과부에게 가서 물을 좀 달라고 하시고 또 떡을 좀 달라고 한 것은 앞으로 닥칠 3년 반 동안의 기근을 면케 해 주는 축복을 주기 위함인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율례와 계명과 법도를 지켜 행하는 자에게 하늘의 신령한 축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을 주신다 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를 요구하시는 것도 더 큰 축복과 더 큰 풍성함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신 것도 “그리하면 황충을 금하며, 밭의 소산물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창고가 차고 넘치도록 부어 주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드리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을 드리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드리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술과, 재능과, 지혜와, 지식까지도 드리기를 요구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여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다니 마을의 한 사람은 나귀 한 마리를 정성껏 길렀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주님의 제자들이 와서 달라고 하니 기꺼이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는 데 무엇인들 드리지 못하겠습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도 하나님이 ‘바쳐라’ 고 하시니 지체 없이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산으로 가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은 자손의 번성케 하는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1) 그런데 수가성의 이 여인은 주님이 물을 달라고 할 때 물은 드리지 않고 엉뚱한 말을 합니다.
9절 말씀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 여인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도 안 하드니 이제는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고 빈정댔습니다. 뒤틀린 이상성격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나의 생각, 나의 신앙이 뒤틀리면 안 됩니다. 바른 생각, 바른 믿음, 바른 사상, 바른 선입관을 갖어야 합니다.
(2) 주님은 여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10절 말씀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러니까 이번에는 대답하기를 “이 물은 깊고 당신은 물 긷는 도구도 없는데 무슨 수로 이 물을 긷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떠먹지 왜 나에게 달라고 하느냐 그런 뜻입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파서 우리들이 지금까지 먹고살았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합니까?” 얼마나 주님을 무시한 말입니까? 주님을 야곱과 비교를 하였습니다. 물길을 두레박도 없이 물을 긷느냐고 무시하였습니다.
(3) 세 번째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러니까 이 여인은 다시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그 물을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 물 길러 여기 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 얼마나 이기주의요 자기중심적입니까? 우리 성도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에게 유익하다면 체면도, 염치도, 신앙도 다 버리고 욕심만 부리는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3. 주님은 이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아픈곳, 수치, 감추고 싶은것을 들추어 내게하여 치유케 하라----교회가 해야할 일
교회는 징계가 사라지고, 프라이버시를 건들지 않고 죄를 덮고. . .복 복 복, 은혜 은혜
그러니까 이번에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변명하기를 남편이 없다고 이제는 거짓말까지 합니다. 주님께서 “네 남편을 데려 오라” 고 하신 말씀은 그 여인의 가장 잘못된 부분,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양심이 있어서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고 합니다. 마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해와가 선악과를 먹고 숲 속에 숨은 것과 같습니다. 이 여인이 남편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지만 주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고 하시니 그제서야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시군요” 하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합니다. 이 여인은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이와 같은 방탕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돈 많은 김(金)서방과도 살아보았고, 권력만 있으면 안 될 일이 없을 줄 알고 권력 있는 권(權)서방과도 살아 보았습니다.
지식이 있는 남자와 같이 살면 행복할 줄 알고 지식이 많은 지(知)서방과도 살아보았습니다. 명예만 있으면 될 줄 알고 명예가 높은 명(名)서방 하고도 살아보았습니다. 힘세고 체격 좋은 강(强)서방과도 살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귀와 장수와 지혜를 얻어서 세상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모든 복을 누렸습니다. 거기다가 외국에서 가장 예쁜 여자 일천 명을 수입을 해 다가 비빈 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행복의 조건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1:2-3 말씀에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6명 아니 10명을 갈아도 그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병이 났을 때에는 근본적인 치유를 해야 하듯이 이 여인도 근본적인 심령의 치료가 있어야 합니다. 심령이 변화되고, 생각이 변화되고, 생활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 무더운 여름날 덥다고, 갈증이 난다고 해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면 입에서는 달콤하고 시원한 것 같으나 갈증은 더 나는 법입니다.
어린아이가 공원에 엄마와 같이 놀러 왔다가 엄마를 잃어버리고 그만 미아가 되었습니다. 미아보호소로 온 이 아이는 엄마를 부르며 계속 울기만 합니다. 보호소 직원들이 사탕을 사다 주고 장난감을 주고 아이스크림을 사다 주어도 이 아이는 계속 울기만 합니다. 우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는것은 빨리 엄마를 찾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 오라 고 하신 것도 이 여인의 부도덕한 생활을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기 위한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잘못된 생활을 고쳐주고 바로 잡아주고 치료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것을 치료받으려면 주님 앞에 내 놓아야 합니다. 병든 곳을 치료받으려면 환부를 의사 앞에 내 보여야 하듯이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죄악에 물든 우리의 심령을 주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고쳐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여인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눈이 밝아졌습니다.
예수님을 야곱과 비교하드니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메시아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G. S> 우물가의 여인처럼
4. 주님을 만난 이 여인은 마침내 변화가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 주님! 당신은 선지자시군요”
(요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요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이 말씀 한 마디에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리로 달려가서 소리를 지릅니다. 이때는 한낮의 시간이라 모두가 뜨거운 햇빛을 피하여 오수(午睡)를 즐기는 시간이라서 동리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큰 소리로 부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내가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나와서 보십시오. 나의 행한 모든 것을 그분은 알고 계십니다.”
사실상 자기의 지금까지 행한 일은 자랑스러운 일이 하나도 못됩니다. 부끄러운 것이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낮잠을 자고 있던 동리 사람들이 나와서 ‘저 여자가 미쳤다’ 고 합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외칩니다.
39절 말씀에 보니까 사마리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버려진 땅, 외면당하고, 멸시 당한 사마리아의 가장 비천한 한 여인이 주님을 믿고 회개하고 나니까 복음의 불이 당겨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이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생의 샘물을 소유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이 수가성의 여인처럼 영원한 생수를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강물 같은 평화와 기쁨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의 빅 피처, 큰 그림이 무엇인가?
수가성의 한 여인이 아니라 수가성을 변화시키고 회복시키고자함이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쓰레기장에서 장미꽃이 피고, 가시덤불에서 백합화가 피어나듯이, 버려진 땅, 그리고 외면당하고, 멸시와 천대받는 곳, 사마리아!! 그곳에서도 또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사는 한 여인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만남의 역사는 중요합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는 만남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가장 천대받고 멸시 당하는 여인일지라도 저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그 개인이 구원받고 사마리아 온 성에 구원의 물결이 파도쳤습니다. 은혜의 물결이 충만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21:3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 시간에 예수를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의 손을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이루고, 변화와 역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저 사마리아 수가성 마을 어귀의 우물가에서처럼 오늘 우리들에게 “내게 물을 좀 달라” 고 요구하십니다.
“주님이 쓰신다면, 주님의 요구라면, 나의 재주, 나의 시간, 나의 지혜, 나의 물질, 나의 생명까지도 드리겠나이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가장 부끄러운 죄악을 내어놓으라고 하실 때에 죄를 고백하고, 사유함 받고, 기쁨과 은혜의 충만함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하나하나가 변화될 때 “내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메시아를 만났습니다”라고 외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물결, 변화의 역사는 마치 수가성과 같이 우리 지역사회에도 강하게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
아학 스탭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수가성의 여인이 되어서 의양동연 지역을 변화시키고 복음화 시켜 수많은 가정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하나가 ‘문제는 내게 있다’ 고 생각하고 자신이 먼저 은혜 받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가 회개하지 않고 변화 받지 못할 때에 여러분의 가정의 구원의 역사는 중단됩니다.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의 복음화도 이루어 질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요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변화되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요한웨슬리와 같이,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고, 나가서는 이 나라 이 민족을 변화시키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인격정인 하나님, 인격적인 주님을 만남으로 축복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씨임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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