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자인 김훈(아우구스티노) 작가의 하얼빈이라는 작품은 2022년 여름, 출간되자 마자 바로 구입하여 읽었던 책이다. 지난 8월 중앙일보에 '내새끼 지상주의'라는 '특별기고'를 게재하여 많은 저항을 받는 것 같아, 김훈 작가의 책들을 다시 찾아 읽었다. 집에는 김훈 작가의 책이 참 많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거의 다 있는 것 같다.
「작가의 말」 중에서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실탄 일곱 발이 쟁여진 탄창 한 개, 그리고 ‘강제로 빌린(혹은 빼앗은)’ 여비 백 루블이 전부였다. 그때 그는 서른한 살의 청춘이었다. (…) 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두어놓을 수는 없다. ‘무직’이며 ‘포수’인 안중근은 약육강식하는 인간세의 운명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안중근은 말하고 또 말한다. 안중근의 총은 그의 말과 다르지 않다.
7쪽
1908년 1월 7일, 일본 제국 천황 메이지는 도쿄의 황궁에서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을 접견했다.
7쪽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 황태자의 보육을 책작년 말 이은을 서울에서 태자태사(太子太師) 자격으로 임지는 도쿄로 데려왔고 이날 메이지의 어전으로 인도했다.
8쪽
군복 단추를 끼우면서 메이지는 조선의 어린 황태자에게 주는 인상이 지나치게 위압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서양 외교관들에게도 일본이 조선을 문명적으로 대하고 있으며, 일본 천황이 조선의 어린 황태자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애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조선 황태자는 인질이 아니라 문명한 교육을 받게 하려는 조선 황제의 요청에 따라 일본 천황의 무육에 맡겨진 것임을 세계에 알리려면 군복 차림은 어색했지만, 신년의 첫 접견이므로 범하지 못할 만큼의 위엄은 필요할 것이었다.
8쪽
두려움은 못 느끼듯이 느끼게 해야만 흠뻑 젖게 할 수 있을 것이었다.
9쪽
이토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을 위협해서 퇴위시키고 차남 이척을 그 자리에 세웠다. 이척은 순종이고 황태자 이은은 순종의 이복동생이나 태황제로 밀려난 고종이 살아 있으므로 이은은 황태제가 아닌 황태자의 자리로 나아갔다.
순종은 황위에 오른 뒤 국내정치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기로 협약했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협약에 도장을 찍었다. 순종은 황태자 이은을 일본 유학을 명분으로 인질로 삼으려는 이토의 강요에 저항하지 못했다.
10쪽
전하 저것이 바다입니다. 바다를 본 적이 있으신지요? 이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은은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도 또 그 아버지인 왕들도 바다를 본 적은 없을 것이었다.
13쪽
시간을 계량하고 시간을 사적내밀성의 영역에서 끌어내 공적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문명개화의 입구라고 설명을 해도 고루한 조선의 고관들은 알아듣지 못할 것이었다.
40쪽
쇠가 이 세상에 길을 내고 있습니다. 길이 열리면 이 세계는 그 길 위로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한번 길을 내면, 길이 또 길을 만들어내서 누구도 길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힘이 길을 만들고 길은 힘을 만드는 것입니다.
67쪽
너는 가기로 작정을 하고 나를 찾아왔구나. 나는 나의 사람됨을 알고 있다. 너의 영혼을 나는 가엾게 여긴다. 안중근이 일어서서 물러가려 할 때 빌렘은 돌아앉아서, 겟세마네의 예수를 향해 기도드리고 있었다.
88~89쪽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는 밤에, 안중근은 이토의 육신에 목숨이 붙어서 작동하고 있는 사태를 견딜 수 없어하는 자신의 마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토의 목숨을 죽여서 없앤다기보다는, 이토가 살아서 이 세상을 휘젓고 돌아다니지 않도록 이토의 존재를 소거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바라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104쪽
우덕순이 말했다.
— 이토가 온다는 얘기냐?
— 그렇다. 하얼빈으로 온다.
— 온다고?
항구 앞 루스키섬의 등대 불빛이 어둠을 휘저었다. 불빛은 술집 안까지 들어왔다. 불빛이 스칠 때 우덕순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142쪽
둘은 사진관 의자에 앉았다. 사진사가 카메라 뒤에서 러시아 말로 뭐라고 소리치더니 셔터를 눌렀다. 새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몸 매무새와 이발을 한 이목구비가 사진에 찍혔다. 안중근은 사진값으로 이 루블을 냈다. 러시아인 사진사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이며 닷새 후에 와서 사진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닷새 후에 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안중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159쪽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가늠쇠 너머에 표적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표적으로 시력을 집중할수록 표적은 희미해졌다. 표적에 닿지 못하는 한줄기 시선이 가늠쇠 너머에서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보이는 조준선과 보이지 않는 표적 사이에서 총구는 늘 흔들렸고,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는 방아쇠를 거머쥐고 머뭇거렸다.
166~167쪽
탄창에 네 발이 남았을 때, 안중근은 적막에서 깨어났다. ……나는 이토를 본 적이 없다…… 저것이 이토가 아닐 수도 있다……
193쪽
이토가 죽지 않고 병원으로 실려가서 살아났다면, 이토의 세상은 더욱 사나워지겠구나. 이토가 죽지 않았다면 이토를 쏜 이유에 대해서 이토에게 말할 자리가 있을까. 세 발은 정확히 들어갔는데, 이토는 죽었는가. 살아나는 중인가. 죽어가는 중인가.
227쪽
안중근은 용수를 벗은 눈으로 우덕순을 바라보았다. 우덕순도 안중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안중근은 우덕순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메마른 눈동자가 버스럭거리는 듯싶었다.
248쪽
빌렘은 겟세마네의 예수 앞에 꿇어앉았다. 빌렘은 조선에 부임한 이래 이 작은 반도 안에서 벌어진 죽음과 죽임을 생각했다. 교회 밖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지를 빌렘은 하느님께 물었다. 하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중근이 이토를 죽였으므로 이토의 사람들은 또 안중근을 죽일 테지만, 안중근이 사형을 당하기 전까지 아직은 며칠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빌렘은 안중근의 생명이 살아 있는 그 며칠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