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1. 02.
1985년 4월 16일, 참다못한 인천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지는 것은 참을 수 있다. 그러나 0-3으로 지는 경기를 어떻게 0-16까지 내팽개치는가.”
끝 모를 무기력감에 빠져 그날 0-16으로 참패한 삼미 슈퍼스타즈를 향해 인천 팬들이 목청을 높인 이유다. 경기가 끝난 뒤 500여명의 팬들은 삼미 선수들이 버스에 올라탄 뒤 차창 커튼을 내리자 구장 통로를 가로막고 “김진영 감독 나와라”, “장명부는 물러나라” 같은 구호를 외치며 참패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열성팬들 사이에서는 “인천야구 망신 그만 시키고 아예 야구를 그만둬라”는 격한 목소리도 실려 나왔다.
한쪽에선 “슈퍼스타즈 파이팅”, “힘내라” 따위의 성원도 섞여 있었지만 거센 분노의 외침에 이내 파묻혀버렸다. 팬들의 항의 사태로 삼미 선수단은 30여 분 동안 운동장을 떠나지 못했고 김진영 감독은 침통한 표정으로 덕 아웃에 앉아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어어, 하다가 11연패. 연패의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역사에 길이 남은 18연패, 그 기나긴 터널…그리고 몰락
표현이 거칠지만,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꼭 그 짝이었다. 그 해 4월 24일, 15연패 중이었던 삼미는 부산에서 열렸던 롯데 롯데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구장 장내아나운서의 순간 판단 착오에 의한 전광판 조작으로 승리 기회 날려버리는 허망한 일도 당했다.
삼미는 0-2로 뒤지던 7회 초 무사 1, 2루의 기회를 잡았다. 롯데가 선발 임호균을 내리고 양상문을 구원등판 시켰다. 삼미는 대타 금광옥이 양상문을 공략, 우익수 뒤 파울라인 근처에 큼지막한 2루타성 타구를 날렸다. 하지만 이 공은 펜스 쪽으로 전력 질주한 롯데 우익수 유두열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야간경기여서 제대로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한 삼미 1루 주자 정구선이 베이스 리터치 상태로 있다가 외야 선심의 아웃 사인을 보지 않은 것이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정구선은 전광판에 안타 표시가 들어오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2루로 뛰었다. 강한 어깨를 자랑하던 유두열이 지체 없이 1루로 공을 던졌고 미처 돌아오지 못한 정구선은 하릴 없이 아웃, 더블플레이가 되고 말았다.
일종의 해프닝 같은 장면이었지만 삼미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구속사태 이후 자숙하던 김진영 감독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30여 분간 경기가 중단됐고, 삼미는 속절없이 연패기록을 ‘16’으로 늘렸을 뿐이었다.
▲ 1982년 처음으로 열린 춘천 프로야구 개막식. 삼미 슈퍼 스타즈 선수들이 피켓을 들고 입장해 서있다. / IS포토
3월 30일 개막전(부산, 롯데) 승리 이후 마치 패신(敗神)에 홀린 듯 연패 행진을 벌인 삼미였다. 3월 31일부터 패배의 쓴잔을 들기 시작해 4월 29일까지 무려 18연패를 당하는 동안, 삼미는 속수무책이었고, ‘백약(百藥)이 무효’였다. 삼미를 상대하는 구단들은 ‘지면은 망신’이라는 자세로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심지어 삼미의 18연패 가운데 7승을 챙겨 선두로 나선 삼성은 그 사이 5점 이상 앞서 있는 상황에서도 가차 없이 번트를 대는 등 ‘불쌍한 삼미’를 사정 두지 않고 마구 몰아쳐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어쩌랴, 그 게 프로 승부세계의 비정함인 것을.
삼미 구단은 더 이상 김진영 감독 손에 팀을 맡기기 어려웠다. 18연패 직후 삼미는 김진영 감독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는 한편 재일교포 신용균 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임명, 지휘봉을 잡게 했다.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미 구단 매각설 등 온갖 악 소문마저 떠돌고 있었다. 신용균 감독대행이 최계훈을 불렀다. “이제 등판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며 등판을 요청했고, 김진영 감독과 불편한 관계였던 최계훈도 마음을 열고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인천고 출신 2년차 투수 최계훈은 4월 30일 인천 홈경기에 MBC 청룡을 상대로 선발 등판했다. 혼신을 다한 최계훈은 6피안타 무실점으로 MBC 타선을 꽁꽁 묶었고, 정구선이 2회 말에 선제 솔로 홈런, 양승관이 8회 말 1사 만루에서 싹 3타점 3루타를 날려 승리를 확인했다.
연패를 하는 동안 많은 팬들이 발길을 끊었지만 1000여 명의 열성팬들은 감격스런 광경을 지켜보았다. 경기 후 인천 팬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아! 대한민국”을 합창했고, 선수단은 그라운드에 나가 모자를 벗고 감사의 고개를 숙였다.
5월 1일, 삼미, 마침내 청보식품에 매각…고별전도 패배
비록 연패의 늪에서는 벗어났지만 삼미는 여전히 최약체 팀이었고 이미 만신창이였다. 스스로 기력을 추스르기에는 너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왔다.
▲ 1985년 5월 1일 구단주회의에서 삼미 김현철 구단주가 팀 매각을 발표했다. / 일간스포츠
5월 1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구단주 회의(임시총회) 석상에 나온 김현철 삼미 구단주가 팀 매각을 공식 발표했다. 서종철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를 비롯해 이건희(삼성), 김승연(한화), 이웅희(MBC), 박건배(해태) 등 구단주들이 대부분 참석한 회의에서 김현철 삼미 구단주는 풍한그룹의 청보식품에 구단을 매각하기로 한 사실을 알렸다. 구단주 총회는 그 자리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회원탈퇴와 청보식품의 회원가입 승인을 처리했다. 삼미 김현철 구단주로는 그 자리가 ‘최후의 만찬’이 된 셈이었다.
▲ 삼미 슈퍼스타즈가 청보 핀토스로 바뀐다는 내용을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 / 일간스포츠
삼미의 매각 조건은 양도금 70억 원에 전기리그 종료(6월 21일)까지는 삼미, 후기리그부터(6월 29일) 청보가 구단을 운영하고 선수단은 그대로 물려받는다는 것이었다. 인천, 경기, 강원의 팀 연고지도 변함없었다. 삼미의 팀 매각은 1982년 프로야구출범 이래 첫 사례였다.
1985년 6월 21일, 삼미 구단은 인천 구장에서 열렸던 전반기 마지막경기이자 고별전에서 롯데에 6-16으로 졌다. 3년 6개월 동안 온갖 영욕이 교차한 삼미 구단은 그 경기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삼미 슈퍼스타즈 장명부 투수 / 중앙일보
삼미는 상징적인 투수 재일교포 장명부가 5게임 출장정지에서 해제돼 선발로 나섰지만 초장에 일찌감치 무너졌다. 장명부는 단 1이닝 동안 12타자를 상대, 6안타를 집중 허용하면서 무려 8실점, 한국프로무대 50패째를 기록했다. 장명부는 6월 12일, 광주 해태전에서 김찬익 주심의 볼 판정에 과민반응 보이다가 4-4 동점이던 8회 말 김성한에게 역전 2타점 2루타를 얻어맞자 제 발로 마운드를 내려와 선수대기실로 들어서면서 욕설을 내뱉으며 글러브를 집어던져 유리창 두 장을 깨트려 KBO 징계를 받았던 터였다.
슈퍼스타즈는 삼미의 이름으로 치른 355게임에서 통산 120승 4무 211패의 기록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졌다. 앞으로도 도저히 깨어질 것 같지 않은 18연패와 1982년 전기리그 5승 35패, 승률 1할2푼5리의 팀 최저 승률, 7번의 기별리그 중 5번이나 꼴찌를 한 것 등 부끄러운 기록이 많았지만 1983년 시즌 최고수비율(.979) 한 시즌 개인 최다승(장명부 1983년 30승), 58게임 연속 개인 무실책(2루수 정구선 2루수) 등 영광스런 자취도 새겨놓았다.
홍윤표 선임기자
자료출처 : O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