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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와 문경의 역원(驛院) / 글 이정록
1. 영남대로(嶺南大路)
영남대로(嶺南大路)는 한양에서 부산 동래까지 연결된 간선 도로로, 경상충청대로·경상대로·동남저부산제4로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통상적으로는 ‘동래로’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 왕조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뒤 한양을 중심으로 X자 모양으로 간선 도로망을 구축했다. 영남대로(嶺南大路)는 한양에서 동래까지 한강과 낙동강(洛東江)의 수계(水系)를 따로 좌로, 중로 및 우로 등 세 갈래 길로 구축되었으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간선 도로 중 하나였다. 영남대로(嶺南大路)는 주변 인구가 조밀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정치적·경제적으로 매우 중시되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일본을 왕래하는 사신 및 통신사(通信使)를 접대하기 위해 역참을 설치하고, 통행인에게 숙식을 제공할 목적으로 원(院)과 주막을 설립함에 따라 물화의 이동과 사람의 왕래가 빈번해져 교통로로서 크게 발달하였다. 개항 이후에는 신작로가 개설되고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도가 도입되고 현대식 도로인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쇠퇴하였다. 영남대로(嶺南大路) 정치적·군사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여 오늘날의 서울~부산 간 현대식 도로와 도시 및 취락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남대로(嶺南大路)는 한양에서 부산(동래)으로 가는 큰길이며, 기찻길이나 자동찻길이 생겨나기 전에 사람과 우마가 다녔던 육로(陸路)이며 아주 큰 길이다.
2. 역원(驛院: 옛날 숙박시설)
역원(驛院)은 역도(驛道)와 원우(院宇)를 이르는 말로서 먼 길을 떠난 나그네들을 배려하기 위한 숙박 시설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피로에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곳으로 먼 길을 가야 하는 길손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시설이다. 조선조 초기만 하여도 개인이 운영하는 숙박 시설인 주막이 활성화되기 이전이라 원우(院宇)가 아니면 숙박하고 배를 채울 곳이 없으니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시설이다.
원의 유래는 고대국가 체제가 확립되면서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길의 역사와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문헌상에 나타난 최초의 원은 「신증 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역원조에 8세기 중엽 경주 대로원(大櫓院)이 존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양촌 권근의 견탄원루기(犬灘院樓記)에 의하면 나라에서 역을 두어 사명을 전하고 원을 두어 상인과 여행자들에게 혜택을 주었으며, 중국에는 5리마다 단정(短亭)을 10리마다 장정(長亭)을 두어 집을 떠난 백성이 노중(路中)에서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역의 역할은 중앙과 지방간의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물자를 운송하며 외국(外國) 사신(使臣)의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및 숙박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여 공무수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제도로서 관리를 두어 운영하였다.
각 지방의 역도(驛都)는 종 6품인 찰방(察訪)이, 역도에 소속된 역에는 종9품의 관원인 역승(驛丞)이 파견되어 업무를 담당하였다. 역은 주요 국도변에 30리마다 설치하였으며 우리가 종종 쓰는 ‘한참’(一站))이라는 말이 역과 역의 거리인 30리를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원(院)은 순전히 백성들의 편의를 위하여 설치 운영 되었다. 원은 대로변 요충지나 고개 또는 하천변 등에 설치되었는데 대략 10리 안팎의 거리를 유지하였다. 고려 후기의 정치적 불안과 홍건적의 침입 왜구의 창궐 등으로 인하여 전국 도처의 원들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퇴락되거나 아예 혁파(革罷)되었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원우에 관심을 두었다. 태조 6년에 편찬한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원은 보수, 원주의 차임, 원우의 유지에 관한 여러 기록들이 있고, 세종 7년에는 각 고을에 명하여 승속(僧俗)이나 착한 사람을 원주로 삼고, 도로 보수와 산불방지 등에 힘쓰게 하여 행인의 불편을 돕도록 하였다.
세종 10년에는 원주(院主: 원의 관리 책임자)에게 잡역을 면제하였으며, 세종 22년 변방인 평안도 회천에서 어연에 이르는 구간의 원우를 특별히 보수 하도록 명을 내렸다. 또한 경국대전에 원주에게 지급되는 원위전은 자경무세이며, 대로변에는 1결 35부. 중로에는 90부. 소로에는 45부를 지급토록 하고 보인(保人) 3명씩을 두게 하고, 타역에 종사하지 못하고, 오로지 원우 일에만 힘쓰도록 하는 등 원우에 관한 규정을 두어 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제도적 뒷받침을 하였다.
조선조 초기부터 원우의 활성화를 위하여 제도적 뒷받침을 하는 등 다각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급격히 퇴락하여 결국엔 대부분의 원우가 이 땅에서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천여 곳이 넘는 원우가 이제는 옛 문헌에나 남아있으며 원이 있었던 지역에 원의 이름이 지명으로 굳어져 전하는 것이 원우의 흔적이라면 흔적일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전국 원의 총수는 1309곳이며, 문경에는 2곳의 역(驛)과 11곳의 원(院)이 있다.
1)역도(驛道)
◎ 유곡역(幽谷驛)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찰방(察訪)을 두었다.
본도에 속한 역이 열여덟인데, 요성(聊城)ㆍ덕통(德通)ㆍ수산(守山)ㆍ낙양(洛陽)ㆍ낙동(洛東)ㆍ구며(仇㫆)ㆍ쌍계(雙溪)ㆍ안계(安溪)ㆍ대은(大隱)ㆍ지보(知保)ㆍ소계(召溪)ㆍ연향(延香)ㆍ낙원(洛源)ㆍ상림(上林)ㆍ낙서(洛西)ㆍ장림(長林)ㆍ낙평(洛平)ㆍ안곡(安谷)이다.
○ 홍귀달(洪貴達)의 중수기
“영의 남쪽 60여 주는 지역이 넓고 인구와 물산이 많은데, 그 수레와 말들이 모두 유곡(幽谷)의 길로 모여들어서야 서울로 갈 수 있고, 서울에서 남으로 내려가는 사람도 이곳을 지나야 한다. 이 역을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곧 영남의 목구멍이다. 목구멍에 병이 나면 음식을 통과시킬 수 없고, 음식이 통과하지 못하면 목숨 부지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아! 이것이 우후(禹侯)가 급히 전사(傳舍)를 수리하되 유곡을 먼저 한 까닭이리라. 유곡에 관사가 있기는 오래 전부터다. 그 창시가 언제인지 모르나 겸선(兼善)이 처음으로 서울을 왕래한 건 지금까지 40여 년이다. 처음 볼 때에 낡은 건물이었는데 지금까지 고쳐 지은 일이 없으니, 그 얼마나 기울었는지 알 만하다. 큼직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 누추한 것을 탓하고, 길손들은 이전부터 그 좁은 것을 걱정했었으며, 나도 지날 때마다 늘 그것을 한탄했었다. 그러나 홍치(弘治) 2년에 우웅(禹雄) 공이 이 역로의 찰방(察訪)이 되어, 파괴되고 쇠잔한 것을 소복시키는 데 빠진 계획이 없게 하여서 걷는 데는 빨리 걸을 수 있고, 타는 데는 말이 잘 달릴 수 있게 하였다. 파발길이 완전하게 되자 여럿에게 의논하기를, ‘역의 관사(館舍)가 퇴락하고 무너졌으니, 이것은 사신을 엄숙하게 대하고 길손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다. 우리보다 앞사람이 이미 할 수 없었고, 우리 뒷사람도 기대할 수 없으니, 이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중수하여야 할 것이다. 유곡은 우리의 본역(本驛)이요, 큰 손님이 처음 이르는 곳이며, 또 남북으로 내왕하는 요충이다. 그러므로, 이 일을 먼저 하려 한다.’ 하였더니, 여럿이 ‘좋다.’고 하였다. 이에 재목은 가까운 산에서, 힘은 이웃 역졸들에게서 얻고, 잘하는 목수를 골라서, 당(堂)은 옛터에 새로 세우고, 대청이며 동(東)ㆍ서헌(西軒)이며, 나머지 그 밖의 것도 모두 옛것을 수리하였다. 백년 동안이나 허물어져 있던 것이 한 달 안에 환하게 일신되었다. 어떻게 그렇게도 빨리 힘들이지 않고 이루어졌을까. 당시 겸선(兼善)은 아버지의 상을 만나 함창(咸昌)에 있었는데, 일이 있어 여기를 지나면서 이른바 새로 지은 동ㆍ서헌에 잠깐 쉬었다. 대마루를 쳐다보고 창을 내다보면, 마음과 눈이 탁 트이는 것이 옛날과는 아주 다르다. 오래도록 바장이면서 매우 흐뭇해 하였다. 우공이 마음쓰기를 부지런히 하고, 일 처리에 능숙한 것을 가만히 생가하여 마음속에 두지 아니하였었다. 하루는 공이 글월을 보내어 나에게 기문을 써달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 우정(郵亭)이 있은 뒤로 찰방과 승(丞)이 몇 해 동안에 몇몇 사람이 갈리었는데도 능히 새로 짓지 못하였고, 뿐만 아니라 아전과 백성에게 해를 끼쳤으며, 역이 오래되어 쇠잔하였으되 일찍이 사람이 없었으니, 그곳은 참으로 우공에 대하여 죄인이다. 우공은 유학을 공부하다가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관리가 되었는데, 성품이 민첩하고 게다가 부지런하니 선비이면서 관리다. 그러므로 정치가 가혹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즐거이 일하는 데 나아갔으며, 민첩하고도 부지런했으므로 힘을 허비하지 않고 쉽게 일을 성취하였으니 참으로 기록할 만하다. 그러나 감사의 어둡고 밝은 것을 하등[殿]과 우등[最] 매기는 이부(吏部)가 인물을 저울질한다면 우공의 현명함이 능히 이에 해당할 것인가. 여기에 내가 무슨 말을 하랴. 마지않는다면 여기 한 가지 말이 있다. 세상 일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이루어 놓고서 쉽게 파괴되거나 파괴되고도 수리하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다. 옛날부터 어질고 슬기로운 선비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침체한 것을 진흥시키고 황폐한 것을 보수할 때에, 처음부터 오래 보존하려 애쓰지 않아서, 황폐되어 수리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니, 매우 한탄할 만한 일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창작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게 한다면 세상에 어찌 헐고 무너지는 일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쓰지 않을 수 없기에, 그것을 우공의 뒤를 잇는 이에게 남기어 경계가 되게 하노라.” 하였다.
허백정집(虛白亭集) 권2 기문(記文)
◎ 요성역(聊城驛)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지금의 요성리이다.
○ 고려 이규보(李奎報)의 시
“幽谷一宵中酒宿 유곡의 하룻밤은 술에 취하여 자고
聊城半日解驂留 요성에서 한나절 멍에 풀고 머문다
歸來阮籍空長嘯 돌아온 완적(阮籍)은 하염없이 긴 휘파람만 불고
寂寞相如故倦遊 쓸쓸한 상여(相如)는 짐짓 벼슬에 실증이 났네
郵吏送迎何日了 우정(郵亭)의 아전들 보내고 맞이하는 것 언제 끝나며
使華來往幾時休 사신들의 내왕이 어k느 때에나 멎으려는지
惟余幸是閑行者 오직 나같이 한가로이 다니는 사람만이 다행이로구나
來不煩人去自由 와도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고 가는 것 자유롭네.
2) 원우(院宇)
조령원(鳥嶺院) 새재의 고갯마루 동쪽에 있다. (2관문과 3관문 사이)
요광원(要光院)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이화령 넘어가는 길목이다. 지금의 각서리)
관음원(觀音院) 겨릅재(하늘재) 밑에 있다. (지금의 관음리에 있다)
곶갑원(串岬院) 곶갑 북쪽에 있다. (토끼벼랑에 있다)
회연원(回淵院) 용연 위에 있다. (마성 신현리 이다)
개경원(開慶院) 호계현 서쪽 3리에 있다. (호계면 별암리와 견탄1리 사이)
불정원(佛井院) 호계현 서쪽 8리에 있다.(불정리 원동)
보통원(普通院) 호계현의 남쪽, 본현(문경현)에서 45리 되는 곳에 있다. (모전동과 윤직동 사이)
동화원(桐華院) 현의 서북쪽 15리에 있다.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있다.)
견탄원(犬灘院) 견탄 북쪽 기슭에 있다.(지금의 견탄2리)
○ 권근(權近)의 견탄원루기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반드시 큰 재가 있는데, 그 재를 넘어서 약 백 리 길은 모두 큰 산 사이를 가야 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곶갑(串岬)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곶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낭떠러지를 따라 사다릿길로 길을 열어서 사람과 말들이 겨우 통행한다. 위에는 험한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에는 깊은 시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떨고 무서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그 내를 건너는데, 그것이 견탄(犬灘)이다. 견탄은 호계현의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이요,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여울 위에는 전에 원(院)이 있었으나, 지금은 퇴락한 지 오래되어 길손이 쉴 곳이 없다. 화엄대사(華嚴大師) 진공(眞公)이 일찍이 여기를 지나다가 개탄하여,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키려고 곧 그의 문도들을 거느리고 띠를 베어 거처할 집을 짓고 또 길손들을 접대해 가면서, 여러 사람을 잘 달래어 재물과 사람의 힘을 모아서 재목을 찍고 기와를 굽는 등 공사를 일으켜서, 몇 칸 집을 세워 걸어다니는 길손의 머물러 자는 곳으로 하였다.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자리를 달리하고, 사람과 가축의 처소를 따로 하였다. 또 그 남쪽에 누각 몇 칸을 지어서 길가는 이는 거기서 쉬어가고, 구경하는 이는 올라가 보며, 지친 사람은 거기에서 쉬고, 더운 사람은 시원하게 하려 하였다. 몇 해 안 되어 준공하였다. 또 그의 문도들과 함께 모진 돌을 깨서 치우고, 비탈을 깎아 평평하게 하여 곶갑의 길을 보수하였으므로 좁은 길, 위험한 사다릿길이 모두 평탄해졌다. 그리하여 다니는 사람들이 평지를 밟는 것 같아서 걸어가도 몸을 구부릴 필요가 없고, 타고 가도 마음이 떨리지 않아 다시는 떨어질 위험이 없게 되었으니, 대사의 마음씀이 부지런하고, 사람들을 이롭게 함이 크다 할 것이다. 이제 우리 형님 반룡대사(盤龍大師)가 서울 오는 것을 인하여 나에게 누각의 기문을 써달라고 하는데, 화엄대사와 반룡대사는 같이 뽑힌 이들이다.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겠으므로, 삼가 《주례(周禮)》를 살피건대, 무릇 나라의 도로에는 10리마다 여(廬 초막)가 있고, 30리마다 숙(宿 여관)이 있었다. 또 후세에는 10리마다 장정(長亭 쉬는 집) 하나, 5리마다 단정(短亭 쉬는 작은 정자) 하나를 두었는데, 모두 나그네를 위한 것이었다. 나라에서 파발을 두어 사명(使命)을 전하고, 원(院)을 두어 상인과 여행자에게 혜택을 주되, 공과 사의 구별, 상하의 구별이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파발에는 각각 관리가 있어 그 직책에 힘썼으나, 원에는 다만 밭을 주고 사람을 모집하여 그것을 주관하게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평원이나 기름진 땅 안에 있어서도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가끔 있는데, 하물며 깊은 산골의 험하고 메마른 곳임에랴. 평원에 있어서는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원집이 없어도 잘 데가 있지만, 산골짜기 외진 곳에서 해는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고, 사람과 말은 지치고, 범이나 표범의 두려움, 도둑의 염려 등 길손의 걱정은 이보다 심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대사가 이 원(院)을 지어 막히고 호젓한 길에 사람을 들게 한 것은, 그 공이 다른 원을 지은 데 비하여 천백 배나 될 것이다. 나는 친구에게 불법에서는 남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길과 다리를 보수하고 원집을 짓는 것도 그 중의 한 가지 일이니, 그 공덕을 짓고 보은을 받는다는 내용은 나는 배우지 않아 잘 모르지마는 대사는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였다. 양촌집『陽村集』 권12 기류「記類
◎ 화봉원(華封院)
속칭 초곡원(草谷院)인데 현의 북쪽 4리에 있다.
지금의 상초리와 하초리의 중간지점이다.
○ 고려 유희(劉曦)의 시
謫宦南行十六驛 좌천된 신하 남쪽으로 16역을 가서
今朝始踐尙原境 오늘 아침 비로소 상원(尙原)의 경계를 밟았네
聊城側畔數里餘 요성(聊城) 곁 몇 리 남짓한 곳에
有一僻郡號聞慶 문경(聞慶)이라 불리는 궁벽한 군이 있는데
郡邊新院勢甚嚴 군(郡) 변방의 새로 지은 원(院) 형세가 매우 엄하다
爛然金碧交相映 찬란히 금빛 벽이 서로 비추고
東偏小樓尤奇絶 동편의 작은 누각 더욱 기묘하여
壓倒休文舊八詠 옛 팔영을 읊은 아름다운 문장 압도하네
美哉此屋是誰營 아름답구나. 이 건물은 누가 세웠는가
光文其名閔其姓 이름은 광문(光文), 성은 민(閔)일세
我是閔公門下人 내 민공 문하의 사람으로서
今見創構益自敬 지금 세우신 건물을 보니 더욱 절로 존경스럽도다
嗟乎此人留在世 아! 이 분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면
經營天下不爲病 천하를 경영하는 데 병통이 없을 것을
奈何天上玉樓成 어떻게 천상의 옥루를 만들었는가
鴈過長空不留影 기러기가 허공을 지나가도 그림자 남기지 않듯이
塵凡已隔杳難尋 속세에서는 이미 막혀 찾기 어려우니
只自興歎玆之永 단지 절로 일어나는 한탄만 길어지는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문경현>편 역원(驛院)조